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공동 주최…시민 참여 호응
방현석 작가 “권력은 유한, 역사는 엄중, 진실은 영원”

서동용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순천·광양·곡성·구례 을)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우원식 국회의원)가 지난 12일 소설 범도의 저자 방현석 작가를 초청해 북콘서트를 가졌다.

중마도서관에서 열린 이날 콘서트에는 민주당원과 시민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서동용 국회의원의 진행으로 시작된 콘서트는 작가가 직접 소설 범도가 만들어진 배경과 집필 과정, 그리고 책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설명해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범도'는 일제 강점 시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홍범도 장군과 그 주변 인물들을 그린 역사 소설이다.

범도는 방 작가가 13년 전 소설 쓰기를 결심했고, 지난 10년 동안 시간과 땀을 갈아 넣은 소설이다. 하루에 50매 이상 쓰지 않고는 외출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0여년의 정진 후 두꺼운 벽돌 책두 권 분량의 소설을 내놓은 것이다.

이 소설은 역사 소설이면서 동시에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소설이기도 하며, 또한 독립전쟁을 그린 전쟁소설이기도 하지만, 리더십 교본이기도 하다. 홍범도는 탁월한 리더였다. 그는 늘 싸움에 앞장섰다. 능력이 출중해 많은 성과를 냈지만, 그가 이룬 공은 모두 부하들에게 돌리는 리더였다. 그는 남의 핑계를 대지 않았다. 그는 늘 낮은 곳에 서 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 부근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칠 일 만에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 되던 해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셨다. 머슴살이 등을 전전하다가 15살이 되던 1883, 나이를 두 살 속이고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나팔수(코코수)로 입대했다.

10대 시절의 절반을 산에서 사냥하며 보냈던 그는 함께 다니던 신 포수에게 포수가 될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산 아래로 내려와 입대를 결정한 것이다. 심사에서 탈락해 무관으로 입대하지는 못했지만, 나팔수로 시작해 끝내는 총을 쓸 수 있게 됐다.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자신이 싸워야 할 상대가 일본군도 청군도 아닌 민란을 일으킨 백성임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탈영했다.

다른 이의 눈을 피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종이제작 공장 조지서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서도 폭력적인 사장을 응징하고 나왔고, 다시 들어간 금광 공장에서도 역시 무도한 공장주를 응징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외금강 신계사에서 지담을 상좌로 중이 되었지만, 비구니였던 이 씨를 만나 환속했다.

첫 번째 부인 이 씨의 처가가 있는 북청으로 향했으나 가던 길에 건달패들을 만나 부인과 이별했다. 이 씨가 죽은 줄 알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 강원도에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농사지어 번 돈으로 총을 마련하고 강원도 북부와 함경도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포수로 살아가면서 아울러 사격술과 검술도 익혔다.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동지들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한 뒤 곳곳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포수들을 모아 만든 홍범도 부대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 홍범도 부대는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는데, 백발백중 포수들로 이루어진 부대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1910년 우리 강토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짓밟히자 많지 않은 부하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그가 이끈 19206월 봉오동전투는 독립전쟁 운동 역사상 최초로 승리한 전투였다.

그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을 궤멸시켰다. 봉오동전투 장면은 영화 봉오동전투에 잘 묘사돼 있는데, 독립군 1개 분대 규모의 이화일 부대가 토벌대를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해 섬멸한다. 일본군은 전투 3시간여 만에 사망자 157명을 포함해 사상자 500여명을 남기고 패퇴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대승이었다. 후에 청산리대첩에도 홍범도는 제1연대장으로 김좌진 장군과 함께 참가했다. 그 후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됐으며,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소설 범도는 홍범도가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고, 이후에 돌아와 대한독립군을 창설해 봉오동에서 싸우고, 북로군정서(서일 총재, 김좌진 사령관), 서로군정서(지청천 장군) 등과 연합해 청산리에서 싸우는 순간까지를 그리고 있다.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장군’,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한 명장’, ‘백두산 호랑이등의 별칭으로 추앙받았던 홍범도 장군,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독립군은 무장해제 됐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지만,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 사는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때 두 번째 부인 이인복과 재혼했다. 홍범도의 소련 입국신고서에 '직업 : 의병‘, '목적과 희망 : 고려독립이라고 썼다. 홍범도 장군은 연해주에서 농사를 짓던 192759세에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함께 강제 이주 된 동포들의 대표 역할을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된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는 조국 광복을 이 년 앞둔 19431025, 7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의 공을 기리기 위해 박정희 정권 때인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1994년 김영삼 정부부터 추진해온 카자흐스탄에서 유해 봉환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에 비로소 성사됐다. 8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 묘역에 안장됐다.

방현석 작가는 소설 범도를 소개하며 홍범도를 위대한 장군으로 그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홍범도를 통해 한 시대의 가치가 어떻게 새롭게 출현하고, 그 가치가 어떻게 낡은 가치를 돌파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지를 알고 싶었다역사가 지워버리고 문학이 외면한 그들의 삶과 사랑, 투쟁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1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고 소회했다.

이어 홍범도의 부대원으로 함께 싸운 10, ‘범도는 내가 등장인물들과 함께 함께 매일 웃고 웃으며 총을 들고 싸운 기록이다. 신포수와 백무아, 차이경, 김수현, 진포, 김알렉산드라.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야 할 길을 선택하고, 함께 행동했다. 소설가란 직업에 부여된 고단한 의무이자 매력이고, 소설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나는 어떠한 인물도 마네킹처럼 세워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 모두를 심장이 뜨거운 인간으로 되살리고 싶었다. 그것이 13년 작가의 원칙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나는 안다. 그 무엇으로도 뼈가 시리게 고독했지만 단 한 번도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었던 그의 삶을 모욕할 수 없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를 그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그에게 승리는 짧았고 패배는 길었다. 그에게 승리는 언제나 승리하는 그 날, 단 하루였고 남은 모든 날이 패배였다. 그는 싸워서 이긴 그 하루의 삶으로 남은 모든 날의 패배에 맞서야 했다. 그것이 단독자로 살았던 그의 운명이었고 어떤 모욕과 패배에도 무너지지 않은 그의 힘이었다정의했다.

방 작가는 권력은 유한하지만 역사는 엄중하고 진실은 영원하다. 권력으로 흉상을 파낼 수 있겠지만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있는 홍범도를 파낼 수는 없다고 현 상황에 대해 비판하고 대한민국이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 왔다. 우리나라가 더 튼튼해지기 위해서는 어렵더라도 더 젊은 세대하고 얘기하려는 노력들을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인 방현석 작가는 1961년 울산 출생으로 작품으로는 소설집 내일을 여는 집’, ‘세월’, ‘사파에서’, 장편소설 하노이에 별이 뜨다등을 썼다. 작품활동으로 신동엽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