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산책

다섯 개 자연부락이 모인 답곡마을

답곡은 광양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요, 계곡의 물소리와 우거진 숲이 오감을 감동케 하는 마을이다. 고로쇠가 나오는 초봄부터 여름 끝물까지 닭 숯불구이 명소로도 소문난 명소이다. 필자도 여름철이면 가족과 답곡마을 계곡을 찾아가 물놀이도 하고 맛있는 요리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곤 한다. 답곡마을은 논실, 진틀, 병암, 심원, 묵방(먹방) 등 다섯 개 자연부락을 합하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다. 그런 만큼 골짜기 깊숙이까지 마을이 이어져 요새를 방불케 한다.

답곡마을은 1775년경 전주 이 씨, 또는 현풍 곽 씨와 김해 김 씨가 처음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광양군지에 의하면 곽 씨와 허 씨가 제일 먼저 입촌하여 살았다고 전한다. 답곡이라는 마을 이름은 논 답()’과 골 ()’이라는 한자로 이루어졌다. 논이 많은 계곡이라고 하여 이러한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답곡마을 허항 이장은 답곡에 논이 있을 만한 지형이 없어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농기구나 지게를 만들어서 내다 팔아서 먹고살았어요. 동목(장작나무)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어머니는 똘감(떫은 감)을 물에 우려다가 곡식과 바꿔 먹기도 했고요. 논농사 지을 만한 곳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내가 어렸을 때 여름철이면 다래랑 감자를 읍장에 갖고 나가서 쌀, 보리 등 곡식으로 바꿔다 먹었어요. 겨울에는 고구마랑 수제비가 주식이었고. 지금은 그 때에 비하면 호강이제, 호강! 긍께 논이 많지 않았고 지명의 뜻이 좀 그렇다는 거제.”

답곡은 131가구에 218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원주민과 귀촌민의 수는 절반씩이라고 한다. 귀촌민은 대부분 여름철 장사 때만 머물며 비수기 때는 주말로만 머무르는 실정이라 사실상 원주민이 마을을 지키는 셈이다. 이 마을은 이장 한 명, 반장 네 명, 부녀회장 한 명, 청년회장 한 명이 마을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마을 규모에 비하여 살림꾼이 작은 편이다. 요즈음은 원주민들도 민박집과 각종 음식점을 운영하여 가계를 꾸려나간다. 주 소득원은 고로쇠, 음식점, 밭농사, 벌꿀 채취, 축산업, 도토리묵, 버섯채취 등이다.

답곡마을 입구에 자리한 용쏘

초가을 정취가 느껴지는 옥룡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용쏘가 나타난다. 옥룡에서 가장 깊고 큰 규모의 쏘로 명주실타래 한 실구리가 다 풀릴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그 실에 귀를 대고 들으면 하고 소리가 났다니 실제로 굴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용쏘에서 불을 때면 봉강 계룡 앞 굴바위로 연기가 나올 정도였다니 그 깊이를 짐작할 만하다. 옥룡 쪽의 굴은 김옥현 전 광양시장 재임 때 위험하다고 메워버렸다고 한다. 그대로 두었으면 관광명소로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며 지역 원로들이 안타까워했다.

지금도 봉강계곡의 굴바위 뒷산에 가면 용쏘를 향하여 수직으로 뚫린 굴이 있다고 한다. 한편, 용쏘는 백운암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데 옥룡사지 샘터로 흐른다고 한다. 이는 용쏘에서 절구공이를 빠뜨렸는데 옥룡사 샘터에서 찾았다는 설()이 뒷받침 되고 있다. 이 설은 도선국사 절을 확장할 때 절터 앞 쏘에 살던 아홉 마리 용을 죽일 수 없어 용쏘에서 살게 했다는 전설과 연관이 있다. 이밖에도 답곡마을에 전설을 간직한 따리봉, 바구리봉, 신선바위, 몰궁거리(심원), 장군바위(묵방), 다래비소(묵방), 생애바위, 널바위 등이 있다.

선비들이 묵을 만들었던 묵방(墨榜)

용쏘에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바로 건너에 묵방마을이 보인다. 밀양 박 씨가 처음 정착하여 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온다. 옥룡계곡을 끼고 형성된 모든 마을이 그렇지만 유독 산세가 수려하고 맑은 곳이다. 광양시지· 마을유래지· 광양군지등에서는 묵방마을을 한낮에도 먹칠을 한 것처럼 컴컴하다고 하여 묵방이라는 마을 명을 붙인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옥룡골 어르신들은 예전에 묵을 만든 곳이라서 묵방, 먹방, 먹뱅이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묵방마을에서 가장 연로하신 박봉규(91) 어르신을 만났다. 본래 살았던 집은 아래채처럼 한쪽에 묵혀두고 새로 지은 양옥집에 혼자 살고 있었다. “묵방은 먹뱅이라고 불렀어. 그 이유는 먹을 맹글던 곳이라고 그리 불러. 이 뒤에 진사매골이라고 있는데 진사되신 분이 우리 외가 어른이었어. 요즘 같으면 고시 같은 거에 합격했다제? 그 분 묘는 다른 곳으로 모셔갔지만 그 터가 있는 곳을 진사매골이라고 불렀던 거지. 먹방이랑 진사매골이 연관 있어 보이지 않은가? 이곳은 보다시피 풍경도 좋고 공기도 좋아서 다 건강해. 모두 건강한데 우리 마누라만 십년 전부터 치매 걸려서 요양원 갔어. 지금까지 이 동네에서 치매 걸린 이는 우리 마누라 뿐이여.”라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묵방마을은 원주민과 귀촌주민 수가 절반씩 차지한다. 주민들은 거의 소통 없이 살고 있는 실정이다. 아름다운 풍광처럼 서로 소통하며 맑고 고운 마을분위기를 가꾸어가길 바라면서 마을을 나왔다. 묵방을 나오는 길목에는 이름 모를 가을야생초들이 즐비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원님이 쉬어가던 심원(深院)

심원마을은 이조중엽 원님이 구례를 오갈 때 쉬어가는 집()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심원이라는 마을 이름을 생각하며 걸었다. ‘골짜기가 깊은 곳이라는 뜻일까?’라는. 마을 입구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어 가을 내음이 물씬 느껴졌다.

심원마을에서 여덟 번의 통화 끝에 답곡마을 허항 이장님을 겨우 만났다. 만나자마자 대뜸 우리 마을은 인심도 좋고 경치도 좋아서 살기 좋은 곳이에요. 집집마다 대문이 없는 마을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동네 밖에 없을 거요. 보세요. 한 집도 대문이 없잖아요?” 필자가 참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왔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마을자랑을 하는 바람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필자에게 낮으로는 만날 수가 없어요. 다들 바빠요. 미리 연락하고 오셔야 해요. ! 저기 한 분 나오시네.”

정용순(73) 할머니가 맞은 편 골목길을 나서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마을 형편이랑 분위기를 물었다. “6.25때 연천에서 아버지가 총살당하여 돌아가셨어. 엄마는 재가(再嫁)하고 작은나는 아버지 집에서 컸지. 스무 살에 옥곡 가마 타고 석실재를 넘어 시집왔어. 처음 시집을 와서는 동목(장작나무)을 이고 다님서 동곡마을 이재선 씨에게 갔다 팔았어. 섬사람들 김 열리라고 바다에 꽂는 산죽()도 베다가 팔고. 최근 들어 고로쇠 채취 방법이 발달되어 민박집도 하고 먹고 살만 해졌어. 그렇게 고생해서 키운 아들 둘이 다 공무원 됐어. 큰 아들이 광양시청에 근무해.” 할머니는 옛이야기에 자식자랑까지 이야기보따리를 연이어 풀어놓았다.

심원마을은 집집마다 1인 가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허항 이장님과 친척인 허광영 씨 가정만 식구가 둘이란다. 그 외의 원주민 세대 모두 홀로 된 할머니만 살고 있다. 그래서 전기 고쳐주기, TV 잘 나오게 하기, 무거운 짐 옮겨주기, 친인척들 전화 연결해주기 등 거의 이장님의 몫이라고 한다. 이제 이장님도 나이 들어 무릎도 안 좋고 힘들어진다고 하니 걱정이다. 한국의 농어촌 현실을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구렁논이 있어서 진틀?

진틀은 예전에 마을 앞 논들이 질척거리는 진들(구렁논)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어로는 이평(泥坪)이라 불린다. 이 마을에는 백운산 등산로 시작점이 있다. 마을사진을 보면 마을 풍광에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큰 언덕을 중심으로 하여 위로는 원주민 다섯 가구가 있고, 아래로는 한옥이 조성되어 있다. 원주민들은 이른 봄에 닭 숯불고기를 곁들인 고로쇠 판매와 민박으로 돈벌이를 한다. 필자도 일가친지들과 여러 번 진틀마을에 갔었다. 백운산 등산을 마치고 먹는 고로쇠와 닭 숯불구이는 그야말로 진미(眞味)이다.

진틀 마을에 사는 백애심(85) 할머니는 “18살에 시집와서 첫날 밤 자고 일어나 하늘을 본께 너무 쪼그만 허더랑께. 그때도 다섯 집 살고 있었는디 지금도 다섯 집이여. 땅 파서 밭 일구다 손이 다 불어터지고 야단났제. 논이 있었다는디 시집 와서 본께 그냥 깔끄막(야산)이었어. 논이 어딨어. 눈이 허옇게 온 뒤에 고로쇠 받으러 가는데 따라 가다 보면 호랑이 발자국 같은 것도 있었어. 지금 생각허믄 백운산에 호랑이도 살았는가 싶어. 아이고! 그때 비허믄 요즘은 임금님이제. 그래도 살만 헌께 살았긋제. 허허허.” 할머니는 그래도 살만했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85세라고 하기엔 너무 고우신 백애심 할머니!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한옥에 사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혼자서 이리저리 생각해보았다. ‘한복을 입고 살까? 건강식만 먹고 살까?’ 한옥에 사는 사진작가 한 분을 취재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만나지 못했다. 결국 원주민 다섯 가구와 대비되는 기와지붕들만 바라보다 내려왔다.

병풍바위가 있는 병암(屛巖)

태어나서 지금까지 병암마을에 살고 있는 병암산장박종열(83) 어르신을 만났다. 짝꿍 공병순(78) 할머니와 싹싹한 며느리 윤승희(54) 씨가 함께 자리해줬다. “병암은 마을 뒤에 있는 병풍바위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여. ‘병풍 병()’바위 암()’ ()를 써. 나는 겨우 여덟 살 되던 해에 어매가 세상을 떠났어. 빨갱이들 때문에 동곡, 항월, 죽림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굶어 죽은 거나 매 한가지지. 군인들이 빨갱이들 숨겨준다고 집에 불을 질러버리니까 아래 마을로 내려가서 살다가 그만. 지금도 그때 불에 탄 돌들이 남아 있어. 그 시절엔 답곡마을 전체가 다 그렇게 쫓겨 다니며 살았어.” 정말 기가 막힐 일이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어르신은 마을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필자가 묻지 않아도 다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병암마을이 답곡에서 제일 먼저 생겼어. 그 뒤에 진틀이 생겼지.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집 뒤에 살던 차 씨 할머니가 호랑이에게 물려가다가 죽은 일도 있었다고 해. 옛날엔 백운산에 호랑이도 있었는가벼. 병암사람들은 보리, , 담배 등 주로 밭농사를 지어 동곡이나 읍장에 내다 팔아서 먹고 살았어. 지금은 고로쇠, 약초, 민박 등이 주민 소득원이 됐지. 저기 백운산 정상에 신선대는 농처럼 생겨서 농바위라고 해. 실제로 신선바위는 그 능선을 쭉 타고 오면 있어. 백운산 정상 이름은 여승이 소나무겨우살이로 만들어 쓴 모자 닮았다고 해서 송낙봉(松蘿峰)이라 하고.”

어르신 곁에 앉아 있던 짝꿍(공병순 할머니)이 거들었다. “시집오고 나서 서방 군대 가불고 억센 할머니랑 살았제. 본래 다섯 집 살았는디 그래도 그 사람들 의지험서 살았어. 서방이 없응께 친정아부지가 가을 되믄 와서 지붕 이어주고 그럼서 살았제. 본래 살던 사람은 우리집 뿐여. 말도 마. 옛날에 다섯 집이 장에 갈라믄 맨 먼저 일난 사람이 집집마다 호롱 들고 다님서 어이! 장에 가세. 언능 일어나. 글면서 깨바서(깨워서) 동무해서 다녔어. 동곡까지 호롱 들고 가야 버스를 탈 수 있었제. 지금은 우리 동네까지 버스가 들어와부러. 참 좋아졌어.” 종일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병암산장 바로 아래에는 귀촌 가구가 있다. 주인은 보이지 않고 민박하는 손님들만 마당에 나와 있었다. 송낙봉에 관한 이야기는 지역 어르신들과 이장님도 같은 맥락으로 알고 계속 추적 중이라고 했다.

옥룡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논실

논실(溣室)은 옥룡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광양의 최북단에 위치하는 자연마을이다. 광양 12(사라실, 대실, 제실, 지실, 닭실, 밤실, 쥐실, 눈실, 논실, 조실, 옥실, 우모실)에 속하는 논실은 마을 뒤 백운산 따리봉 아래에 있다. 지역 원로 선생님들은 논실의 한자를 배 끌 론()’집 실()’을 합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했다. 지형으로 보았을 때 따리봉이 배의 키 형국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광양시지4430페이지에서는 이 마을에는 논이 많은 계곡이라 하여 답곡(畓谷)이라 이름 하였는데 논실이라고도 부른다.”라고 기록되었다. 논 답()’, ‘집 실()’의 한자 의미를 따서 논실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역시 언젠가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논실마을 취재를 위해 박채규(개현마을), 허항(답곡마을) 두 이장님을 만났다. 마을 뒤안길로 필자를 안내했다. ‘연병지라고 쓰인 바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6.25 때 백운산으로 숨어든 인민군들이 교육, 간호, 병사훈련 등을 했던 곳임을 표시한 바위 같아. 글씨를 조사해보니까 그 시절에 쓴 게 맞대. 주민들에게 양식이나 생필품 등을 여기까지만 지고 오게 하고 돌아가라고 했대. 아마 자기들 은둔지역을 들킬까봐 그랬겠지. 이곳은 옥룡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픔이 서린 역사 현장이야.”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옥룡면에 대하여는 좀 더 시간을 갖고 고증할 필요가 있다고.

마을회관.” 시방 이만 허믄 살만 허지 뭐. 지금은 민박이랑 고로쇠가 돈 벌어 주제. 도 뜯어다 묵음서 컸제)나물(도 주워다 묵고 나무새)떫은 감(어려서는 똘감). 없어(아직까지 별나 아픈 데는 엄써. 암꺼나 다 잘 묵어. “할머니의 건강법을 물었다. 젊은 사람도 걸어 다니기에 먼 거리이지만 마다않고. 할머니는 지금도 건강하여 심원마을에 있는 마을회관까지 걸어서 다닌다. 할머니 집이 있다) (94논실마을에는 답곡에서 가장 연로하신 박상금. 또다시 답곡마을을 찾아가 이장님의 안내로 마을회관에 갔다, 다음 날 오후

백애심(85), 황선임(76), 배동엽(85), 서남순(80), 박상금(94)아래) 백도순(85), 박경심(85), 이설자(85), 정용순(85), 공병순(85) 할머니
백애심(85), 황선임(76), 배동엽(85), 서남순(80), 박상금(94)아래) 백도순(85), 박경심(85), 이설자(85), 정용순(85), 공병순(85) 할머니

종례(87) 회장님은 우리 마을 사람들은 단합심도 좋아. 다섯 개 마을에 회관 하나를 운영해서 더 그러제. 무슨 일이든 모이자! 하면 다 모여불제. 지금은 살기가 좋아져서 다들 운동도 하고 면사무소까지 차타고 가서 재미있는 것도 듣고 그래. 우리는 역사 공부도 해. 뻔히 아는 이야기들이지만 교수들이 이야기 해주니까 재미지더라고. 답곡은 참 한도 많은 곳이여. 우리가 한국전쟁 후유증을 고스란히 겪은 증인이니까.

답곡은 자연마을 다섯 곳이 모여 한 고을을 이룬 만큼 연재거리도 무궁무진하다. 백운산과 답곡의 못 다한 이야기들은 옥룡이 나르샤종편 때 엮기로 한다. 끝으로 연재에 도움을 주신 박기오 선생님, 개현마을 박채규 이장님, 답곡마을 허항 이장님 등 세 분께 감사드린다.

광양문화연구회 회장 백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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