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정기 어린 동동마을

동동과 선동·답곡·병암·묵방·심원은 동곡리에 속하는데 백운산 바로 아랫마을들이다.

백운산은 해발 1222m로 전남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호남정맥을 완성하고 섬진강 550리 물길을 마무리한다.

한반도를 호랑이가 앉아있는 형상이라고 보면 여기가 백두대간의 끝이라. 뭐든지 끝부분이, 꼬리 부분이 기가 센 것인데, 독사도 꼬리를 끊어버리면 독을 못 품고, 소도 꼬리를 끊어버리면 힘을 못 쓰듯이 여기 백운산이 그만큼 기가 센 곳이라!

현재 송광사 방장인 현봉 스님의 말씀이다.

백운산은 鳳精, 狐精, 猪精의 세 가지 정기를 가진 산이라고 한다. 그중 봉황의 정기는 최산두가, 여우의 정기는 고려조 옥룡 초암부락에서 태어난 월애가 이미 받았다고 하는데 돼지의 정기를 받은 자는 아직 없다고 한다. 돼지의 정기는 옛날 중국의 석숭 같은 부자가 날 기운이라는데 은근히 이 기운을 기대하는 광양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항간에는 광양제철소가 이 기운 덕분에 들어섰다고도 하는데, 그럴까?

동동마을 전경
동동마을 전경

학사대 건너편에서 백년동가든을 운영 중인 성태문 이장은 학사대에 꽂혀 있었다. 예전 같지 않은 마을 분위기를 관광사업을 통해 돌파해보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의 신주소가 신재로로 시작되는데 신재가 최산두 선생의 호라는 것을 모르는 주민들이 많아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백운산농장을 이야기하다가도, 송천사를 이야기하다가도 이내 학사대 자료를 뒤적인다.

저 아래 세월교를 건너면 학사대까지 도로가 포장되어있기는 하지만 그러면 뭐 합니까? 풀이 우거져 접근조차 하기가 힘듭니다. 출렁다리를 놓고 주변을 정비한 후에 안내판을 떡하니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곳은 감, , , 고로쇠가 나는 곳이잖습니까, 체험농촌을 만들어 견학지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자료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에도 전화벨 소리가 바쁘다. 마을에 나무를 베고 있으니 이장님이 오셨으면 한다는 전화에, 산장에는 예약 손님까지 들어오고 있다.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다. 그렇다고 가장 묻고 싶었던 백운산농장 이야기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198312월에 발행된 광양군지는 741쪽에서 755쪽까지 무려 한 을 할애해서 백운산농장 개척기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당시 광양군지 편찬 책임 상임위원이었던 이균영 선생에게 대하소설의 영감을 준 바로 그곳! 백운산농장의 계획과 좌절의 연대기가 郡誌라는 지면에 보기 드물게 기록되어 있다. 개척에 참여했던 농민(당시 5인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서정 선생)의 입장에서 간추린 기록이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감자밥 고구마밥이 주식이었고, 옷이라곤 작업복 단 1벌에 군홧발로 비탈진 산을 오르내리던 개척자들을 멧돼지, 광인(狂人)이라고 부르며 절절한 애정과 숙연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자급자족 공동체를 꿈꿨던 원대한 이상의 공간이 와해 되는 것을 <좌절된 신화>라는 단원에서 농장 내부의 문제점과 제도적 요인, 농업의 숙명적 요인으로 세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농장의 실패를 죽어도 잊지 못할 한이라고 표현한 글의 말미에서는(물론 서정 선생의 표현이지만) 이균영 선생이 그렸던 대하소설의 얼개가 어렴풋이 내비치기도 한다.

다음은 성태문 이장의 백운산농장 관련 인터뷰 내용이다.

백운산농장은 70여만 평에 이르는 대단위 농장이었다. 목축과 양봉, 과수를 비롯한 온갖 작물을 심어 가꾸는 종합농장이었다. 공동체 사회를 꿈꿨던 협동농장이었는데, 망했다! 고 하였다. 지방파와 개척파 간의 알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후 한 10여 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쌍룡 시멘트에서 인수해 여러 가지 사업을 의욕적으로 벌이는 것 같았다. 지금의 백운산 둘레길도 그때 모양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옥수수를 심고 소를 키우는 농장을 운영했으나 잘되지 않아서 포스코로 넘어가게 되었다.

포스코가 인수한 후에 직원들과 지역민의 휴식 공간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1 수영장을 지었는데, 이게 대박이 났다. 이내 1 수련관을 짓고, 백운산농장의 저수지가 있던 자리에 2 수영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2 수련관을 지었다.

포스코 백운산 1 수련원
포스코 백운산 1 수련원

한여름 휴가철에 사람들이 몰릴 때면 마을 입구 매표소에서부터 삼정지 다리까지 차들이 늘어서곤 했다. 대략 13천여 명이 수영장을 찾곤 하였는데 지금은 다 옛이야기이다.

날이 궂은 탓인지 이용객이 많지 않아서 길은 한가하다. 이슬비가 내리는데도 숲속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사람들과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러 보이기는 한다.

고로쇠만 해도 요즘은 전국 이곳저곳에서 생산이 되고 있고, 광양시 안에서도 이 마을 저 마을에서 고로쇠를 팔고 있어 고로쇠 경기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성태문 이장은 학사대 주변 정비와 개발이 마을의 활로를 열어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성태문 동동마을 이장
성태문 동동마을 이장

동동마을은 약 470년전 이천서씨가 처음 정착하였다고도 하고, 여산송씨 김해김씨가 터를 잡았다고도 전한다. 처음에는 마을 형국이 학의 모습이라고 하여 학동이라 하였는데, 그 후 송천사(松川寺)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동동으로 이름하였다고 전하며 동골 또는 동곡이라고도 부른다.

723, 바위산장 옆을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우렁차다. 백운산 정상과 따리봉 사이 한재에서 발원하여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동곡계곡은 10km에 달하며 광양의 4대 계곡 중 가장 길다. 길게 이어진 장마 때문에 바위산장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은 습하고 미끄럽다.

계곡 사진을 한 장 찍고 건너편을 보니 낯익은 비석이 보인다. 회은장로비이다. 동백나무에 둘러싸인 비석이 무대 주인공처럼 서 있다. 회은응준은 병자호란 때 팔도도총섭으로 승병을 이끌고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내력을 기록해 비석에 새겼다. 그러나 이렇게 계곡물이 불어날 때는 건너편에 있는 학사대, 회은장로비, 요소대 모두 접근 불가이다.

회은장로비
회은장로비

송천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백여 명이 한꺼번에 세수를 할 수 있는 돌 구유가 남아있어 그 규모를 추측할 수 있다고 군지에 씌어 있는데, 이 구유가 세수용인지, 발우와 식기를 씻기 위한 설거지통인지는 알 수가 없다.

바위산장 주차장에 송천사의 돌 구시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두리번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탄식이 먼저 나왔다. 안내판은 나무 둥치에 반쯤 가려져 있고, 그 옆에 石槽가 쓰레기통처럼 버려져 있다. 세상에, 광양의 유물 없음을 탓하기 전에 있는 것도 지키지 못하는 현장이 바로 눈앞에 있다.

송천사 돌구시
송천사 돌구시

송천사지 돌구시는 네모난 바위의 속을 파내고 석조 아래 귀퉁이에 작고 둥근 구멍을 뚫어 놓았다. 모양은 투박하나 송천사와 관련된 유물로는 몇 점 남지 않은 유물이다.

옥룡면사무소 뒤뜰에 있는 부도탑 일부와 함께 한 자리에 깨끗하게 모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요소대
요소대

요소대는 성태문 이장이 지난가을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커다란 병풍바위에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돌이끼가 덮여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지는 못한다고 한다. 시청에 알리고 탁본을 떠 놓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회신받은 것은 없다고 한다.

학사대는 암굴 위 바위 면에 학사대란 최산두 자필 글씨가 음각되어 있으며, 어린 시절 선생이 이곳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1회에 백숙아 회원이 기술하였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동동마을 하면 고로쇠 수액이 담긴 옴박지(옹기 항아리)와 매캐한 숯불 연기가 떠오른다. 좁은 방에 다닥다닥 들어앉아서 쉼 없이 약수를 들이켜고, 닭구이를 먹었던 곳이다.

백운산 약수제는 매년 경칩 날 白雲社에서 거행되는데, 기후변화로 인해 매년 첫 채취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고로쇠 수액에 얽힌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있다. 하나는 도선국사가 좌선을 하다가 일어서는데, 하도 오래 앉아있다가 보니 다리가 구부려져 펴지지 않았다. 옆에 있는 나무를 잡고 일어서는데 마침 부러진 나뭇가지의 수액을 받아먹었더니 다리가 펴지더라는 이야기가 있고, 또 하나는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라 신라 화랑이 이곳 고로쇠 수액을 먹으며 수련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슷한 이야기로는 신라 백제 간의 전쟁에서 신라군이 목이 말라 물을 찾던 중 우연히 나무에 꽂힌 화살 자국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해갈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고로쇠는 骨利水라고도 하고 미네랄이 풍부해서 뼈나 신경통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동동마을 회관
동동마을 회관

동동마을은 현재 73세대, 116명이 거주하고 있다. 남녀 각각 58명씩이다. 펜션, 민박하는 세대가 10가구이고, 산장이 5곳이다.

2020년에 준공된 마을회관이 널찍하다. 주변에 동곡 보건 진료소가 있다. 마을 입구 당산나무는 느티나무이며 수령이 350여 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 마을 꽃 가꾸기 사업으로 수국 250여 주를 심었다며 수국이 피면 한 번 더 오라고 이장님이 말씀하신다.

백운산 느랭이봉 아래 아늑하게 자리한 동동마을은 한때는 고로쇠마을로, 백운산 등산의 시발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학사대 정비와 자연경관 활용을 통해 마을이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 있을지 기대해보며 글을 마친다.

글·사진=정은주 광양문화연구회 회원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