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농업국가

오늘날 유교문화가 아직 남아있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시대는 많이 바뀌었다. 반상(班常)이 구별된 농경 수도작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농경사회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계획에 의거 산업화ㆍ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200, 300년에 이룬 성장을 우리나라는 불과 50, 60년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은 붕괴하였고, 서구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만연(蔓延)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 시대에 되살려내어야 할 충ㆍ효ㆍ예의 유교적인 가치관은 자본주의와 물질적 가치관에 경도(傾倒)되어 버림받고 있는 실정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 사회는 농경수도작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조선은 유교[성리학]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이념으로 삼아 국가를 유지해 나갔다. 한 해의 농사가 잘되어야 요순(堯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가 되었고, 35(三皇五帝)와 같은 성군(聖君)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만큼 농사에 힘쓰는 것을 권면하였다. 한반도는 온대기후 지역으로 노동집약적인 논농사 지역이다. 따라서 날씨도 매우 중요하였다. 임금이 정치를 잘하면 그 영향으로 우순풍조(雨順風調, 비가 때맞추어 알맞게 내리고 바람이 고르게 분다.)하여 나라가 순조롭게 되지만, 그 반대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設, 재이(災異)론의 이론적 토대이다. 자연의 운행이 사람의 신체 및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으로, 마음의 진실함에 의거하여 자연의 운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에 의거 날씨도 안 좋고, 재난과 이변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지금의 과학적 사고와 달리, 이러한 일이 일어난 원인을 임금님의 부덕의 소치로 돌린 것이다. 이는 왕에게 하늘의 뜻을 살펴 스스로 경건한 자세를 보이고 근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일식, 월식 현상 또한 마찬가지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임금들은 자신 때문에 기상이변이나 천문현상 등의 비정상적인 재이(災異)가 일어난다고 보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우제, 기설제, 기청제 등을 지냈다. , 임금들은 부덕을 씻기 위하여 여러 가지 상징적인 행위를 행하였다. 죄수들의 형량을 줄이거나 없애 주는 사면(赦免),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감선(減膳), 임금이 신하의 바른말을 널리 구하던 구언(求言),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하는 수성(修省), 정전을 떠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피전(避殿), 음악 연주를 금지하는 철악(徹樂), 흉년에 술을 빚지 못하게 하는 금주(禁酒) 등을 하였다. 이는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민심을 회복하려 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조선은 농업이 천하의 근본인 농업국가였고, 농민이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되었다. 농민은 세금을 내고, 특산물을 바치고, 부역이나 군역을 담당하였다. 농업경제 사회이다 보니 모든 재화의 기준은 그 당시 현금이 아니라 옷감이나 곡식이었다. 신분제가 붕괴되고, 문벌 귀족 의식이 약화되면서 가치관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본주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하였고, 개화기 이후 근대 문물이 도입되기도 하였지만, 아직까지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따라서 부자의 기준도 쌀 몇 섬을 하느냐로 가름하는 것으로 평가하게 된 것이다.

농경사회의 재벌인 호남의 만석꾼들

요즘 재벌 회장에 해당하는 사람이 천석꾼, 만석꾼이다. 필자는 왜 이들이 만석꾼이 되었을까에 대해 평소 관심이 많았다. 자료의 한계 속에 이성웅 전 광양시장님으로부터 많은 자료와 정보를 얻었다. “호남은 비옥한 토지자본을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되면서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바꾼 집안이 부안의 김경중 집안이 유일해. 오늘날 호남이 낙후된 요인이 바로 이것 때문이야.”라고 아쉬워하신다. 노론이 득세한 것도 다 넓은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지.”

김경중의 아들 김성수(金性洙, 1891~1955)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태어났다.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13대손이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와도 같은 집안이다.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경성방직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순천의 김사천도 삼만삼천석꾼이었다. 사천 현감을 하여 사천이라 불리는데, 순천고등학교를 설립한 우석 김종익의 아버지로, 본래 이름은 김학모이다.

이성웅 전 시장님께서 주신 일제강점기 자료이다. 보성 박남현 5,330정보(16,000,000), 해남 이환용 2,530정보(7,590,000), 강진 김충식 1,215정보(3,645,000), 순천 김종익 1,127정보(3,381,000), 동복 오자섭 893정보(2,679,000), 해남 윤정현 829정보(2,487,000), 부안 김경중 819정보(2,457,000), 동복 오정남 806정보(2,418,000), 광주 현준호 713정보(2,139,000), 담양 국채웅 653정보(1,959,000), 고흥 김상현 632정보(1,896,000)이 호남의 10대 지주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보성의 팔만석꾼, 박팔만

보성 미력면 덕림리 송림마을에는 팔만석꾼이 있었다. 사람들은 박팔만이라 불렀다. 진원박씨로, 원래 이름은 박남현(朴南鉉, 1864~1930)이다. 위의 자료를 계산해 보면 팔만석꾼이 아니라 그 두 배인 십육만석꾼이다. 부친이 낮잠을 자다가 태양을 삼킨 후 콩밭을 다녀온 부인과 합방을 한 후 낳은 자식이라 한다. 박남현이 12살 정도 되었을 때 나무를 하러 갔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이를 엿들으니 풍수들이 3대를 써야 발복하는데, 아버지를 써서 발복이 늦다. 좌향이 틀어졌지만 십만석은 날 자리라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시제를 지내러 올 무렵 밤에 몰래 가서 물을 부어 흥건하게 해 놓으니 후손들이 물이 모이는 자리인 줄 알고 묘를 옮겨가므로 그 자리에 틀린 좌향대로 할아버지 묘를 썼다고 한다. 그곳이 미력면 대룡산(444.8m) 바위 명당이다.

대룡산에서 보면 바로 앞에 보성강이 휘돌아 흐른다. 마치 안동 하회마을과 같은 명당이다. 묘 앞을 흐르는 물은 멈추고 모여서 돌아보며 머물러야 생기가 크게 왕성해진다. 여성에 비유하여 설명하면 물이 묘 앞으로 모이는 것은 출가하여 자식을 낳는 것이고, 물이 없어지는 것은 노쇠하여 죽음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명당일수록 풍수지리가들이 다양한 형국으로 해석하고, 뭇사람들이 무덤을 쓴다. 이곳을 어떤 사람은 비룡망하형(飛龍望河形, 나는 용이 강을 바라보는 형국)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닭이 알을 품는 형국)으로 보기도 한다. , 어떤 이는 이곳을 와우형(臥牛形, 소가 누워 있는 형국)으로 보기도 한다. 아무튼 명당일수록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그런데 박남현의 조부 묘는 일대(一代) 발복 명당이라 팔만석만 하고 당대에 망했다고 한다. 박남현이 죽자 3,500평에 세운 8채의 대저택까지 불에 타 버렸다. 박남현은 항일운동가로, 보성향교 제주(祭酒) 사건의 주역이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등 그의 공적이 매우 컸다.

여수 봉소당(鳳巢堂)
여수 봉소당(鳳巢堂)

여수의 김한영

여수 봉소당(鳳巢堂)은 영광김씨 종손 고택이다. 김한영, 김익평, 김성환(1915~1976), 김재호로 이어지는 일만이천석꾼 집안이다. 호남정맥의 끝인 백운산의 정기는 도솔봉, 봉강의 성불봉, 진상 어치의 억불봉을 거쳐 옥곡의 국사봉과 중마()의 가야산(가요산), 바루섬, 길도, 묘도, 여수 영취산, 구봉산, 돌산도로 향한다. 구봉산 기슭이 되므로 봉강동(鳳崗洞)이라 하였는데, 이곳에 봉소당이 자리한다. 봉황의 집 형국으로, 예암산이라는 안산을 갖고 있으며 아침햇살이 눈부시고, 갠 안개의 장관을 자주 연출하는 곳이다.

1948년 여순사건,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많은 만석꾼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 집안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란 말처럼 남에게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그 보답으로 자신과 집안에는 물론 자손들이 까지도 반드시 경사(慶事)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많은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고 소작인에게 적선을 베풀었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좌익 인물들이 여순사건 때 김성환의 탈출을 도와주어 지금도 여수 최고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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