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 박사와 함께하는 광양의 봉수 유적 답사’
봉화산 정상부 협소해 봉수대 입지로 적당치 않아
봉수군 마을 찾고 ‘봉수군의 길’ 만드는 것 ‘과제’

현재 광양에는 조선시대 봉수 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산이 두 곳 있다. 사곡에 있는 구봉산과 초남의 봉화산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기록과 고지도엔 건대산 봉수만 남아 있고, 광양의 봉수 시설이 구봉산에서 봉화산으로 옮겨간 시기는 짐작도 못 하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봉화산 봉수대는 건대산(구봉화산) 봉수대를 잠시 대체했거나 임진왜란이나 조선후기 이양선출몰 시 일시적으로 사용한 봉수대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

봉수 박사와 함께하는 광양의 봉수 유적 답사가 지난 8일 구봉산 전망대 봉수대와 봉화산 일원에서 열렸다.

구봉산 봉수대와 봉화산 봉수 유적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조명하기 위한 이날 답사에는 (가칭)구봉산 봉수 동호인 20여명이 참가했다.

이날 참가자들은 먼저 구봉산 전망대에 모여 국내 3번째 봉수박사인 홍성우 ()경상문화재연구원 조사실장으로부터 봉수대의 설치와 운영, 관리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홍성우 실장은 구봉산에 있었던 건대산봉수대는 조선 전기 세종실록지리지(1454)부터 조선 말기 증보문헌비고(1908)까지 문헌에 기록을 남기고 있는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봉수대라며 현재 봉수터는 찾을 수 없고, 2013년 건립된 구봉산 메탈아트 봉화대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봉수대는 중심시설(거화시설)과 보조시설(생활시설)이 갖추어진 군사통신시설이었다. 중심시설로는 연대와 연조·방호벽이 있고. 보조시설로는 건물지와 창고·우물·채소밭 등이 있었다. 봉수대에는 연기와 불을 피우는 시설 외에도 다양한 시설물이 설치돼 있었다고 밝혔다.

더불어 봉수대 1곳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오장(伍長) 2명과 봉수군(烽燧軍) 10명 정도가 필요했다. 오장은 관리자이고, 봉수군은 상하번(上下番) 2교대로 5명씩 5~10일 정도 근무를 선 운영자였다. 이 외에도 봉수군 1명당 3명의 보인(保人)을 두어 봉수군의 생업을 돕도록 했다이처럼 봉수대 1곳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오장 2, 봉수군 10, 보인 30명으로 모두 42명의 군역자(軍役者)가 필요했다. 봉수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동원됐다고 설명했다.

홍 실장의 설명에 이어 참가자들은 구봉산 전망대를 둘러보며 이성웅 전 광양시장과 조춘규 전 국장으로부터 메탈아트 봉화대를 만들게 되는 과정을 듣고 오전 일정을 마무리했다.

사곡 본정마을 라벤다&윤앤필로 자리를 옮겨 점심 식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봉화산을 올랐다.

45도를 넘어 90도에 가까운 산길을 오르며 일행은 봉수대 운영을 위해 필요한 물품을 이고 지고 날랐을 선조들의 노고를 잠시나마 되새겼다.

급경사 길을 헤치고 마침내 도착한 봉화산 정상은 기대보다 장소가 협소하고 상시적으로 봉수대를 운영한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실망감을 안겼다.

홍성우 실장은 구봉산과 인접한 곳에 있는 봉화산의 산명(山名)으로 보아 봉화를 피운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봉화산을 답사해 본 소감으로는 조선시대 봉수체계에 편입해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의 봉수 시설로는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조선시대 연변봉수(沿邊烽燧)는 세종 29(1447)에 반포된 연변연대조축지식(沿邊烟臺造築之式)’을 근간으로 축조됐다. 즉 연변지역 봉수대에는 35m 높이의 연대(烟臺)를 쌓고 그 주위로 연조(烟竈)를 배치하며, 연대와 연조 인근지역에 봉수군 숙소를 두게 했으나 봉화산에서는 이러한 시설들을 찾을 수도 없었고,

시설들을 갖추려면 일정한 규모의 면적이 필요한데, 봉화산 정상부는 너무 협소해 조선시대 봉수대의 입지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답사 소감을 전했다.

홍 실장은 또한 봉수군들이 밤낮으로 근무를 서면서 숙식을 해결했기에 봉수대에는 많은 유물을 남기게 된다. 봉화산에서 봉수군이 남긴 유물을 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음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봉화산이라는 산명과 일부 인위적인 흔적으로 볼 때, 이 봉화산은 임시적으로 사용한 봉수대가 아닌가 한다. 건대산봉수대를 잠시 대체용으로 사용했다든지, 임진왜란이나 조선후기 이양선(異樣船) 출몰 시 일시적으로 사용한 봉수대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봉화산에서 내려와 답사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홍성우 실장은 건대산봉수대는 봉수군의 근무지였다. 봉수군의 본 생활지는 봉수대 아랫마을에 있었을 것이다. 경국대전봉수조에 보면 오장과 봉수군은 봉수대 근처에 사는 사람으로 뽑도록 했다. 근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조치였다. 아직 건대산봉수대에 근무했던 봉수군 마을을 찾지 못했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봉수군 마을에서 봉수대로 오르는 길은 봉수군의 길로 만들어 스토리테링화 한다면 역사적으로 활용 가치가 높은 봉수대가 될 것이라며 건대산봉수대를 관리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봉수군과 시설들이 필요했다. 현재 건대산봉수의 거화시설 일부만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봉수군의 생활시설은 구봉산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날 봉수 유적 답사를 추진한 이은철 광양지역연구회 마로희양대표는 광양의 봉수 유적에 대해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것은 바로잡고 몰랐던 것은 새롭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봉화산 봉수가 중요한 봉수 시설이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어서 많은 아쉬움이 있다. 특히 이미 구봉산 봉수 유적은 많이 훼손되어 버린 상황이어서 더더욱 아쉬움이 크다이런 실수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아야 된다는 교훈을 얻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이성웅 전 시장은 우리가 사는 과정에서 항상 즐거운 마음을 간다고 할 때 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이 무엇인가 많이 생각해보셨을 것이다. 오늘 구봉산과 봉화산을 답사하며 새로운 것을 알게 돼 즐거움을 하나 더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여기 지금 핸드폰이 있다. 이 핸드폰의 아주 윗대 할아버지가 바로 봉수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앞으로도 지역의 문화자산을 새롭게 발굴해 궁금했던 것을 알게 해주는 노력을 계속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한편 이번 구봉산 봉수답사 참가자들은 광양의 봉수에 대한 학술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오는 1223일 봉수 전문가를 초빙해 광양의 봉수에 관한 학술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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