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이회경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옥룡의 관문,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의 명당, 갈곡마을

옥룡의 관문, 갈곡마을을 찾아 나선다. 은빛 억새가 가을 햇살에 부서지는 옥룡천을 가로질러 갈죽교(5m, 총연장 58m)를 건너니 담장 벽화 정겨운 은죽구판장이 반긴다. 오른쪽으로 가면 은죽마을, 왼쪽으로 가면 마침내 갈곡마을이다.

갈곡마을
갈곡마을

호랑이 등줄기 같은 푸른 백운산과 일별하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바오밥나무를 연상시키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이정표처럼 듬직하게 서 있다. 1982년 보호수 지정 당시 수령 350년을 자랑하는 이 당산나무는 둘레 5.6m, 높이 12m로 카메라에 담기 위해 수십여 발자국을 뒤로 물러나야 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소망으로 뿌리내려 400여 년 동안 마을의 상징이자 자랑으로 이곳 갈곡마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했을 당산나무 곁에는 사모지붕의 수수한 정자가 葛洪停(갈홍정)이라는 이름표를 단 채 깃들어 있다.

당산나무와 갈홍정
당산나무와 갈홍정

어귀를 돌자 장풍득수(藏風得水), 바람은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풍수의 입지를 제대로 갖춘 갈곡마을이 장대하게 꿈틀거리는 좌청룡 우백호 산등성이에 감싸여 옥룡천을 내려다보는 전저후고, 배산임수 명당의 기운으로 품어 안아준다.

갈곡마을에는 왜 서씨가 살지 못할까

갈곡마을은 광양시지에 따르면 본래 광양현 북면 옥룡리 지역으로 추정되며 갈곡촌, 갈곡리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죽산리, 계곡리, 운하리, 갈곡리와 사곡면 기두리 일부지역을 병합해 운하와 계곡의 이름을 딴 운곡리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갈곡(葛谷)의 유래를 살펴보면 처음 입촌한 김씨가 밭에서 일하다 발견한 칡뿌리를 심은 것이 번식해 칡이 많은 고을이란 의미에서 갈곡이라 칭하였다는 설과 의 옛말로 갈라지다의 의미도 있어 산골마을 또는 산이 갈라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란 설이 있다.

밭두렁에서도 담장에서도 탐스런 감을 매단 감나무가 멀뚱멀뚱 쳐다보는 평화로운 갈곡마을을 거닐다 여러 갈래길이 모이는 곳에 자리한 마을회관의 문을 빼꼼 여니 정현순 이장님과 어르신들 몇 분이 넉넉한 얼굴로 맞아 주신다.

감성과 열정 넘치는 정현순 이장
감성과 열정 넘치는 정현순 이장

갈곡마을은 1580년경 김씨와 서씨가 동서에 각각 터를 잡고 정착했는데 김씨 일가는 날로 번창하는 반면 서씨 가문은 점점 궁색해져 서씨는 마을을 떠나고 김씨 일가가 마을을 형성했다고 광양시지는 기록한다.

취실은 서씨가 못 산다 그래. 옥룡천 건너 산본마을에는 괴등골 형상의 산이 있는데 그 괴등골이 우리 마을 쪽을 이렇게 웅크리고 보고 있대. 그래서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으니까 오금이 저려서 쥐가 못 산다 그말이야정현순 이장님의 말씀이다.

괭이가 건너온다고 냇물이 좁은 데도 노둣돌 두세 개를 놓았지 다리를 안 놨어. 산본마을은 농토가 별로 없고 우리 마을에 들이 있으니까 산본 사람들이 낮에 노둣돌을 놓으면 밤에 몰래 우리 마을 사람들은 고양이가 못 건너오게 노둣돌을 훼손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거든어르신들의 이구동성.

당산나무가 있는 구릉 왼쪽 30~40평 되는 동네 땅을 숲으로 채워 괴등골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도록 했는데 그건 서씨가 못 사는 갈곡마을이 오히려 쥐실이었지 않았나. 쥐를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 같고다시 이장님 말씀이다.

순수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건넛마을 고양이 형상의 산과 이 마을에 서씨가 살지 못하는 건 무슨 연관이 있으며 쥐실마을에 오히려 쥐의 뜻을 가진 서씨가 살지 못하는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갈곡마을의 자랑인 어르신들
갈곡마을의 자랑인 어르신들

마을주민 모두가 인물이고 자랑인 장수마을, 갈곡

갈곡마을은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의 명당에 걸맞게 조선조 사헌부 감찰부터 국회의원, 경찰서장, 판사 등을 두루 길러냈으며 화랑무공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자도 다수 배출되었다.

학사장교 최초 장성 진급의 영예를 안은 정현석 장군, 사법고시에 패스한 기세룡, 기세운 두 형제가 그 기운을 이어가고 있지만 나는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이 모두 인물이라고 생각해. 여기 계신 분들이 95세야. 102살 되신 분은 요양원에 계시고 아무튼 장수마을이야. 그게 자랑거리지 뭐세상을 바라보는 정현순 이장님의 따뜻한 시선을 엿본다.

지나간 날들을 추억하며 마을 자랑에 신난 어르신들은 안온한 얼굴에 이름도 곱디고운 이형화(95), 소화심(95), 정금심(94), 정묘순(85), 김갑순(82)으로 평균 90세에 이르고 은발에 퍼머를 하신 멋쟁이 이장님이 일흔여덟로 가장 젊다.

흥미진진한 스토리 가득한 걷고 싶은 이야기 마을, 갈곡

갈곡마을 진입로는 돌이 박혀있다는 뜻을 가진 독배기길로 불리고 마을 앞인데도 독배기 북쪽 들판을 뒷들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독배기마을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논둑에 돌잉 박혀 있는 독배기
논둑에 돌잉 박혀 있는 독배기

원래는 10여 개 바윗돌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1960년대 농사에 걸림돌이 된다며 깨뜨리거나 묻어 없애 지금은 논두렁에 3개만 남아 있다고 길가에 세워진 독배기(돌박이) 전설안내판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외에도 갈곡마을에는 탕건처럼 생긴 탕건바구’, 속병에 좋은 약수가 났다는 물산’, 쐐기를 박아 놓은 형국인 씨아구배미’, 흉년에 쑥밥과 논을 바꾸었다는 쑥배미등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차고 넘친다.

탕건모양의 탕건바구
탕건모양의 탕건바구

김갑순(82) 어르신은 우리 할머니가 물산에서 나는 약수를 팔아 돈을 많이 했는데 누가 개고기를 먹고 갔든지 어쨌든지 그냥 물이 끊어진 거야라며 안타까워 하신다.

최근에는 마을만들기 사업 공모에 선정돼 집집마다 빨간 우편함과 문패를 달고 마을 한가운데 우물을 아담하게 복원하고 담장을 단아하게 꾸민 걷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갈곡마을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공동체의 상징을 보여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마을회관에 북카페 만들고 재능기부하는 스토리텔러, 정현순 이장

올해 말로 임기가 끝나는데 제일 아쉬운 게 우리 마을에 큰샘, 웃뜸샘, 삼밭골샘 우물이 3개 있거든. 큰샘은 세심정, 웃뜸샘은 세신정, 삼밭골샘은 소원을 빌었던 샘이니까 소원샘으로 이름을 짓고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그런 스토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못한 거야갈곡마을에서 나고 자라 객지에서 푸른 청춘을 보내고 고향을 찾아 귀촌한 지 11, 10년째 마을을 이끌어 가고 계신 정현순 이장님의 말씀이다.

마을회관에 모이면 책도 읽고 차도 한 잔씩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북카페를 만들었어요. 외지에 사는 자식들이 애들 데리고 오면 회관에 동화책이라도 있어야 읽어주면서 시간을 보내고 그럴 거 아니예요그런 취지에서 회관 내에 북카페를 만드셨다는 정현순 이장님은 어린이책스토리텔러 3’, ‘스토리텔러 2자격증을 취득하신 감성 스토리텔러로 동화구연, 동극 등을 통한 재능기부로 도서관, 보건소 등에서 어린이들을 만난다.

마을의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독배기 전설안내판을 세우기도 했다는 정현순 이장님은 자꾸 지방 소멸, 소멸하니까 그게 제일 안타깝죠. 우리 마을은 광양읍권과 가까우니까 생활권은 좋잖아요. 주거 여건이 개선되고 복지가 잘 되면 아무래도 이주해 들어오는 사람이 있겠다 싶어 마을만들기 공모 사업도 신청해 우편함 달고 담장 정비도 하니까 다들 예쁘다고 집을 사러 오긴 하는데 잘 이루어지지는 않더라고...”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하신다.

밭두렁에도 담장안에도 풍요로운 갈곡마을
밭두렁에도 담장안에도 풍요로운 갈곡마을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주민들의 건강을 위해 걷기 동아리를 만드는 등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오신 이장님의 땀방울은 누구나 걷고 싶은 마을과 어르신들의 인정 가득한 눈빛으로 열매 맺은 게 아닐까.

땅의 형상과 기운에 마을주민들의 이상과 가치가 총체적으로 수렴된 것이 지명이라 할 때 갈곡마을은 척박한 땅에서도 빠르게 잘 자라는 생명력 강한 칡처럼 대대손손 번영할 것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는 걸까. 어느새 정이 담뿍 들어버린 갈곡마을, 열정 넘치고 감성 가득한 이장님과 소년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시던 어르신들의 표정이 편집된 가을하늘처럼 가슴에 뭉클하게 박혀 들어왔다.

이회경 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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