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사는 명당, 선동마을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이름답게 선동은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절이 먼저 세워진 곳이라는데, 옛 광양의 큰 절이었던 송천사(지금은 폐사되어 흔적도 없어짐)가 있었고, 조계종 수좌들 사이에서 수행 정진 터로 유명한 상백운암이 있는 곳이다.

백운산 봉우리들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고, 한쪽이 살짝 열려 있어 마치 새 둥지 같은 느낌을 준다. 상백운암을 봉황새 둥지 터라고 하는데, 선동마을 또한 비슷한 느낌이다. 신선이 노닐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10여 년 전에 필자는 선동마을 앞에 오래된 차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차나무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마을 앞 답곡으로 이어지는 도로 아래쪽의 비탈진 대나무 숲속에 그 오래된 차나무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여름이라 대밭 모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찔레 가시와 온갖 푸나무 넝쿨, 뾰족한 대나무 그루터기가 말 그대로 죽창처럼 겨누고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 간신히 차나무 몇 그루를 확인하는 것에 그쳐야 했다. 어두컴컴한 대밭 속에 자라고 있는 차나무는 대나무처럼 가늘고 길쭉길쭉했다.

당시 마을 정자에서 만났던 주민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옮기자면, 바위산장 뒤편 백운산 수련원 초입에 큰 법당이 있었다고 했다. 200여 명 정도 되는 스님들이 거주했고, 구시가 두 평 남짓이나 됐으며, 한 끼 공양에 쌀 두 가마니를 썼다고 했다. “송광사 보다 훨씬 컸다니께.”

선동마을회관에서 본 법당터 주변
선동마을회관에서 본 법당터 주변

옥룡은 초입인 산본마을부터 절터골이었다. 추산리부터 선동까지는 화엄사 땅이었다. 선동마을 솔밭에서 발견된 대웅전 받침돌이 한 평 남짓이나 되었다. 송천사가 불탈 때는 일주일을 탔다고도 했다.

절 앞에서 짚세기를 벗어 들고 들어갔다네. 짚세기 애끼느라. , 절을 한바쿠 돌고 나오먼 짚세기가 다 닳아져부렀응게.”

송천사 말고 절이 한나 더 있었는데 난절이라고 했어.”
난절이요?”
아니 나안절” (아마도 나한전을 말하는 듯하다.)
백운산 절을 뜯어다가 나안절을 지었당게.”
글다가 또 우그로(위로) 이사를 갔제. 아이고, 말도 마랑께. 동네 사람들이 절을 지게에 짊어지고, 머리에 이고 날랐응게.”
절을요?”
, 지둥이랑 지왓장을 이고 지고, 까끄막을 올라댕겼당게. 우게 있는 것을 뜯어다가 아래다가 짓고, 또 그놈을 뜯어다가 우로 올라가 짓고. 어찌코롬 그런 일을 했는가 몰겄어. 그때는 묵는 것도 부실했는디. 묵고 살자고 했고, 묵고 살게 해주라고 비는 마음으로다가 했제.”
남시님(비구)들이 살다가 나가고 난 후에 여시님(비구니)들이 기거를 했어.”
이곳에 묵은 차나무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혹시 예전에 마을 분들이 차를 드셨나요?”
, 배 아푸먼 약으로다가 묵었지. 숭님(숭늉)처럼 소화제로다가 묵기도 했지.”
봄에 뾰줌뾰줌헌 잎사구가 올라오먼 그걸 따다 주고 한 오백 원인가 받았어. ,오십 년 전 이야깅께 에북 솔찮았어. 찻잎은 시님들헌티 팔았제.”
요 밑에 대밭 속에 차낭구가 많았는디, 길 넓히고 험성 비어불고, 집 지음시롱 비어내고, 대밭도 깎이고, 글다가 시나브로 없어져부렀어.”
근디, 차 이약이랑 절 이약은 근동떡이 잘 알꺼라. 그 냥반이 아매 백 살 가차이 되었을낀디, 한마디로 살아있는 옥펜(옥편)이라. 그 냥반을 한본 만나보시오.”

선동 마을 회관
선동 마을 회관

그렇게 만나 뵙게 된 분이 바로 근동떡, 김아지(당시 100) 할머니였다. 백수를 넘긴 할머니라 의사소통이 가능 할는지 염려가 되었다. 미리 할머니가 계시는 요양원 측에 가족의 허락을 얻어 양해를 구해놓았다. 김아지 할머니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걸을 수 없는 것을 빼고는 정정하고 단정했다. 차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노라고 운을 떼었다. 대뜸 할머니는 예수를 믿느냐고 물었다. 믿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니, 이녁 맴이지.”라고 하면서, 기독교 요양원에 들어온 지, 십일 년째라고 또박또박 말하였다.

차를 묵으면 영리해진다고 공부허는 시님들이 많이 드셌어. 주전자에 물을 넣고 낋이다가 찻잎을 넣고 댏이 묵었지. 찻잎은 애린 것을 따서, 으지 안에서 몰리 갖고, 댏이 묵었어

차낭구가 대밭 안에도 많았고, 그 근네도 많았어. , 그 낭구야 옛적에 중들이 숭겄겄제. 차낭구가 큰 것은 요만이나 했어.” 하면서, 커다랗게 양 손아귀를 벌려 보였다.

아조 오래된 낭구들이 많았지.”
우리 구산시님(입적, 전 송광사 방장)이랑은 한 삼 년을 살었어. 법문을 영 잘 하셌지. 시님도 차를 많이 드셌어. 따다가 몰리논 것을 댏이 드리기도 하고, 본인이 주전자에 댏이 묵기도 허싰지.”

절이 몬당에 있어농께, 아칙에 올라갔다가 저녁이먼 집으로 내리오고 했지. 시님이 안 계실직에는 문을 잠가놓고 내리왔는디, 절에 오래된 불상이 한나 있었어. 빈 절에 둘 수가 없응게 애기 안듯이 품어 안고 다녔지. 한 날 못 업고 내리온 날이 있었는디, 해필 그날 도둑이 들어서 돌라가 부렀어. 그 뒤로는 불상에 대해선 몰러.”

상백운암을 최근에 중창하신 정륜스님에 의하면, 그 불상은 지금 동국대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국대 박물관에 있는 것은 삼존불인데, 당시 김아지 할머니의 증언은 조그마한 불상이었다고 했다.)

참 우리 시님이 도인시님이셨지. 그렇게 법문을 잘 허시는 시님을 본 적이 없응게. 우리는 살아있는 부처님이라고 불렀어. 맨날 공부허시고, 또 공부허시고, 법문허시고 그랬지.”

다시 오겠다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1시간여의 짧은 만남을 뒤로했다. 그러나 차일피일 방문을 미루다가 이듬해 그만 김아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들어야 했다.

선동을 다시 찾은 날은 2023년 여름이 간신히 물러가려고 할 때였다. 백운산이 하얀 구름을 배경 삼아 청정하고 선명하게 솟아 있었다.

하믄, 이곳이 절터였다요. 쩌그 제철 수련원 올라가는 곳은 법당뒤라고 하고, 바위산장 앞은 절앞에라고 불러요. ‘법당뒤논에 간다 하고, ‘절앞에논에 간다 라고 말해요.”
이 인근에 큰 법당터가 세 곳이 있었다고 하는디, ‘법당뒤하고 절앞에하고, 동네 정자나무 근처 텃밭 자리가 그곳이라고 해요.”
하루는 그 텃밭에서 작은 돌부처가 나왔어,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가고 없기는 했는디, 감나무 아래 담장 우게다 얹어놓았드마 누가 돌라가부렀어.”
그곳이 터가 센 곳인가, 보통사람이 살아서는 재미를 못 봐, 다 못살고 그냥 나갔어.”

선동마을 부도탑
선동마을 부도탑

마을 들어오는 언덕에 부도탑이 몇 기 있다. 송천사 부도탑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취암당, 응암당, 송백당, 일명 부도 등이다.

옥룡 진등에 사는, 관셈보살이라고 불리던 분이 여그저그 흩어져있던 탑들을 한곳에 모으니라고 애를 썼당게. 탁발도 댕기고, 날이면 날마다 이곳에 와서 흙 속에 파묻히고, 풀 속에 들앉은 탑을 찾아냈지. 그 보살님이 서두르고 우리네 서방님들이 힘을 보탰지. 그때는 서방들이 다 힘이 좋았어. 그분을 첨엔 관셈보살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탑보살이라고 불렀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본동떡 이름은 우영업, 올해 여든 아홉이시다. 선동에서 나고 자라 선동으로 시집을 갔다. 그래서 본동떡이다.

아 긍게, 저집 시엄니가 아조 멋쟁이 신사였그만, 양산쓰고 댕기고 일은 한나도 못해, 아니 안 해. 근디 옆에 사는 처자가 모도 잘 찌고 일을 겁나게 잘하거등. 그래서 날이면 날마다 처자집으로 가서 딸 주라고 졸랐다요. 근동떡이 중신을 섰는디, 한마디로 일을 잘해서 시엄니헌티 잽혀부렀제. 본동떡 친정사람들이 용해가꼬 딸을 줬지.”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본동떡의 결혼 이야기를 신이 나서 들려주신다.

송백당 부도탑
송백당 부도탑

선동마을은 근처에 仙人舞袖穴의 명당이 있어 선동이라 했는데, 송천사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동이라고도 불렀다. 절터였던 마을답게 마을에 공사를 할 때면 옛날 물건이 심심찮게 발견되고는 했다. 옷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신선 마을, 김근식 이장은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손을 잡고 뒷산 백운사를 찾곤 했다. 절 앞 산비탈에서 다래나무 넝쿨을 타고 놀았다.

현재 선동의 가구 수는 30여 가구인데, 원래 토박이 가구는 18~20여 가구쯤이고 10여 가구는 들어와 사는 분들이라고 한다. 이 외부 유입 가구도 정착한 지 대부분 10년 이상은 되었다.

선동마을의 주소득원은 고로쇠 채취와 민박, 농업이었다. 현재 산장을 운영하는 가구가 몇 가구 되지만, 연로한 분들이 많아서 텃밭이나 일구는 정도이고, 대부분 특별한 경제활동은 하지 않는다.

인터뷰에 응한 김근식 이장(선동, 52)은 남정마을에서 하우스 농사를 하고, 논을 임대해서 벼농사도 짓고, 겨울에는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기도 하는 등 바쁘게 살고 있다. 고로쇠 수액은 밤에는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고 낮에는 10~13도쯤 될 때 잘 나온다. 채취 시기는 보통 120일에서 330일까지인데 요즘은 2월 중순이 넘어가면 따뜻한 기온 탓에 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올해 작황도 신통찮았다고 한다.

송천사는 마을 이름을 정할 만큼 큰 절이었다.(송천사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동,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동이라 불렀다.) 현재 바위산장 부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한 규모와 위치는 알 수 없다. 금당지, 천불전지, 나한전지라는 터가 있다고 전해지며 곳곳에 축대, 깨진 기와, 초석 등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문헌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다. 여지도서 등 사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엽까지는 있었으며 한동안 폐사되었다가 19세기 읍지에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 무렵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폐사되었으며, 그 후 민가가 들어서고 2002년 큰 수해까지 입어 그나마 남은 흔적마저 없어져 간다.

상백운암과 백운사는 따로 소개할 예정이다.

마을 아래 도로변에 있는 용소는 큰 용소와 작은 용소가 있는데 역대 현감들이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 신성시했던 곳이다. 2002년 큰물이 성큼성큼 걸어와 집채만 한 바위들이 떠내려갈 정도로 원래 모습이 변했다. 아들을 못 낳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 문바위에 닿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었으며 용소에서 백계동 눈밝이샘으로 통하는 굴이 있다고 전하기도 한다.

마을회관에 모인 어르신들
마을회관에 모인 어르신들

우리 동네는 특별히 자랑할 것은 없소만은, 이름답게 편안히 놀고 살 수 있는 곳이요. 예전에 우리 시어머니 근동떡이 그랬소, 여그 오면 전부 아들을 낳는다! 다 아들을 낳았지. 그때는 아들을 낳아야 좋은 시대였응게,”

평평하니 평범하니 사는 게 최고 아니겄소, 건강히 잘 사는 것이 젤로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소. 크게 부자는 없지만 다들 큰 걱정은 없이 살고 있소.”

근동떡이라 불리던, 김아지 할머니 며느리의 이야기이다. 몇 날 며칠이 걸려도 모자랄 것 같은 선동마을의 이야기꾼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연꽃 속 같기도 하고, 새 둥지 속 같기도 한 선동마을. 유서 깊은 이야기들이 천천히 발효되고 있는 마을. 백운산이 오늘따라 유난히 깊다.

글 사진 정은주 (광양문화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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