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산책-글·사진=정은주 광양문화연구회 회원

아미타불을 모신 백운사

백운사는 백운산 해발 900m 지점에 있다. 절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구불구불하다. 임도 포장이 되어 예전에 비해 편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백운사는 높은 곳에 있다. 흰 구름과 벗하려면 이 정도 높이는 감수해야 할까.

백운사는 하백운암으로 불렸는데,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인 화엄사의 말사이며, 현재 대웅전, 백운당, 연화당, 산신각, 요사채, 공양간, 무량수전, 보림당, 금선대 등이 들어서 전통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백운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백운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무량수전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은 인조 21(1643) 승려 조각가인 인균(仁均) 등에 의해 조성됐다. 중후한 얼굴에 가느다란 눈썹, 미소 띤 입매가 인상적이다. 아미타불은 세상의 모든 중생이 열반에 든 후에 마지막으로 열반에 들겠다고 서원을 세운 붓다이다. 그 발원을 담아 조성된 아미타여래는 인자하고 온후해 보인다.

불상 안에서 한지와 청색 비단에 쓴 발원문을 비롯해, 후령통, 오방경, 비단 등의 직물류, 주색 다라니, 8종의 묘법연화경 등의 유물이 발견됐다.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현 백운사 주지인 정산 스님이 국가 보물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산신각에 모셔진 탱화는 노송을 배경으로 백운산 산신령과 해학적인 호랑이, 동자가 표현돼 있으며 1882년 고종 19년에 제작됐다고 한다.

대대적인 불사로 절의 규모가 커졌지만 정산(正山, 백운사 주지)스님은 아직 미완성이라고 말씀하신다. “광양은 불심이 좀 약한 것 같아요.” 그동안 미완성인 불사를 마무리 짓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경과가 더딘 것에 대해 우회적인 표현인 것 같다.

절을 찾는 신도들과 시민들, 멀리서 찾아오는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포장이 끊긴 지점부터의 도로 확장과 포장이 시급하다. 해우소 앞의 주차장도 비좁은데다 난간 시설이 없어 역시 위험해 보인다.

사람들이 여유롭게 쉴 수 있고, 넉넉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대웅전과 무량수전을 잇는 마당이 생기면 절터가 한결 안정되고 광양을 대표하는 사찰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상백운암
상백운암

수행자들의 터, 상백운암

상백운암은 백운산 상봉 아래 1040m 고지대에 있다. 백운사에서 새로 임도가 뚫려 오르는 시간이 단축되기는 했으나 호젓한 산길을 걷는 묘미는 사라졌다. 다행히도 암자 아래 400m 지점부터는 옛길을 걸어 오를 수 있다. 너덜겅 길을 지나면 중백운암 터가 나온다. 커다란 돌탑과 누군가 마음을 보탰을 작은 돌탑들이 보인다.

상백운암은 화려한 건축물이나 유물, 유적이 있는 암자는 아니다. 그러나 상백운암은 천년 가까이 한국불교의 선맥(禪脈)을 이어온 대선사들이 수행했던 이름난 수행터이다.

역사적인 기록은 없으나 도선국사를 빼고 상백운암을 서술할 수는 없다. 광양의 진산인 백운산은 도선국사와 인연이 깊으며 도선이 주석했다는 옥룡사는 상백운암에서 한걸음에 건너뛸 수 있을 정도로 지척에 보인다. 도선국사가 상백운암 터를 본 후 가사장삼을 입고 7일을 춤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선동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현 백운사 산영각 뒤 절벽 아래에는 도선의 기도처로 알려진 암굴이 있으며, 아는 사람들은 요즘도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상백운암에 오르면 기운이 맑아지고 심신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최근 중창을 마친 상백운암은 인법당과 법당, 봉서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시야는 툭 터져 조계산, 모후산, 무등산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첩첩한 산마루가 끝 간 데 없이 둥글게 펼쳐 보인다.

상백운암에서 바라 본 옥룡면, 광양읍 전경
상백운암에서 바라 본 옥룡면, 광양읍 전경

인법당 쪽에서 보면 옥룡면과 광양읍, 광양만과 순천 신대지구, 고흥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암자는 천혜의 요새처럼 안온하다. ‘봉황의 둥지 터라는 항간의 비유가 실감 나게 다가옴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편찬)에 백계산(백운산의 옛이름)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백계산은 광양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의 진산이다. 산머리에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 샘이 있으며 샘 밑에서 구름이 때때로 일어난다. 무릇 비는 것이 있으면 문득 영험이 있고 재계하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샘이 마른다.

이 구절 속의 샘이 상백운암 뒤란의 석간수이다. 이 암자의 유일한 식수원인데, 물맛이 기막히게 좋다. 이 석간수로 차를 끓이면 차 맛 또한 일품이다. 암자에 먹을 것이 떨어지면 우물 청소를 하면 먹을 것이 생긴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석간수가 없으면 상백운암이라는 빼어난 수행터도 없을 것이다.

상백운암 바위 샘
상백운암 바위 샘

상백운암 터에 관한 재미있는 증언을 소개한다. 연담이라는 승려는 바위 기운이 거칠게 흘러넘치는 터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아주 부드러운 터라고 했다.

또 다른 수행 거사는 심한 태풍에도 별다른 영향이 없으며, 안개가 자욱하여도 답답한 느낌이 없다고 했다. 한겨울에도 삭풍이 없으며, 또한 아무리 추워도 햇볕만 들면 아래 백운사보다도 따뜻하다고 했다. 여름이면 깔따구 떼가 나타나기도 하나 돌담 아래로만 모여들 뿐, 담장을 넘어 암자 마당으로 올라오지 않는 것이 아주 신기하다고 했다. 바람이 골짝 아래로부터 불어 올라오는데 암자 아래에서 양방향으로 갈라져 암자 터를 감싸는 형세를 띈다고 한다. 맞바람이 치지 않으니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상백운암은 고지대에 위치함에도 바람이나 햇빛, 물 등이 사람이 거주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곳이다. 예전에는 교통이나 이동로가 더욱 열악했을 것이므로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아 수행터로는 최고의 명당이었음이 분명하다. 보조국사 지눌은 지리산 상무주암을 갑천하지제일도량(甲天下之第一道場)이라고 했다가, 상백운암 터를 보고는 천하를 둘러보아 최고 길지라는 의미에서 주천하지제일도량(周天下之第一道場)이라고 찬하였다고 한다.

최근 중창된 상백운암
최근 중창된 상백운암

상백운암의 중창주는 불일 보조국사 지눌이다. 원효와 함께 한국 불교사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선사이다.

지눌이 삼존불 형태인 상백운암 뒤편의 바위 절벽을 보고 삼존불감을 지어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하나는 상백운암에 안치했다고 한다. 현재 보조국사가 지녔던 원불은 송광사 박물관에 보존해오고 있는데, 국보로 지정돼 있다. 상백운암에 있던 삼존불감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리고 인조 때 영현이라는 스님이 조성해 재안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1992년 도난당한 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은 동국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지눌의 법통을 이은 진각국사 혜심도 상백운암에서 법의 인가를 받았으며, 관련된 시가 전하는데 한정된 지면상 소개할 수 없어 아쉽다.

상백운암에서 수행했던 분으로는 임란 때 팔도도총섭을 지낸 벽암각성 대선사. 회은장로 응준이 있다. 벽암과 응준은 당시 승려로서 최고 품계인 팔도도총섭과 승병대장을 역임했는데, 응준 이래로 광양지역의 승려들은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서 국가수호에 앞장섰다. 동동마을 바위산장 건너편에 회은장로를 기리는 가 서 있다.

또 상백운암에서 도를 깨우친 분 중에는 호암체정 선사, 무용수연 스님, 금오 대선사, 구산 선사, 활안 큰스님 등이 있다. 그리고 현대불교 수행자로는 월인, 송암, 혜국 스님 등이 있다.

상백운암의 도인으로 불리는 구산선사는 불타버린 상백운암을 복구하고 6년 가량 이 곳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상백운암은 구산스님에 관련된 일화가 특히 많이 전해져 온다. 전 송광사 주지인 현호 화상이 상백운암에 도인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백운산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낯설고 캄캄한 산중을 헤매는데, 구산스님이 갑자기 종을 쳐서 현호스님이 그 소리를 듣고 암자를 찾았다고 한다.

또 하나는 구산스님이 하루 한 끼 공양만을 했는데, 그때마다 당신이 먹을 밥에서 한두 숟가락씩 덜어내어 산짐승들에게 줬다고 한다. 어느 겨울 눈이 많이 내려 산길이 그만 끊겨 버리고 말았다. 산길이 계속 막히자 스님이 드실 양식도 떨어졌다. 백운산 아랫마을에 사는 할머니가 스님의 양식을 조금씩 머리에 이고 다녔는데, 눈에 덮여 길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산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서 상백운암까지 길을 안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당시 광양 경찰서장 부인을 비롯한 불자들의 꿈에 백운산 도인이 용맹정진하고 있는데, 먹을 것이 떨어져 곤란을 겪고 있으니 어서 가보라는 현몽이 있었다. 부랴부랴 상백운암을 오르는데, 구산스님은 바위굴에 앉아 깊은 삼매에 빠져 있었다. 하도 움직임이 없으니 새들이 스님의 어깨 부위를 콕콕 쪼아서 솜을 물어내고 있는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고도 한다.

구산스님은 조계총림의 초대 방장을 지냈고 1973년 우리나라 최초 국제 선원을 개원하는 등 불교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을 했다.

상백운암은 한국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하며 수많은 고승 대덕의 수행처로 그 법등(法燈)을 밝혀 왔다. 천년의 세월을 이어 상백운암에 왔다 간 선지식들이 그토록 추구한 라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정진하였을 수행자들의 에너지가 뭉쳐 있는 곳. 백운산 상백운암은 오늘도 칼칼하게 우주를 마주 보고 있다.

·사진 정은주 (광양문화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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