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광양의 천석꾼들

천 섬을 거두려면 500마지기, 즉 십만 평의 땅이 있어야 한다. 광양은 거대한 백운산이 있어 들판이 적다. 뿐만 아니라 섬진강 하구에 위치해 넓은 농토를 보유하지 못했다. 섬진강 유역은 다우(多雨)지역으로 우리나라에서 하상계수가 제일 크다. 홍수가 빈번했기 때문에 빈촌(貧村)으로 살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농사지을 땅이 적고 바위와 산이 많은 곳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곳은 살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성격이 강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다. 악착스럽고 근면해야 한다. 이를 반영해 고춧가루 서 말을 먹고 펄 땅 30리를 긴다는 말이 생겼다. 이 말을 인근 지역에서도 쓴다. 이 말이 어느 지역에서 먼저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죽은 광양 사람 하나가 산 □□사람 셋을 당한다는 속담도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광양군지에는 1931년 간행된 전라남도사정지(全羅南道事情誌)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여기에 조사된 50(, 땅 넓이의 단위. 한 정은 한 단()10, 3천평으로 약 9917.4이다) 이상을 가진 사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진월면의 순흥안씨와 광양읍의 우명길 100정보이다. 옥곡의 유채규가 80정보, 광양읍의 김현섭과 진상의 김상의, 진월의 김만수가 70정보이다. 광양읍의 홍경연, 홍재규, 최병덕, 최진열, 장태석이 50정보이다. 또 봉강의 이경모, 옥룡의 김교민도 50정보라고 한다.

1정보가 3천평이다. 100정보이면 30만평이다. 1500마지기[두락]이다. 옛날에는 소출이 낮아 1마지기에 잘하면 2, 3(160Kg~240Kg)이 난다. 요즘은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1단보(300)500Kg 정도 생산된다고 한다.

이성웅 전 광양시장님의 구술에 의하면 어릴 때 진목 순흥안씨들은 만석꾼이라 불렸다고 한다. 광양향교 안영춘 현 전교(典校)님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신다. “1955년이나 1956년 내가 초등학교 3, 4학년쯤 되어 지금 운강들이라 불리는 곳의 개를 막고 동네 사람들이 일하러 갔어. 제법 뜰이 넓어. 지금은 옥토가 되었지만 원래 그곳은 갈대밭이었어, 안영춘 전교님이 어릴 때 설에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가면 할머니께서 호랑이 가죽 방석에 앉아 세배를 받으셨다고 한다. 설음식을 많이 장만해 음식을 내놓으시면서 많이 먹어라하고 후한 인심을 베푸셨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자료를 보면 순흥안씨가 100정보이니 삼천석꾼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삼천석꾼만 되어도 어마어마하다. 또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진목 순흥안씨는 서울 안국동 1번지에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집안에는 포병들이 지니는 창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진월의 순흥안씨들이 엄청난 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석꾼으로 부른 것 같다.

물가가 달라져서 정확한 계산은 어렵지만 요즘 1조의 가치가 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만석꾼을 10대 재벌, 천석꾼을 100대 재벌로 보기도 한다. 가치 환산이 어려운 것은 옛날이 농경사회였지만 지금은 산업화 사회이기 때문이다. 비례식을 대입해 쌀의 가치를 산술적으로 비교하기 어렵다. 옥곡에도 이천사백석꾼이 있었다고 한다. 전주 류씨 류계양의 손자로 옥곡초등학교 건립에 공이 많은 유채규이다. 또 지원리, 섬거리, 금이리, 황죽리, 어치리, 청암리 등 진상 곳곳에 땅을 가진 김상의도 이천석꾼이었다.

요즘처럼 과학 만능시대에 천석꾼, 만석꾼이 되기 위해서는 묫자리나 집터를 잘 잡아야 한다고 한다면 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묘지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길지(吉地)를 확보하기 위해 지사(地師)를 동원하기도 했다. 작은 부자야 검소함에서 생길 수 있지만, 국부들은 하늘이 내려준다고 한다.

산송(山訟)은 일명 묘지 소송으로, 노비·전답 소송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사송(詞訟)의 하나이다. 특히 16세기 이후 성리학적 의례의 정착과 종법 질서의 확립 과정에서 부계 분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등장해 조선 후기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터나 묫자리는 풍수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주관적인 것이기에 분란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크다. 분명한 것은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가 갖춰진 곳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이런 명당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조선 후기에는 묘지 소송이 빈번했다는 것이다.

하동 화심리 만석꾼 여참봉

하동읍 화심리 마을에는 만석꾼 집안인 의령여씨(宜寧余氏)가 산다. 지형이 화심(花心) 형국이라 마을의 명칭도 그렇게 유래됐다. 옛날에는 기휘(忌諱) 풍습이 있었다. 본래 이름을 피하고 벼슬을 넣어 부르거나 그냥 성씨에 부자를 붙여 부르는 관습을 말한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중시하는 유교 국가이므로, 주로 벼슬 이름을 붙여 불렀다. 여참봉이란 명칭도 조선시대 각 관서의 종9품 관직인 참봉 벼슬을 여씨가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화심마을의 여건상(余健相)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인 찰방(察訪)을 역임했다. 의령여씨세보(1906)하동 화심동파에 보면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첫째 아들이 참봉(參奉) 여종엽(余琮燁)이고, 둘째 아들이 여승엽(余勝燁)이다.

하동 만석꾼 여참봉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용준의 소설 섬호정이 쓰여졌다. 1980년 경상남도 진양군 수곡면 사곡리 식실 마을에서 채록한 여종엽과 기생 향도꾼이라는 설화도 전해 온다. 기생들에게 후한 인심을 베푼 여종엽이 죽자, 기생들이 자청해 여종엽에게 보답하기 위해 상여를 멨다는 독특한 이야기다.

최참판댁
최참판댁

만석꾼 여참봉을 최부자로 바꾼 것이 대하소설 박경리의 토지이다. 박경리의 본명은 박금이(朴今伊)로 통영 출신이다. 필명은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박경리는 여참봉의 셋째딸과 진주공립고등여학교 동창생이었다. 그 당시 만석꾼의 집안에 차가 두 대 있었는데 그 차로 주말마다 진주에서 하동으로 학교 다니는 딸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박경리는 여참봉의 딸과 친해 하동읍 여참봉 집에 놀러 자주 왔다. 여기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 박경리의 그 유명한 대하소설 토지가 아닐까?

만석꾼 여참봉의 첫째 딸은 곤양면 환덕리 환덕마을 출신 삼천석꾼 집안과 결혼했다. 24대 경남도지사를 지내고 진주 칠암동 경남예술문화회관을 개관한 조익래의 백부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둘째 딸 여다남(余多南)은 진상 비촌마을 출신으로 전 부산시청 보건건설과장을 역임한 황호연(黃鎬然, 1908~1993)과 결혼했다. 후술하겠지만 창원황씨 비촌파와 박경리의 토지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상신마을에는 조씨 고택이 있다. 상신마을의 평양조씨는 삼천석꾼이었다고 한다.

화사별서
화사별서

하동 화사별서는 평양 조씨(平壤趙氏)의 세도가 주거로서 흔히 조부자집’, ‘조씨 고가로 알려진 하동의 대표적인 상류 주택이다. 조선 태조, 정종, 태종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준(趙浚, 1346~1405)의 직계손인 화사(花史) 조재희(趙載禧)의 별서(別墅)이다. 본가는 경성부 당주동 37번지였다.
조재희는 중앙의 세도 싸움에서 밀려 낙향한 양반이지만 하동 지역에서는 세도가였다. 이러한 연유로 하동 화사별서는 하동군 악양을 배경으로 하여 박경리(朴景利)가 쓴 소설 토지의 주 무대인 최참판댁의 실제 모델이다.(디지털하동문화대전-하동 화사별서(河東花史別墅)

최근에 이성웅 전 광양시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진상 비촌마을의 이야기가 하동 악양으로 옮겨갔다고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양은 백운산과 섬진강이 낳은 천년 길지이다. 음과 양이 융결하여 산이 되고 수가 되었다. 음양이 서로 만나면 생기를 이루기 때문에 산과 수가 만나는 곳이 명당이 된다. 박경리의 토지는 한마디로 섬진강 소설이다. 1897년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하동군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설을 정의할 때 개연성 있는 허구라 한다.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 그 당시의 시대상이 잘 드러난다. 박경리 작가가 살아 계셨다고 해서 어딘지를 밝히지는 않겠지만 토지의 시발점이 하동 화심리이든, 악양 상신마을이든, 아니면 진상 비촌마을이든 섬진강이 만들어 낸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물이 모이는 곳에는 백성이 많이 살고 부유해진다. 따라서 천석꾼이 생길 수밖에 없고, 여기에 모인 다양한 인간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펼쳐질 수밖에 없다. 섬진강의 도도(滔滔)한 물결 따라 역사의 커다란 물결[大河]도 영원히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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