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상 비촌마을의 창원황씨 삼대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박경리의 토지와 광양 진상 비촌마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비촌마을은 1974년 수어댐이 생기면서 산등성이인 현재의 자리로 이주한다. 수몰되기 전의 본래 마을에는 1530년경 창원황씨(昌原黃氏) 황후헌(黃後憲)이 처음 들어와서 입향조가 되었다. 사람들이 날몰이라 부르는, 지금은 수몰된 비촌(飛村)에서 470여 년 동안 18대가 살아왔다고 한다. 현재에도 위로 옮겨진 마을에 창원황씨들이 제법 살고 있는데, 이들을 창원황씨 비촌파라 부른다. 이 마을은 유교 사상이 매우 유서 깊은 곳으로 유림(儒林)들이 많이 나왔고, 당연하게도 구한말이나 일제하에서 의병과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다음 이야기는 전 광양시장인 이성웅 시장의 구술에 의한 것이다. 장편 소설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모티브가 혼입된다. 이 마을의 황병욱(黃炳郁, 1860~1924), 황종현(黃宗玹, 1882~1926, 처는 양천허씨 1882~1944), 황호일(黃鎬一, 1901~1983), 황하운(黃夏雲), 황상보(黃相報) 5대에 걸친 일가의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지의 북간도 이주 모티브는 우연치고는 황씨 삼대의 북간도 이주와 똑같다. 토지의 주인공인 서희는 충직한 길상과 함께 용정으로 간다. 황씨 삼대(황병욱-황종현-황호일)는 독립운동을 위해 북간도 용정으로 이사 간다. 당시 황병욱은 50세이고, 황종현은 28세 때 일이다. 황병욱의 처(1858~1933)는 박경리(1926~2008)와 같은 태안박씨(泰安朴氏) 출신으로, 이 성씨는 밀양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해 충청남도 태안(泰安)을 관향으로 삼았다. 박경리가 7살 되던 해 1933년인가 태안박씨 할머니는 돌아가셨다고 한다. 태안박씨 할머니가 친정에 와서 만주에 살았던 이야기를 많이 하셨을 것으로 추정되고, 박경리 또한 이러한 이야기를 집안에서 자연스레 접하며 자랐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토지의 북간도 이야기는 진상 비촌마을 창원황씨 집안의 가정사를 바탕으로 창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를 이야기할 때 국회의원이었던 이종찬, 이종걸의 경주이씨 일가들을 자주 거론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경주이씨 가문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칭한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호영 6형제가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이시영만 살아 돌아와서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성웅 전 시장님은 우리 광양에도 삼대가 만주에 자리 잡고 독립운동을 뒷받침한 창원황씨 집안이 있었음을 자랑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신다. 사람들은 우리 지역에 이런 명문가가 있는 줄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이 집안은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다. 1901년생인 황호일은 사재를 털어 진상중·고등학교(현 한국항만물류고등학교)를 설립하신 분이다. 황씨 일가가 천석꾼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이분이 일제강점기 주물공장을 차려 거부(巨富)가 되었다고 한다. 주물공장을 하여 부를 축적한 황호일은 부친 황종현이 1926년 돌아가시자, 2층 알루미늄관을 만들어 조부와 부친을 모시기 위한 대장정을 펼친다. 조부 황병욱은 1924년에 돌아가셨다. 2층에는 조부의 유골을 모시고, 1층에는 부친의 시신을 모셨다고 한다. 먼저 북간도 용정에서 함경도 청진까지는 마차로, 청진에서 원산까지는 배로, 원산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로, 서울서 삼랑진까지는 경부철도로, 삼랑진에서 진주까지 기차로, 진주에서 하동까지는 자동차로 모셨다고 한다. 하동읍 원동에서 다압면 신원을 잇는 섬진강 다리가 1937년에 개통되었으니, 다리 개통 이전이므로 당연히 나루를 건너 운구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만주에서부터 진상 비촌마을에 조부와 부친을 모시기까지의 산을 넘고 물을 건넌 여정(旅程)은 험난하고도 멀었다.

2015년 10월 17일 제16회 진상중·한국항만물류고 총동창회(회장 황상보) 어울림 한마당 축제와 함께 열린 서운 황호일 선생 현창사업 제막식.
2015년 10월 17일 제16회 진상중·한국항만물류고 총동창회(회장 황상보) 어울림 한마당 축제와 함께 열린 서운 황호일 선생 현창사업 제막식.

팔만대장경과 하동정씨

하동정씨 정안(鄭晏, ?~1251)은 십만석꾼이었다. 정안은 고려 무신집권기 때 최우의 조카였었다. 몽고군이 침략하자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자금을 지원하여 남해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한 바는 다음과 같다.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초명은 정분(鄭奮)이며 자는 화경(和卿)이다. 형부상서 정세유(鄭世裕)의 손자로, 평장사 정숙첨(鄭叔瞻)의 아들이며, 최우(崔瑀)의 조카이다. 하동정씨는 최씨정권을 지탱하게 해 주었던 4대 가문, 곧 경주김씨·철원최씨·정안임씨·하동정씨 중에 하나로서 최씨정권기 명문 벌족이었다. 총명하여 어려서 과거에 급제했고, 음양·산술·의약·음률에도 정통했다. 진양의 수령이 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하동에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집권자 최우의 추천으로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었고 1241(고종 28)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 과거를 주관했다. 최우의 정방원(政房員)으로서 정안의 권세가 조야를 기울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최우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남해(南海)로 은퇴했다. 불교를 독신해 명산대찰을 순방하고 사재를 희사해 당시 간행 중이던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펴내기도 했는데, 정안이 있던 남해에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팔만대장경의 조판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서출동류하는 남강이 길러낸 만석꾼들

우리나라는 동고서저의 지형상 대부분의 물은 동출서류(東出西流)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는 의미이다. 이에 비해 서출동류(西出東流)는 역수이다.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면 힘이 있으므로 더욱 융성하고 발전한다고 해서 명당수로 취급한다. 대표적인 서출동류(西出東流)가 두만강, 형산강, 남강 등이다. 역수의 명당인 남강 주위에 우리나라 국부(國富)들이 포진해 있다.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조부는 이홍석인데 이천석꾼이었다. 이홍석은 아버지의 백골을 메고 전국을 찾아다녔다. 스님이 가르쳐준 명당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동네 뒷산이었다. 증조부의 묫자리가 금두꺼비가 엎드리고 있는 형상, 금섬복지형(金蟾伏地形)이라 한다. 결국 국부가 나올 것이라 스님이 소점한 그 자리는 예언이 그대로 적중했다. 효성 그룹 조홍제의 부친이 사천석꾼이었으나 조홍제가 만석꾼으로 만들었다. GS 허창수 회장과 LG 구인회 창업주가 둘 다 만석꾼이었다.

경주 최부자

경주 최씨도 최진립부터 최준(崔浚, 1884~1970)까지 400년간 12대가 이어진 만석꾼이었다. 그 비결을 사람들은 육훈(六訓)육연(六然)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라 본다. 이러한 선행은 평등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우리 공동체에 회자(膾炙)되었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일제는 서울 낙산 이봉래, 진주의 김기태, 경주 최준을 조선의 3대 부자로 불렀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할 때 만석꾼은 우리나라에 4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최준과 안희제는 백산상회를 설립했고, 임시정부에 막대한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 최준은 전 재산을 기부해 영남대학교를 설립했다. 경주 최부자가 12대를 이어왔는데, 청송의 만석꾼 심호택(1862~1930)1960년대까지 9대를 이어왔다고 한다.

자린고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두쇠를 자린고비라 한다. 자린고비가 누구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충북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의 조륵(趙玏, 1649~1714)이 유력하다. 이 설화의 주인공이 한양조씨와 관련된 것만은 분명하다고 한다. 자기는 식사 때 자린고비를 먹으면서도 자기 아들이나 친척들에게는 굴비를 천장에 실로 매달아 놓고 밥을 먹게 하는 특이한(?) 식사법이다. 조륵이 죽은 후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이 자인고비(慈仁考碑)’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고 한다. 조륵은 실존 인물이지만, 각 지역에 또한 자린고비가 다 있을 것이므로 각 지역마다 자린고비와 관련된 설화가 많이 전승되고 있다.

유진산과 이현상

유진산(柳珍山, 1905~1974) 아버지가 해방 전까지 만석꾼이었다. 본명은 유영필(柳永弼)이었으나 그가 태어난 진산군(珍山郡)의 이름을 따서 유진산으로 개명했다. 그 당시는 전라북도 진산군이었으나 현재는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이다. 유진산의 친구인 이현상도 금산군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가 이면배(李勉培)로 삼백석꾼이었다고 한다. 빨치산의 상징적 인물인 그는 남부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가 하동 의신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B-29로 폭격해 빨치산 5만명을 전사케 했다고 한다. 이들을 토벌하면서 아군 2만명도 죽었다.

그 밖의 만석꾼들

1855년까지 한··일 동아시아 최고의 부자는 만상 임상옥이었다. 의주 사람으로 최인호의 상도가 그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평안도에는 조부자가 있었다. 신의주 쪽인데 4만석꾼이라 한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와 서산대사가 조부자가 공급해 준 곡식으로 승병을 이끌었다고 한다. 공주에는 십만석꾼 김갑순(金甲淳, 1872~1960)이 있었다. , 전하는 이야기로는 사천의 최부자도 구지마을(거북이마을)의 만석꾼이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 최고 가수 배호(裵湖, 1942~1971)는 중국 산동성에서 독립운동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배만금, 또는 배만호이다. 묘지명은 배신웅이라 한다. 조상이 원래 함흥 사람으로 만석꾼 집안이었다고 한다.

각 지역의 천석꾼과 만석꾼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많다. 천석꾼이나 만석꾼들은 모두 조상의 묫자리를 잘 써서 발복하거나 집터가 명당인 곳에 자리하고 있다. 경주의 최부자는 연화부수형의 집터이고, 공주 김갑순은 봉황포란형국이라 한다. 금구출복형과 관련된 곳도 많다. 아무리 과학 만능의 시대라 하지만, 오랜 세월 전승된 풍수지리를 배격하고 버릴 일은 아닌 것 같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