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에서 밥 한 끼 해요 23

평년보다 사흘 빨리 첫눈이 온다는 예보가 떴다. 입동도 지났으니 초겨울의 문턱이라 할 수 있겠다. 옛 시골의 첫눈 내리는 풍경이 떠오른다. 밖에서 소복소복 눈이 쌓이면 뒤 곁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른다. 언 손을 호호 불며 저녁을 먹으러 방에 들어서면 낯익은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랫목에 이불에 덮여 자리 잡은 청국장 띄우는 풍경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윗목에 자리 잡은 콩나물시루다.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린 풍경이지만 그 시절 집마다 흔한 겨울의 대표적 풍경이지 않을까. 길고 추운 겨울, 구수한 청국장과 콩나물국은 식탁 최고의 단골손님이었다. 지금은 콩나물은 집 앞 마트에서 사면 되지만 청국장은 좀 사정이 다르다. 입맛도 변했거니와 집안에 오랜 시간 풍기는 냄새로 인하여 아내와 아이들 눈치를 봐야 해서 감히 끓여 달라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아아 청국장...지금 딱 생각나는 음식인데, 어디로 가야 그 옛날 맛을 느끼며 한 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수정식당. 광양읍 인서리 중앙철물 사잇길로 들어서면 골목 초입에 위치한다. 오랜만에 이렇게 좁은 골목에 자리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깔끔한 분위기에 다소 가성비 좋은 가격의 찌개 메뉴가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필두로 8천원에 포진하고 있어 직장인들 점심 식사에 좋을듯하다. 사장님 혼자서 운영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식당을 영업해 오신 경험으로 비교적 빠르게 주문을 소화해 낸다. 식객은 일행과 만원인 청국장 하나와 된장찌개 하나를 주문하고 메뉴판을 보다가 만 천원 하는 제육볶음 1인분을 추가 주문했다. 잠시 후 뚝배기에 청국장찌개와 된장찌개가 나오고 제육볶음 한 접시, 그리고 상추와 배추나물, 무나물, 김치, 어묵볶음, 멸치볶음, 쌈장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먹음직스러운 잡곡밥이 청국장 옆에 자리한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절히 구색이 맞는 집밥 같은 상차림이다. 먼저 청국장 국물을 한 숟가락 뜨니 OMG!! 향기도 맛도 국물의 밀도도 옛 맛 그대로다. 뚝배기 안으로는 무와 배추, 호박, 두부, 바지락, 메주콩이 가득히 채워져 있다. 호호 불때마다 콧속으로 먼저 들어오는 청국장의 구수한 향기가 마치 그리운 고향마을 버스 정거장에 내려 걸어 가듯이 정겹고 포근하다. 입에서 씹을수록 오랜 기억들이 하나하나 다시 머릿속에 한 장 한 장 펼쳐지듯 명징하게 떠오른다. “이것이야말로 제철 나에게 꼭 맞는 음식이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제육볶음 한 쌈과의 궁합도 잘 어울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먹거리의 변화도 빠르게 진행된다. 막내 아이는 친구들과 마라탕을 먹으러 자주 간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마라탕이다. 막내는 이번 주말에도 친구들과 집 앞에 생긴 마라탕 가게에 간다고 했다. 올겨울엔 꼭 막내 아이와 청국장 가게에 가고 마라탕 가게에도 갈 계획을 세워 본다. 청국장과 마라탕은 과연 잘 소통할 수 있을까. 막내가 내 나이가 되면 청국장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나처럼 마라탕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식탁에 둘러앉아 추위를 잊고 도란도란 나눈 가족의 정, 그리고 그 맛을 오래 간직하기를 바랄 뿐이다. 때론 그것이 삶의 든든한 뒷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이가 조금 더 들어가며 알아 간다.

광양에서 밥 한 끼 해요. 오늘은 광양읍 인서리 수정식당에서 청국장한 그릇 든든히 먹으며 고향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시간여행을 하며 어린 시절의 친구들 모습도 떠올리고 왔다. 잠시 시간 내어 그리운 고향 집에 다녀와야겠다. 그 시절 친구들과도 연말 한잔 계획도 세워야겠다. 그나저나 다음 한 끼는 뭘 먹지?

글·사진=정은영 민주당 지역위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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