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비보풍수의 원조 도선‘비보(裨補)풍수’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도선국사(道詵國師, 827. 3. 10.~898)이다. 그는 관상감에 소속된 풍수지리 전문직 관원인 상지관(相地官)이 아니라 
선승(禪僧)이었다.

도선은 영암 구림마을에서 태어나 구족계(具足戒, 출가한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계율)을 받고, 15년간 운수행각(雲水行脚) 후 백계산 옥룡사에 35년간 정주하시다가 여기에서 입적하셨다.

운수행각이란 구름처럼, 물처럼 선지식을 찾아 전국을 떠도는 것을 말한다. 유학자들도 사서삼경을 읽고 마지막으로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유람(遊覽)하는데 이를 주유(周遊)라 한다. 운수행각이든 주유든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현장체험 학습인데, 공부한 내용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신화, 전설, 민담, 민요, 판소리, 무가(巫歌), 속담, 수수께끼, 인형극, 탈춤 등을 구비문학(口碑文學) 또는 구전문학이라 한다. 이는 기록문학을 산출하기 위한 바탕으로 작용해 온 것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말은 전승되는 과정에서 첨삭되기도 하고, 기억의 불확실성이 노출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 글은 정확성을 증가시키고, 후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게 됨으로써 인류가 진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구비문학이 기록문학(記錄文學)과 엄연히 차이는 있지만, 문학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임에도 틀림이 없다. 

국가가 주체가 되어 발행한 문서가 있거나, 사건 기록, 금석문, 묘지명, 편지, 일기, 행장 등이 있거나, 개인 당사자의 기록이거나, 당대인에 의해 이루어진 직접 사료가 있다면 매우 좋겠지만, 뒷사람에 의해 편찬된 역사책이나 모조 또는 개조된 유물, 구비 전설을 기록한 간접 사료는 그다음으로 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튼 사료와 같은 기록이 없으면 역사가 없다. 이러한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는 현재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것으로, 카(E. H. Carr)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그러면 과연 도선은 실존 인물일까? 도선은 전국적으로 산재한 도선 설화만 가득하고 직접적인 사료는 아주 빈약하다. 뿐만 아니라 도선 관련 사료들이 모두 태생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실존 인물이 구비전승되는 과정에서 설화로 바뀌어져 민간에 전승되는 경우는 매우 많다고 본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광해군 때의 이의신(李懿信, ?~?)이 그렇고,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도 그렇다. 이의신이나 이항복과 관련된 설화는 너무나 많다. 역사적 인물이 설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역(逆)으로 설화가 다시 기록으로 남기도 한다. 하지만 설화는 문학의 갈래 중의 하나이지만, 역사학자들은 설화를 허구(fiction)로 본다.

옥룡사선각국사비(玉龍寺先覺國師碑)도선은 통일신라 말기에 태어났다. 도선이 태어난 9세기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 왕권이 약화되었고, 농민들은 가혹한 세금과 흉년 그리고 전염병으로 살던 곳을 떠나 도적이 되고 관청을 습격하기도 했다. 지방에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방 호족들이 등장
해 후삼국 시대가 열린다.

종교적으로는 중앙 귀족의 지지를 받았던 교종보다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선종이 개창되기 시작했다. 

구림마을
구림마을

도선국사의 행적은 도선국사가 입적한 후 250년이 지나 고려 의종 때 「해동백계산옥룡사 증시선각국사비명 병서(海東白鷄山玉龍寺 贈諡先覺國師碑銘 幷序)」가 서거정이 쓴 『동문선(東文選)』에 나타난다. 이가 「옥룡사선각국사비(玉龍寺先覺國師碑)」로 국립문화재연구원에 소개되어 있다. 이 글은 주로 여기에 기초해 작성했다. 

옛날 출판인쇄 문화가 발달하기 전에는 가장 좋은 것이 금석문에 남기는 것이었다. 돌에 기록을 새기면 깨지지 않는 한 불에 타지도 않고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원에 「옥룡사선각국사비(玉龍寺先覺國師碑)」에 대한 연구와 해석은 있지만,문화재로는 지정되지 않았다. 대체로 금석문은 그 출처나 전해 내려오는 사정이 분명한 것일수록 가치가 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이다.

비문을 최유청(崔惟淸, 1093~1174)이 짓고[찬(撰)], 정서(鄭敍)가 글을 써서[서(書)], 전면은 처실(處實)이 후면은 정충(正忠)이 새겨[각(刻)] 1173년에 의종이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여러 임금들이 도선의 도덕을 흠모해 신라 효공왕이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호를 증성혜등(證聖慧燈)으로, 고려 현종이 대선사(大禪師), 숙종이 왕사(王師)로, 인종이 선각국사로 각각 추봉했다. 

도선국사의 탄생 이야기스님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성은 김씨이며, 영암(낭주) 출신이다. 자는 옥룡자(玉龍子) 또는 옥룡(玉龍)이다.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한다. 어떤 사람은 신라 제19대 태종무열왕의 서손이라 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강씨(姜氏)니,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사람이 명주(明珠) 한 개를 건네주면서 삼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임신하여 만삭이 되도록 오신채(五辛菜)와 누린내 나는 육류(肉類)는 일체 먹지 아니하고 오직 독경과 염불로써 불사에 지극했다. 태어난 후, 유아 시기부터 일반 아이들보다 특이했다.

어려서 뛰놀거나, 우는 때에도 그의 뜻은 부처님을 경외함이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모가 그는 반드시 훌륭한 스님이 될 자질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고, 마음으로 출가를 허락하기로 했다. 

구림마을 국사암
구림마을 국사암

탄생과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가 담긴 곳이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의 국사암(國師庵)이다. 이 바위에는 선각국사 도선의 출생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깃들어 있다. 이 설화에는 어머니가 강씨가 아니라 낭주최씨로 나온다.

신라 말엽의 어느 겨울에 이 마을에 사는 낭주최씨 집안의 처녀가 시냇가에 나갔다가 싱싱한 오이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건져 먹었다. 그 후 처녀의 배가 점점 불러오더니 가을에 아들을 낳았다. 오이를 먹고 임신한 것을 괴이하게 여긴 부모는 갓난아이를 이곳 바위 아래에 갖다버렸다. 

며칠이 지나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이곳에 온 처녀는 비둘기 떼에 둘러싸인 아이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둘기 이야기를 들은 처녀 부모는 범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아이 키우는 것을 허락했다. 그 아이가 훗날 풍수의 대가로 알려진 선각국사 도선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를 국사바우라고 부른다.(영암문화원)

우리나라 서사문학은 ‘영웅의 일생’이라는 유형 구조를 보인다. 선각국사 도선의 탄생을 담은 국사암 설화도 이와 일치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인 출생→ 탁월한 능력→ 어려서 기아→ 구출·양육자를 만남→ 위기에 부딪힘→ 위기를 극복하고 왕이 됨’의 순서를 겪는다.

이 설화에서 고귀한 혈통은 ‘오이’로 되어 있다. ‘오이’는 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당시의 유력 세력을 상징한다. 일설에 태종무열왕이라 하기도 한다. 오이와 처녀가 결합해 아이를 낳지는 못한다.

이는 환인과 웅녀가 결합해 단군왕검을 낳은 것과 동일하게 해석하면 된다. 일종의 신화적 표현으로, 신화시대에 신비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신성성을 부여하는 장치로 해석된다.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비정상적인 출생이고, 어려서 버림을 받으나 ‘비둘기 떼’라는 구출·양육자를 만난다. 이것으로 도선은 영웅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마을 이름인 구림(鳩林)마을도 이에 연유한다. 이 구림마을은 정읍시 칠보면 원촌(院村)마을과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金安里)와 더불어 호남 3대 명촌에 해당한다. 명촌은 배산임수(背山臨水)로 농토가 넓어 살기에 적합한 곳이다. 그래서 출중한 인물이 많이 나고 서원이나 사당 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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