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숙희 광양기후환경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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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남쪽으로 나 있는 거실 창문을 연다. 그리고 창가에 앉아 눈에 들어오는 작은 뜰의 초록 물결에 나를 맡기고 한동안 멍하니 명상에 잠긴다. 일명 나의 행복한 뜰멍 시간이다. 꿀 같은 시간이다. 작은 뜰이지만 내겐 아주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 집 뜰에는 남천, 영산홍, 제피나무, 호랑가시나무, 사과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감나무 등 크고 작은 나무들이 저마다의 멋스러움을 자랑하며 크고 있다. 그중 나의 눈길이 가장 많이 가는 나무는 뜰 한 가운데에서 해마다 7월부터 10월까지 백일동안이나 꽃을 피워 뜰과 집 앞 동네 안길까지 화사하게 만들어 주는 진한 핑크빛 꽃이 아름다운 배롱나무다.

이 나무는 우리의 귀향을 환영한다며 남편의 선배가 키우던 나무 중 두 그루를 골라 선물해 주어 옮겨 심은 나무다.

심을 당시 나무는 잎이 하나도 없이 앙상한 지팡이와도 같은 모습으로 우리 마당에 옮겨 심어졌다. 도저히 싹이 틀 것 같지 않은 몰골이었다. 남편은 배롱나무는 이렇게 심는 거라며 걱정 말라고 호기 당당하게 큰소리쳤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고 나무가 살아날 것 같지 않아 불안했다. 그래서 다음 해에 싹이 나기를 기원하며 두 나무에 각각 현상금을 10만원씩 걸었다. 이듬해 봄 다른 나무에는 싹이 돋아났지만, 배롱나무는 싹이 돋을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러더니 마침내 늦은 봄이 되어서야 앙상한 가지 여기저기서 뾰족뾰족 새싹이 모습을 보였다. 그때의 기쁨은 현상금 20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싹이 나자 그해에 꽃이 필 것인가에 대해 또 현상금을 두 나무에 각각 20만원씩이나 걸었다. 그리고 두어 달 후 7월이 되니 나무는 진한 핑크빛의 고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귀향 선물로 받아 심은 나무는 무사히 살아나 꽃을 피워 몸값이 60만원이나 되어 내 지갑의 돈이 나무를 심은 남편에게로 넘어간 아주 비싼 나무가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마당 한가운데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주 오래전 내 집 장만을 위해 알뜰살뜰 절약하고 저축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던 30대 초반이던 어느 일요일 남편과 함께 길을 가다 쇼 윈도우에 걸려 있는 핑크빛 블라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예쁘고 마음에 들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사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고 사고 싶다는 말도 남편에게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 후 며칠이 지난 내 생일날 퇴근하고 들어오는 남편의 손에 조그만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불쑥 내미는 쇼핑백 안에는 얼마 전 내가 사고 싶어 했던 핑크빛의 그 블라우스가 들어 있었다.

그 당시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남편이 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넉넉지 않은 용돈을 아껴서 사 온 것이다. 블라우스의 핑크빛만큼이나 진하게 남편의 사랑이 듬뿍 느껴졌고 평생 잊지 못 할 일이 되었다. 그 핑크빛 블라우스는 가지고 있던 흰색 스커트와 진한 보라색 바지하고 아주 잘 어울려서 출근할 때는 물론 아이들과 소풍 갈 때나 나들이할 때도 즐겨 입고 다녔다. 블라우스의 목선이 하얗게 바래지고 헤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입었다.

이 때문이었을까? 핑크빛 블라우스 색과 똑같은 색깔의 꽃이 피는 배롱나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여유가 되어 뜰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배롱나무를 심고 가꾸어 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이루어져 배롱나무 두 그루가 나의 작은 뜰에 심어져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퇴직하고 귀향한 이후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가끔씩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며 마음이 흔들리거나, 휘영청 보름달이 유난히 밝은 날, 벌레소리 쓸쓸하게 들리는 깊은 가을밤, 떨어지는 단풍에 허전함을 느끼게 하는 날 창문만 열면 볼 수 있는 푸른 잔디와 배롱나무는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7월이 되어 진한 핑크빛 배롱나무꽃이 피는 계절이 찾아오면 배롱나무 꽃잎 색과 같은 진한 핑크빛 블라우스가 담긴 쇼핑백을 말없이 내게 내밀던 남편의 젊은 날의 멋진 모습이 떠올라 더욱 행복해진다.

나의 뜰에서 꽃을 피우며 커 가고 있는 배롱나무는 나에게 사랑을 일깨워 주는 행복 비타민이며, 미소를 선물 해 주는 보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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