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진목마을과 안창범

이 마을은 약 370년 전 밀양박씨(密陽朴氏, 노정공 박봉우)가 처음 입촌해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하는데 옛날 이 부근 마을에서 임진왜란의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 시기보다 앞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광양시지, 4, 797~800)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뒷산이 새우등[징게미]처럼 굽어 있는 형국이다. 마을에 청룡(왼쪽)으로 청룡등을 갖추고 있다. 마을 입구의 도로가 청룡등 밑으로 나 있는데 옛날에는 청룡등 밑에 청룡이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산등에 옛날 자연생 참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참나무쟁이, 참나무징이라 불러오다 이를 한문식으로 쓰면서 처음에는 직목(直木)으로 했는데 진목(眞木)으로 변화되었고, 그 이후 이곳에 정자(亭子)가 있어 진목정(眞木亭)으로 되었다가 현재는 공식 명칭으로 진정리 진목(眞木)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주민들은 진목쟁이’, ‘새몰이라고도 부른다. 진목 북쪽에 있는 바위더미를 야수드미라 하는데, 야수(여우)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 야사등(野蛇嶝)이라고 표기한다. 홍천골 남쪽에 있는 들은 운강들이라 한다. 이곳을 개간한 안봉호(安奉鎬, 1898~1985)의 호인 운강(雲岡)을 따서 이름 지었다. 새들이라고도 한다. 순흥안씨들이 광양의 만석꾼으로 이름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 마을은 고종 12(1875) 문과에 등과해 사간원(司諫院) 경연과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을 역임한 안창범(安昌範)이 태어난 곳이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조선조 문과에 등재된 자 중 광양에 거주지로 분류된 자가 4명인데, 그중의 한 명이 이분이다.

안창범의 ‘통훈대부행성균관전적’ 교지(1883)
안창범의 ‘통훈대부행성균관전적’ 교지(1883)

진목마을의 순흥안씨

다음으로 진목마을의 순흥안씨에 대해 알아보자. 앞에서 인용한 안영이 쓴 , 아름다워라! 내고향 진월(津月)에 순흥안씨와 진목마을, 또 고택 운강장(雲岡莊)에 대해 잘 소개하고 있다.

순흥안씨 참찬공파(參贊公派)는 시조 안자미(安子美)로부터 22세인 안복헌(安復憲)이 김해시 장유면에서 두 아들, 윤성(潤成)과 국정(國貞)을 데리고 1660년경 조선 현종 초기에 최초로 광양 땅을 밟아 진월면 진목에 터를 잡았다.

그 뒤, 다른 형제들, 특히 재종형제 복흥(復興), 복화(複和), 복명(復明) 등이 옥곡, 진상, 진월 등으로 이주해 오고, 1800년도 초까지도 이주가 계속되어 점점 가솔이 늘면서 광양, 하동, 횡천 등지로 벋어나갔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옥곡, 진상, 진월에 기거하는 순흥안씨만도 200호에 이르렀다.

진월면 진목길 69-3에는 오랜 세월 이 마을과 함께해 온 순흥안씨 고택이 있다. 처음 진목에 터를 잡은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근동에서는 가장 터가 넓고 오래된 고택이다.

운강장
운강장

이 고택은 22세인 안복명의 후손 중 23세 취성(就成), 24세 국신(國信), 25세 영규(營奎), 26세 창범(昌範), 27세 윤석(潤錫), 28세 경선(坰璿), 29세 봉호(奉鎬), 30세 정주(湞周), 31세 재모(宰模)에 이어지고 있는 가문의 것으로 지금은 30세 안정주가 살고 있다. 건물 양식으로 보아 150년은 넘어 보여 25세 안영규 대에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문간채에는 29세 안봉호(雲岡, 1898~1985)의 호를 딴 운강장(雲岡莊)’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92, 93)

안국신은 풍수에 조예가 깊고 장수를 했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1남이 정규, 2남이 종규, 3남이 명규, 4남이 영규(塋奎), 5남이 홍규이다. 안국신의 4남 영규가 진목마을의 종가를 잇는다.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 사료조사위원이신 안영신 선생에게 들은 집안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진목마을의 순흥안씨가 차동마을보다 큰집이다. 안창범의 둘째 큰아버지 종규가 이정방(李廷芳)의 사위가 되어 차동마을에 이거하게 됐다고 한다. 이정방은 효령대군 보()의 후손이다. 옛날에는 바닷가 염전이 왕실 소유이므로 그 후손들이 제법 많다. 그 당시 진월의 토반으로는 차이진안오양월서였다고 한다. 차동에 이씨, 진목의 안씨, 오추의 양씨, 월포(현 송금리, 월길리 일대)의 서씨를 말한다. 당시 차동의 이씨가 유명했는데, 순흥안씨 집안 안종규 공에게 시집간 차동이씨가 안씨들의 살림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안종규는 자()가 치범(致範), 호가 죽파(竹坡), 1795(정조 19)에 태어났다. 학문에 돈독하고 실행에 힘써 학문상의 명망이 드러났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과 교유했다고 한다.

안영규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안창범(昌範, 1835~1888)과 안창현(昌賢)이다. 안창범은 통덕랑을 지낸 안윤석이 아들이고, 진월 집강과 진월면장을 지낸 안경준은 그의 손자이며, 증손자로는 안봉호(安奉鎬, 1898~1995)가 있다. 안봉호는 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과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나눈 친구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호가 운강이다. 운강장(雲岡莊)1천평이 넘는 대저택의 재실 이름이다. 대저택이기 때문에 장이 붙었다. 마당에는 안채를 향하는 거북바위가 있다. 만석꾼의 집터는 한결같이 거북 명당과 관련이 많다.

운강장 마당의 거북 바위
운강장 마당의 거북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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