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

()은 원주이씨 시조공 신우(申佑)19세손으로, 부는 연복(延福), 모는 인천채씨 사이에서 1579년에 강진군 성전면 금당리에서 태어났다. 휘는 준(), 자는 형지(泂之),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조부 이남(李楠)은 조선 중기 광양현감(광양군지(1983)에 역대 현감 11번째로 기재됨)을 지냈다. 이후 무장현감을 끝으로 퇴임하고 금당리에서 노후를 보낸다. 이남의 셋째 아들은 이억복(李億福)으로, 역시 조선 선조 때 광양현감(1583-1584)을 지냈는데, 그가 이준의 백부이다. 이억복은 여진족의 난리를 다스릴 때 남다른 재주를 가진 인재로 천거되어 경원부사가 되었다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특진 되었다.

광양현감을 지낸 조부 이남은 슬하에 8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5번째 아들이 연복으로, 그는 강진군 성전면 금당마을에서 살았다. 이준은 1580년 두 살 때 부친(연복)이 돌아가시자 모친과 함께 7, 8살쯤 할아버지(광양현감 이남(李楠))와 백부(광양현감 이억복(李億福))가 현감으로 계셨던 광양에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무과 급제 후 벼슬길에 나섰으나,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 사건이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고향(진월)으로 돌아 와 약 10여년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광양 진월 구포(鳩浦, 신기마을과 추동마을 사이)에 살았다. 그러다가 인조반정 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간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다시 진월로 돌아와 생을 마감하였으며, 묘는 진월에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소학을 읽고 생원시(1600)에 입격한 후, 선조39(1606)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이듬해에 북병영 첨정으로 근무하다가 부호군으로 승진되었으나 광해4(1612)에 병을 핑계로 고향 구포(광양 진월)로 와서 11년을 생활한다. 그러다가 인조 조정이 들어서면서 1624년 봄에 벽동군수에 제수된다. 이후 운산군수로 자리를 옮긴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난 해 겨울, 양남의 군적 사무로 왕명을 받들고 칠곡ㆍ진주를 거쳐 고향 광양에 도착하여 이때 지은 시가 향사당(鄕社堂)인데, 이시는 귀래정유고(歸來亭遺稿,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수록되어 있다.

고향 떠나 천릿길의 객이/ 십년이 되어 지금 비로소 돌아오네/ 산과 강은 옛날 모습으로 오늘도 변함이 없는데/ 사람의 일은 이전의 시간과 다르네.

백발의 내 동년배들은/ 장부들로 지난해 아이였는데/ 서로 만나 서로 알지 못하고/ 이가 누구인가 도리어 물어보네. (千里離鄕客/ 十年今始歸/ 山河依舊日/ 人事異前時// 白髮吾儕輩/ 丈夫去歲兒/ 相逢不相識/ 却間是阿誰)

이 시는 십여 년 동안 벼슬길을 떠돌다가 고향에 들러보니, 산천은 옛날 그대로인데 친구들은 백발이 되어 서로 누구인지 모른다. 자연과 인간을 대조하여 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잘 묘사하고 있다.

1629년에 함안군수 교지를 받으며, 이어서 아버지(연복)에게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증직 교지와 같은 날 어머니(인천채씨)도 정부인 교지를 받는다. 얼마 후 1631(53)에 평안도 선천부사로 제수되어 검산산성을 축성하였으며, 그해 섣달 그믐날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가 희양문헌집1산성제야(山城除夜)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관서 지방에서 나그네 된 지 몇 해 되었던고?/ 추운 밤 여관에 수심 견디기 어렵네/ 천리 고향의 소식은 끊어지고/ 자정이 지난 이 밤에 눈물만 흐르네.

벼슬길에 나온 그때 이미 잘못했고/ 창을 베개로 하고 있는 오늘을 누구에게 원망하리/ 뒷날 다행히 전원의 즐거움을 얻는다면/ 뜬 세상의 허영을 어찌 구하리.(爲客西關問幾秋/ 寒燈旅館不勝愁/ 故鄕千里音書斷/ 此夜三更淚自流// 投筆當年身己誤/ 枕戈今日向誰尢/ 他年倘得田園樂/ 浮世虛名孰肯求)”는 본인이 쌓은 검산산성(劍山山城)에서 나이도 원로한 몸으로 조국 수호를 위해 침과(枕戈, 나라를 위해 내일 공격할 준비로 창을 베고 잔다.)를 하면서 자정을 넘긴 시간에 망운지정으로 변방의 차가운 등불을 보며 한 해를 보내는 그믐날 밤의 비애와 착잡한 심정을 그리는 글이다.

1635(57)년 인조의 왕명을 받아 춘신사로 제수되어 중국 심양에 간다. 이때 세폐(歲幣) 문제를 논쟁하여 시정하고 돌아온 과정을 기록한 것이 심행일기(2020), 신해진 역주일기이다. 113()을 보면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사정 신() 이준(李浚)은 대단히 황송하와 머리 조아리고 삼가 백 번 절하며 주상전하께 글월을 올리나이다. 삼가 아룁옵건대, ()은 타고난 바탕이 본래 우둔하고 전대(專對,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를 감당하기에 재주가 부족한데도 뜻밖에 어명을 받고 사신으로 이역에 가게 되어 밤낮으로 황공하였사옵니다.

오로지 일을 그르쳐서 나라에 욕을 미칠까 걱정하였지만, 지금에 이르러 송구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折衝將軍 行龍驤衛 副司正臣李浚, 誠惶誠恐, 頓首謹百拜, 上言于主上殿下。伏以, 臣本質魯純, 才乏專對, 意外承命, 奉使異域, 晝夜競惶。惟以僨事, 辱國爲憂, 到今隕越, 無地措躬...)왕명을 받아 춘신사로 가게 된 소회가 잘 드러난다. 오로지 임금에 대한 성은과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 돋보인다.

그해 겨울, 의주부윤을 거쳐 1637년 안주목사, 1638년 영변부사, 1641년 철산부사를 지냈다. 그리고 1642년 춘천부사를 마지막으로 고향(진월)으로 돌아와 계시다가, 164512월에 향년 67세로 생을 마감했다. 해남 영산사에 배향되어 있다.

()에 대한 사적(史蹟) 국가 기록에 의하면 인조실록31, 인조13(1635) 415일춘신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복명한 내용을 비롯하여 총 4건의 기록이 있다.승정원일기의 기록은 맨 처음 “50세 때인 1628(인조6) 315, 철산부사(鐵山府使)로 삼다.”라는 기록을 시작으로 총 37건의 기록이 자세하게 전한다.

그리고 경인문화사에서 20102월 김동수가 번역한 호남절의록198, 199() 기록을 보면 첫머리에 자는 형지, 본관은 원주, 부사 영화의 현손이고, 증참판 연복의 아들이다. 성격이 강직했으며 절개가 있었고 지략이 뛰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병을 이끌고 본읍(강진)의 성산에 진을 쳤다. 왜적을 막아 죽인 적이 매우 많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 같은 책 192()에 숙부 이억복(李億福, 광양현감)도 선무원종공신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숙질간(叔姪間)에 임진왜란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된 것을 보면 당시 광양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절의를 지킨 호국무사 집안으로 평가된다. 한편, 중종23(1528)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의 조부와 백부가 함께 부자지간에 광양수령을 지낸 것 또한 광양에서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광양 향토사지 1798광양읍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이 의주부윤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개하여 충의로운 행적이 많았다. 입조(관직에 나간) 뒤의 사적은 송자대전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강진 선비들의 사모함이 끊이질 않아 월남서원을 세워 배향하고 제사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사액 받지 못했다.(登武科 官至義州府尹 性慷慨多忠義 立朝事跡詳在宋子大全 康津多士 思慕不絶 建月南書院配祀之已久 猶未賜額)”라고 전한다. 이어서 발간된 호남읍지(광양편)1(1871)2(1899)에도 똑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귀래정이 있던 자리
귀래정이 있던 자리

1925년에 발행했던 광양군지20142월에 번역 출간한 책자 89() 충신편에 보면 병자년, 의주부윤으로 임명되었을 때 청나라가 멋대로 황제를 칭하며 사신을 파견하여 협박하자 공은 하늘에는 태양이 둘이 아니며, 백성들에게는 임금이 둘이 없다.’ 등의 말을 하면서 의()를 앞세워 물리쳤다. 또한 이러한 일을 계기로 청나라와 화친을 맺는 것에 반대하는 장계와, 포로와 사신을 참수하기를 청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1926(대정15) 전라남도지광양편에는 원주인으로, 증참판 연복의 아들이다. 지략이 아주 뛰어났으며,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때 왜적의 침입에 창의하여 죽인 적의 무리가 많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인조 병자년에 의주부윤에 제수되었다. 청나라가 연호를 바꾸려고 사신을 보내 협박하니 공이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라고 하며 의리를 들어 이를 물리치고(原州人 贈參判延福子 智略絶倫 登武科 宣廟役倡義 斬獲甚衆錄原從勳 仁祖丙子除義州府尹 淸欲僣號 遣使來協 公以 天無二日 民無二主擧義却之…) , 앞에서 언급한 1038(소화13) 9월에 광양향교에서 발간한 희양문헌집4권 중 제1권에 보면 서()문에 이어 문간공 김황원, 신재 최산두, 세 번째로 이준의 7언절구인 산성제야(山城除夜)한시가 수록되어 전한다.

198112월에 발간한 내 고장 전통 가꾸기(안홍식 군수)28() 기록을 보면 본관은 원주, 자는 형지, 증참판 연복의 아들이다. 선조 초에 무과에 급제, 선조 26년 왜병이 이곳에 진격하자 마로산성에서 결진하여 적의 대병을 격파하여 의주부사를 제수하였으나 거절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1983광양군지913()의 충신편에 의하면 원주인, 증참판 이연복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강진에서 싸움. 선무원종공신에 기록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어 2005년 발간된 광양시지1권 시부(詩賦)824()희양문헌집에 기록된 산성제야(山城除夜)제귀래정(題歸來亭)두 작품이 전한다. 제귀래정(題歸來亭)시를 보면 집 위는 청산이며 집 밑은 물인데/ 작은 정자 적막하여 귀래정이라 이름하였네/ 바위 언저리 푸른빛은 많은 대[()]/ 창밖의 맑은 향()은 한 그루 매화이네.

물결 없는 맑은 못에 고기 놀고/ 긴 솔[()] 구렁에 학()이 머뭇거리네/ 이십 년 강호(江湖)의 즐거움이 저버렸으니/ 갈매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에 부끄러워하네.(屋上靑山屋下水/ 小亭寂寞號歸來/ 巖邊翠色千竿竹/ 窓外淸香一樹梅// 波靜澄潭魚戱泳/ 松長洞壑鶴徘徊/ 卄年虛負江湖樂/ 自愧沙鷗待我回)”이시는 그가 공직을 마치고 소일하면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진월면 신기마을 귀래정(진월면 신구리 83-9번지 일대)의 섬진강 하구의 아름다운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호현 교감의 답사 건의에 따라 귀래정을 찾아 나섰다. 귀래정의 흔적은 간 곳이 없고 오래된 마을 보호수도 고사(枯死)되어 있었다. 현지답사 결과에 의하면 사평과 오사마을 앞 들판은 섬진강 제방을 막기 전까지는 구동마을 앞까지 강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곳에 배들머리지명이 있듯이, 뒤에는 산이며 앞으로는 강이라 위 시의 배경과 일치된 곳이기도 하다. 그는 일찍 소학을 공부하여 생원시에 합격하였듯이 무신인데도 불구하고, ()에 있어서도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총 45편의 시가 전하여 온다고 한다.

위와 같이 이준이 의주부윤까지 지낸 명신 집안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지역에서는 이제껏 잘 모르고 지내왔다. 최근에 안준태 전부산시장과 이성웅 전광양시장의 소개로 이준의 후손을 소개받았다. 부산 모 여고에 재직 중인 이호현 교감을 알게 되어 그로부터 심행일기(2020, 신해진 역주라는 책자를 받아 봄으로써 이준 부윤의 행적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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