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을 따라 백운산 방향으로 가다 보면 멀리서부터 광양햇살학교가 환하게 반기는 마을 옥동. 옥룡에서 가장 찾기 쉬운 마을이 아닐까 한다. 가을걷이가 바빠 도저히 인터뷰 할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이장님과 몇 번의 통화 끝에 옥동으로 길을 나선다. 기다린 만큼 선물처럼 설레는 발걸음이다.

안터에서 옥동(玉洞)’으로 개칭

본래 안터라고 불렸던 마을 이름이 옥동으로 바뀐 것은 1780년경 뒷산 산수골에서 구슬()이 많이 나고부터다. 안터는 안으로 들어오는 마을이란 뜻으로 내기(內基)마을이라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마을로 들어오는 세 가지 길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안으로 쑥 들어앉았던 모양이다. 일제 강점기에 광산실태를 적은 기록에 의하면 금광의 지하갱도가 200~300m되었고 커다란 금방앗간이 있었다고 하니 마을 이름이 옥동으로 바뀔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옥동마을 전경
옥동마을 전경

햇살 학교 정문에서 맞은편 논이 끝나는 곳에 아담한 모습으로 필자의 눈길을 끄는 정각이 있었다. 안린정(安隣亭)이라는 마을 정각이다. 안린정(安隣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르신 몇 분이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시다가 어찌 왔냐고 물으셨다. 궁금한 것들을 말씀드렸더니 옥동에서 나고 자란 김정태 어르신(77)이 금광과 갈암정, 고인돌, 당산제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다. 금광에 가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지금은 물이 추적추적하고 박쥐가 나와서 갈 수 없다고 하셨다. 금이 나서 부촌이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신중동국여지승람이나 마을 삶터 흔적을 살펴보면 금이 나기 이전인 1250년대부터 상당히 번성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옥동은 광양 이씨 시조 이무방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려말, 조선 초에 요직을 거치다가 정1품 광양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마을 입구에서 안쪽으로 800m지점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해서 그쯤의 거리에 있는 돌담을 찾아보았지만 언젠가 신문에서 본 이무방의 생가 돌담은 찾을 수 없었다. 이무방과 관련된 흔적은 비석거리라는 이무방의 선산과 시를 읊고 담소하던 속각정을 이르는 쏘가징이라는 곳이 있다.

이성기 이장님
이성기 이장님

부자가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안 내도 되는 마을 축제 당산제

옥동교를 건너 햇살학교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한쪽 모퉁이가 튀어나와 있다. 이성기 이장님 말씀으로는 차가 다니기 불편해서 튀어나온 담을 깎아내는 작업을 할 예정이라고 하셨다. 필자가 들어갈 때도 마주 오는 차가 있어 뒤로 물러나 지나가기를 기다린 후에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담을 지나면 바로 당산나무가 보인다. 당산나무는 1982년 지정 당시 320살의 나이를 먹은 나무다. 이 나무에 음력 7월 초하룻날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더운 한여름에 당산제를 지내냐고 했더니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옛 어른들이 아이를 낳으면 정결치 못하다고 하여 당산제를 지낼 수 없기 때문에 6월 말일에 아이를 낳으면 71일에 지낼 수 있고 72일에 낳으면 제를 지냈으니까 괜찮아서 71일로 정한 거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이해가 잘 안 되긴 하지만 미풍양속을 이어가는 정신이야 말로 과거와 후대를 이어가는 끈이 아닐까 한다. 당산제를 지내는 과정이 궁금하여 여쭈어 보았다.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우선 3명의 제관을 정한다. 상처를 하지 않고 자식들도 살아있는 통상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로 정하고, 제관으로 정해진 이들은 당산제 지내기 전 3일 동안 부부가 합방해서는 안 된다. 당산나무 앞에서 3명의 제관이 제의 형식대로 진행하고 절을 한다. 제가 끝나면 하루 종일 먹고 즐겁게 지낸다. 비용은 부자일수록 많이 내고 어려운 사람은 안 내도 된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고 정을 나누는 당산제 풍습이야말로 지극히 민주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전에는 외부에서 사람들을 모셔 와 크게 지냈는데 지금은 나이 드신 분들만 있어서 대접하기 힘드니 마을 사람들끼리 지낸다.

이장님은 향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신축 년생 향교 졸업생이다. 향교에서는 정월 초하루와 보름에 제를 지내는데 향교에서 배운 것을 책으로 엮어 당산제에 응용하고 싶다고 하셨다. 마을 일로 바쁠 텐데 더 배우고 싶다고도 하시니 정말 부지런한 이장님이다. 당산나무를 쳐다보며 시에서 관리를 하고 있지만 가지가 자꾸 죽어간다고 하는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갈암정과 갈암뜰

옥동교를 건너기 전 오른쪽에 갈암 이현일 마지막 유배지라는 글이 돌에 새겨져 있다.

저기 보이는 컨테이너 박스를 돌아가면 샘이 있지. 저기로 꼭 돌아가야 혀.”

길을 못 찾을까 봐 이명남 어르신(89)이 자세히 덧붙여 주신다. 가리키는 곳을 보니 농노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거기에 이현일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떠먹은 샘이 있다고 하셨다.

정각에서 검고 커다란 고인돌은 언덕 위 감밭에 빤히 보인다. 직선으로 난 오르막길로 가면 고인돌이 두꺼비 한 쌍처럼 마주보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신기함에 궁금증도 더하여 권하시는 귤 하나를 챙겨 우선 가까운 샘부터 가보기로 했다. 농노길 삼거리에 표식 하나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컨테이너 박스를 지나 좌측 길로 가다 보면 여기에 뭐가 있을까 싶게 실개천만 무심히 흐르고 다슬기들이 바닥에 붙어 있다. 수로를 따라가다가 막다른 집에 다다랐다. 길이 없나 싶어 막연히 서 있는데 필자가 올 줄 알았다는 듯 영화의 한 장면처럼 때맞춰 흰색 승용차가 앞에 와 멈추었다. 10년 전 순천에서 들어와 그곳에 집을 짓고 산다는 부부였다. 샘이 있다 하여 찾아왔다고 하니 갈암정이 담 옆에 있고 그 때는 모르고 집을 지었는데 샘이 있어서 좋다고 하신다. 대문에서 오른쪽으로 담장을 끼고 수로 위를 조심히 걷다 보면 전봇대를 만난다. 그쯤에서 우측에 도깨비바늘과 잡초가 난감하게도 무성한 샘이 있다. 십 년 전에 왔을 때는 샘물이 맑고 좋아 사용하기도 했고 언젠가 시에서 나와 샘 안쪽을 보수하고 관리해서 더 좋았는데 지금은 잡초로 덮여 버렸단다. 손으로 잡초를 조심히 헤쳐 보니 맑고 투명하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고 이현일 선생이 떠먹은 역사 깊은 샘인데 관리가 안 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 하신다.

잡초로 덮인 갈암정
잡초로 덮인 갈암정

해마다 대학생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몇몇 분들이 찾아와서 들여다보고 가요. ‘갈암정이 있다더라하고 찾아오지만 아무런 표시가 없으니 샘을 찾기가 어렵지요. 제발 깨끗하게 관리해주고 특히 잊혀져 가는 것을 찾는 학생들을 위해 잘 보이게 표시해 주면 좋겠어요.”

안주인의 간절한 당부다. 지금은 추수를 해서 그나마 낫지만 벼가 한참 자라고 있을 때는 수로조차 걷기 힘든 역사의 현장이다. 처음 보는 필자에게 마음을 열고 한참 동안 이야기해 준 부부가 참으로 감사하다.

갈암 이현일(1627-1704) 선생은 숙종 때 인물로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의 역사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고단한 벼슬살이를 한 영남학파의 거두다.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지지하고 이이의 이기일원론학설을 반대했다. 옥동으로 1697년에 유배왔다가 1698년에는 다압으로 옮겼고 8개월후 유배에서 풀려났다. 갈암뜰, 갈암쟁이, 갈암정 등 관련된 지명이 남아있는데 지금도 더러 옥동 들판을 갈암뜰이라고 부른다. 들을수록 예쁜 이름이다. 그가 지은 <갈암집>에 추석날 옥룡사에서 쓴 7언 절구의 시 八月十五日 夜宿玉龍寺6수가 전해오며 옥룡사와 동백숲, 백계산, 추석 명절에 느끼는 정한 등이 담겨 있다.

도깨비바늘과 도꼬마리, 이름 모를 가시가 옷에 덕지덕지 붙어서 한참을 떼어내야 했다. 전봇대 하나 서 있는 모퉁이 뒤쪽, 갈암 선생의 막막한 유배 생활에 생명수가 되었을 갈암정을 알아볼 수 있는 자그마한 표시라도 있으면 좋겠다.

감나무 밭을 지키는 고인돌

고인돌을 보러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잎이 떨어져 바스락거리는 감나무 밭을 걸으니 여기저기서 개가 짖어댄다. 마을 취재하면서 개들이 짖어대면 너무 무서워 어떤 곳은 돌아보기를 포기한다. 감나무 밭 한가운데에 큰 바위 두 개가 있다. 어른들이 말씀하신 두꺼비 두 마리 형상이라고 보여진다. 뒤엉킨 덩굴과 함께 감밭에 뿌리내리고 숨 쉬는 듯하다. 고인돌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은 후 안린정에서 멀리 보이던 큰 고인돌을 찾아 당산나무가 있는 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낯선 어떤 것도 봐주지 않을 작정이라는 듯 또 개가 요란하게 짖는다. 사그락 사그락 감나무 잎을 밟으며 아직 가지에 남은 감 몇 개를 쳐다보다가 검은 고래 같은 고인돌과 마주쳤다. 옥동은 청동기 시대 지석묘군이 발견된 곳이다. 기원전 8000년경부터 사람이 산 것이 확인되었고 후기 구석기유물로 추정되는 돌날이 발견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고즈넉한 저녁 햇살에 수채화처럼 감나무 가지가 고인돌에 무늬를 그리고 있는 시간, 고인돌다운 위용과 역사적 가치는 어디서 찾을까? 고인돌이 감나무 밭을 지키며 후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귀 기울여 듣고 싶다.

우리가 젊은 세대여~~

마을회관에 들렀을 때 할머니 몇 분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살아온 이야기야말로 진솔한 역사이다. 눈물겹게 살아온 이야기에 마을 자랑까지 담뿍 담긴다.

허옥순 할머니(76)는 옥동으로 시집온 지 55년째다. 가장 많이 변한 것으로 보리밥 먹던 시절이 지나고 지금은 쌀밥을 먹고 골목도 환해진 것을 꼽으셨다.

허옥순(76세)-맨오른쪽,김영순(89세)-가운데
허옥순(76세)-맨오른쪽,김영순(89세)-가운데

예전엔 요 마을을 안터라고 했어. 우리 친정 마을에 안터에서 시집 온 안터 댁이 있었어. 나는 추동에서 요리로 시집 왔고. 여그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해서 악착같이 자식을 공부시켜 공무원도 많고 교장도 많이 나왔어. 우리 마을은 서로 따시게 돕고 살어. 모 심글 때 품삯을 안 줘도 와서 도와주니 월매나 고마운지 생각하믄 여작지 고마워. 그 때는 남자들이 많았제. 지금은 젊은이들이 다 도시로 가니 어르신들이 농사가 힘들어.”

김영순 할머니(89)는 자식들이 다 잘 살아서 고생한 세월이 보상된 것 같아 좋다고 하신다. 서울 모 백화점 사장으로 성공한 아들도 있다고 옆에서들 말씀하셨다.

내는 시집와서 날마다 산골짜기 논에서 일했어. 근디 농사가 적어 나무를 해다가 읍에 가서 팔았는디 장에 도착해 보면 아이를 월매나 심하게 포대기로 맸던지 다리가 퍼렇게 멍이 들어 퉁퉁 부었어. 징상한 세월이여. 그래도 지금은 자슥들이 다 잘 사니 고생한 것이 보람이랑께.”

어렵게 살 때 이웃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신다. 서로 위하고 아끼고 어려울 때 보듬어주고 잘 먹고 잘 노는 것도 자랑 거리고, 물 좋고 공기 좋고 감도 많고 밤도 많고 햇살 학교가 들어와서 마을이 환해지고 깨끗해진 것도 자랑거리이다.

젊은이들이 없으니 우리가 젊은 세대여. 하하하~~”
유쾌한 어르신들의 웃음이 건강한 이 마을의 미래이다.

오른쪽부터-김정태(77세),김병문(82세),이명남(89세),정현덕(72세),정옥순(75세)
오른쪽부터-김정태(77세),김병문(82세),이명남(89세),정현덕(72세),정옥순(75세)

마을을 환하게 하는 햇살학교

햇살학교가 들어온 후로 동네가 밝아지고 학교에서 체육대회 하면 마을까지 아이들 소리가 들려서 참 좋다고 하신다. 가로등도 없고 전기도 없던 시절은 무서워서 나가지 못했는데 길도 좋아지고 환해져서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고.

햇살 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2009년 폐교한 옥룡중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광양에는 장애 학생들을 위한 학교가 없어서 여수나 순천까지 장거리 통학을 해야 했다. 광양햇살학교는 2022년 봄에 개교해 지하 1, 지상 3, 19학급(···전공과) 86명 규모이다.

2018년 서울 동부지역 공립특수학교인 서진학교 설립이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장애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무릎 꿇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어 보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했다. 전남교육청이 옛 옥룡중학교 터에 특수학교 설립계획을 세운 때가 그 일이 있은 후여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옥동마을에서는 환영 현수막을 내걸었다. 옥룡중학교 동문회는 모교 건물 사용에 대해 대안을 마련해왔던 터라 도교육청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곤란했을 것이다. 도교육청에서는 설명회를 마련했고 마침내 동창회도 환영 현수막을 내걸었다. 양보와 타협이 이끌어낸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모든 문제는 대화와 타협의 접점이 있을 때 서로 편안하고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국에서 이런 일은 없었다고 하니 옥동마을 주민들의 의식수준과 배려심을 엿볼 수 있다. 광양햇살학교는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세워진 전국 최초의 특수학교다. 학생, 학부모, 교육청, 주민 모두가 서로에게 햇살이 됐음을 증명하는 고귀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광양햇살학교
광양햇살학교

마을 포럼 우수상 선정

마을회관 밖에서 손님을 맞아 분주하시던 이장님이 손님을 보내고 잠깐 숨을 돌리고 계셨다. 유난히 취재 날짜를 잡기 어려웠던 터라 마을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얼른 여쭈어 보았다. 이장님은 자랑스럽고 힘 있는 목소리로 2년 전에 마을 포럼 공사 참여 교육을 받은 후 우수상을 받았고 마을 공사지원에 선정되어 내년에 5억 공사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보기 안 좋은 집이나 담벼락 등을 깨끗이 하고 동네 뒷길도 만들어서 편리하게 오갈 수 있게 하고 싶단다. 문제는 토지매입인데 사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아서 그게 가장 큰 고민이라고 하셨다. 시 유지를 찾아 필요한 공사를 하고자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비가 오면 학교부터 물이 불어 넘쳐서 소하천 공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당산 나무 밑 계곡물이 흐르는 아래쪽으로 버스가 들어오게끔 정리할 것이라고 한다. 원활한 차량소통을 위해 당산나무 주변에 주차장도 만들어야 한단다. 환경이 좋고 살기 좋아야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인구 유입 계획에는 마을 분들의 협조와 양보가 꼭 필요하다고 하신다. 마을 초입 도로가 좁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튀어나온 담장은 큰 차가 드나들 때 망가질 수밖에 없으니 잘라내는 정비가 필요하다. 넓은 도로를 만드는 숙원은 안린정 정각에서 담소를 나누시던 어른들께서도 하신 말씀이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는 이장님의 포부가 빛나 보인다.

말 그대로 구슬처럼 빛나고 금처럼 소중한 마음이 모여 사는 마을 옥동. 멀리서 봐도 환하고 반짝이는 마을, 딱 옥동이다. -참고:광양시지(2005)-

사진 박옥경-광양문화연구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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