항월(項越)은 목너미, 목넴기로 불린다.
대방마을에서 볼 때 길목 너머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왜 이름을 대방마을의 관점에서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는 강 씨 어르신이 1770년, 영암에서 옥룡면 용곡리 대방촌을 지나 왕금산과 옥받골을 넘어 이 산자락에 깃들일 때 그때 생각한 이름이 아닐까? 와보니 이곳, 목너미도 사람이 살만하다 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하며 항월마을로 간다. 

항월마을
항월마을

왕금산 한옥마을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항월마을 진입로가 있다. 아래 큰 도로에서는 집이 몇 채 보이지 않았는데 아기자기한 마을이 하나 숨어있다. 해가 너무 짱짱해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행여 마을 어르신을 만나면 어떻게 나를 소개할 것인지 속으로 되뇌어 보면서 고샅길을 걷는다. 

방수포로 덮어놓은 우물은 반질반질하던 한때를 다 보내고 이제는 물러앉은 뒷방 늙은이처럼 쓸쓸해 보인다. 시멘트 계단이 오르기 쉽게 나지막하니 산으로 뻗어 있다. 막상 올라가 보니 생각과는 달리 녹음에 가려 마을이 다 보이지 않는다. 계단 옆 비어있는 줄 알았던 집에서 개 두 마리가 죽자 살자 짖어댄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마침 마을회관이 코앞에 있다. 반가운 마음에 조심스레 노크해보는데, “어서 오이다, 문 열렸소”라는 말이 들려온다.

월 마을회관
월 마을회관

일곱, 여덟 분 되는 마을 어르신들이 한창 치매 예방 활동(?) 중이시다. 간단하게 본인 소개를 하니 청일점 어르신이 “나는 이번 판에 들어갈라요”하시며 마을 이야기를 들려줄 채비를 하신다.

예전에는 이곳 ‘목넴기’가 부촌이었는데, 이제는 노인들만 남아서 예전만 못하다. 한때는 53가구나 되었는데, 지금은 30여 가구 남짓이라고 한다. 외지인들이 집을 예쁘게 지어서 들어오기는 했는데 주말에만 올 뿐 거주를 하지는 않는단다. 정착한 세대는 3가구뿐이라고 한다. 

“우리 마을의 좌청룡 우백호가 뭔지 아요?” 잠시 생각해보는 척하는 사이에 좌청룡은 200년 정도 되는 은행나무이고, 우백호는 전각 2개가 앉아 있는 마을공원이라고 알려주신다. 지금은 마을회관에 에어컨이 있어서 모두 이곳으로 모이지만 예전에는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우백호인 우산각에 모여 놀았다.

좌청룡 은행나무
좌청룡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기세가 등등하다. 둘레는 크지 않지만, 하늘을 향해 힘껏 키를 늘이며 검푸른 잎을 무성하게 드리우고 있다. “은행이 아조 많이 열려서 가을이면 모두 줏어다가 집집마다 지사(제사) 때 쓰고는 하요”

항월마을의 우물은 지금은 쓰지 않아 덮어놓았지만, 예전에는 모두 이 우물물을 길어 먹고 살았다. 읍에 나갔다 오는 장꾼들이 이 우물물로 목을 축이고 동동이나 선동으로 갔다. 우물 아래에는 빨래터 겸 화재 시 소방용수로 쓰이던 작은 연못이 있다. 마을에 개울이 없다 보니 연못을 만들어서 방재수로 썼다고 한다. 지금은 수련과 부레옥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처음 마을을 연 사람이 강 씨라고 했는데, 대대로 항월은 강 씨 집성촌으로 알려진 곳이다. 물론 백 씨도 있고 서 씨, 김 씨, 정 씨가 골고루 섞여 살고 있다. 서당 선생을 하였던 백중기 어르신이 유명했다.

항일 독립운동가 서성식은 운평에 있는 서당 견용재에 다니던 어린 학생이었다. 일곱 명의 급우들과 함께 1919년 4월 2일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독립 만세를 소리높여 부르며 읍내를 향해 가다가 왜경에게 잡혀 심한 폭행을 당하고 모두 6개월 내외의 징역형을 받았다. 현재 옥룡초등학교 교내에는 일곱 소년의 의거를 기리는 「칠의사 삼일운동 기념비」가 있다.

“우리 마을은 의사나 약국 하는 사람들이 많애. 글고 별을 단 사람도 있어. 강준이라고, 쉰서너이 됐는디 해군준장으로 지난해에 예편을 했그만” 우리 집안이라는 말에 자부심이 묻어난다.

우백호 마을공원
우백호 마을공원

“옛날에 이곳이 왜 부촌이라는 말을 들었냐 하먼, 요 앞에 들이 종자뜰로 불리는디, 7년 대한에도, 7년 큰 가뭄이라 그말이여이, 다른 곳은 나락종자까지 다 몰라뿌리는디 이 들에서는 종자는 건졌다 그말이여. 그래서 종자뜰이여. 쩌그 왕금산이 예전에는 항월이었는디, 지금은 용곡리에 속할 것이여. 용곡과 항월의 경계에 있는디, 왜정시대에 거그서 금이 많이 나왔다요. 한 30년 전인가, 어떤 사람이 다시 금을 캐볼 것이라고 허가를 냈었소, 채산이 맞지 않아 실패했지, 거그다가 한옥마을을 지었는디, 그 산 땅속이 전부 굴이라, 토끼굴 맨키로 얼기설기 굴이 나 있는 것을 모다 메우고 집을 지었소”

마을 입구 왕금산은 조그마한 야산인데, 금맥이 맺힌 산이라,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송진환(宋鎭煥)이라는 사람이 왕금산을 비롯한 이곳 부근지역의 금·은 광업권을 획득해 토금을 채취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광양의 금광은 조선 3대 금광에 들 정도로 순도와 질이 양호했다. 초남과 본정에는 큰 광산이 있었고, 광양은 금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왕금산도 금이 많이 나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뿐인가? 은점재는 광양읍 용강에서 임기로 가는 고개로 옛날 이 지역에서 은(銀)이 났었다고 전한다. 진상 어치에는 자철광 계열의 철광석을 원료로 한 원시적인 제철 조업이 이뤄졌다는 생쇠골이 있다, 그러고 보면 광양은 단단한 광석의 땅, 호남정맥의 마지막 기운이 야무지게 맺힌 알짜배기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친목계 같은 것은 지금은 다 없어져 부렀소. 상여계는 상여를 맬 일이 없으니 자연히 없어져부렀고, 상조회니 하는 동네 계도 노인들만 있다 보니 시나브로 없어졌소. 여그서 저녁이면 밥해 먹는 것이 상조지 뭐”

강대준(84세) 항월 노인회장
강대준(84세) 항월 노인회장

노인회장(강대준, 84)이 말을 이어가는데, 주도순(84)씨가 말을 거든다. “요새는 날이 하도 더운께 어식아식할 때 바깥일은 다 해불고 점심묵고 회관에 오면 놀다가 저녁을 해묵고 집으로 가요” 

그새 어울려 놀던 주민들이 저녁을 준비하러 간다며 일어섰다. “오늘 제대로 이야기해줄 사람을 만났네요이. 날을 잘 잡으셨소” 그중 젊으신 분들인데 식구들 저녁상을 차려야 하는 모양이고, 남은 분들은 집에 가봐야 혼자 드셔야 하니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가는가 보았다. 조기찌개인지 짤박하게 졸인 냄새가 구수하다. 

저녁을 준비하는 분이 서화자 씨(85세)이고, 바닥에 앉아계신 분이 공기순 씨(84세), 소파쪽에 앉아계시는 분이 90세 된 서성님 씨인데 모두 정정해서 깜짝 놀랐더니 “흐흐 앉아 있어서 그러나 보네. 일어서 걸으면 다 볼 만 할 텐데. 오늘은 안오셌지만, 구십다섯 잡수신 양반을 봤으면 놀래 자빠지겄네” 하시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신다.

마을 당산나무가 귀목나무라고 나와 있는데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태풍에 ‘자빠져부러서 면에서 와서 철거했다고’ 하신다. 큰 팽나무도 고사해버리고 은행나무가 남아 있는데, 한때 지나가는 장사치들이 팔라고 하도 졸랐지만 끝내 팔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돈으로 50만원이면 거금이었는데, 돈도 흩어지고 나무도 없어져 버릴 것 같아 거절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천만다행이라고 하신다.

차문절공 목판이 있는 서원
차문절공 목판이 있는 서원

차문절공유사목판이 보관된 차씨서원은 예전 자연농원 옆에 있다. “이성웅 시장 시절에 율촌에 있던 것을 이 마을로 가져오게 됐어요. 옥룡에 사는 연안차씨들 인연으로 오게 되얐는갑소. 서원이 크지는 안해요, 쬐깐해요”

차문절공유사목판은 199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고려말 학자인 문절공 차원부(1320~1407)의 글과 행적을 엮은 「車文節公遺事」를 간행하기 위해 정조 15년(1791)에 만들어진 목판을 이곳 서원에 보관하고 있다. 교서관에서 판각하고 국가기관에서 간행한 것으로 결판이 없고 보존상태가 좋아 서지학 및 인쇄사적으로 가치가 크다고 한다.

항월마을은 정적靜的이다. 세월 따라 나이 들어가는 전형적인 우리네 마을이다. 마을회관은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건강지킴이 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마을회관 벽에는 회관 준공시(2007년 9월 23일) 희사를 하신 분들의 방명기를 액자로 만들어 걸어두었다. 염소 1마리, 복분자 1박스, 대형냉장고, 각자 성의를 다한 성금 등이 눈에 띈다. 소박하고 정겨운 항월마을의 여름이다.

글·사진=정은주 광양문화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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