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구산선문의 하나인 곡성 동리산 태안사

도선은 15세에 드디어 머리를 깎고 월유산(月遊山) 화엄사에 나아가서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미 대의(大義)를 통달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의 국역을 보면 최유청이 지은 비문에 나오는 월유산 화엄사를 구례에 있는 지리산 화엄사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교종인 화엄사는 선승인 혜철과 계파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월유산 화엄사는 어디일까? 필자는 세 곳 정도로 추정해 보았다. 영암군 군서면 월곡리 월산마을의 월암사 폐사지가 있는 곳이 그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월산마을 초수동 계곡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면 도선국사 낙발지지라는 글씨가 음각된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월유산을 월출산으로 해석하여 지금의 강진군 성전면 월남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다른 설로는 월출산 도갑사의 동북쪽 2Km 지점에 화엄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문성왕 8(846)에 이르러 홀연히 스스로 생각해 대장부가 마땅히 교법을 여의고 스스로 정려(靜慮)하여야 할 것이거늘 어찌 능히 움직이지 않고 올올(兀兀)하게 문자에만 고수하고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때 혜철대사(惠徹大師, 785861)는 당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禪師)로부터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해 받고 귀국했다. 신라말 교종이 불교 본연의 자세를 잊고 왕과 귀족들과 결탁하자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은 경전 학습에 치중하는 교종보다는 마음만 깨우치면 된다는 선종을 받아들이게 된다. 스승인 지장선사의 제자가 도의선사와 실상산문의 조사인 홍척, 그리고 동리산문의 조사인 혜철이었다.

그 당시 신라는 당나라에서 선종을 받아들이면서 구산선문이 있었다. 가지산문, 동리산문, 실상산문, 봉림산문, 희양산문, 성주산문, 사자산문, 사굴산문, 수미산문이 그것이다. 동리산문은 곡성군 죽곡면에 있는데 동리산 태안사를 말하는데, 혜철이 그 당시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동리산 태안사(泰安寺)에서 개당(開堂)하여 연설하고 있었으므로 법을 구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선종의 가르침의 취지를 나타내는 말이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敎外別傳直指人心見性成佛)”이다. 교와 설 외에 체험에 의해서 별도로 전해지는 것이 바로 선의 진수이므로 오직 참선과 수행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에 바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선종에서 경전이나 언어 문자의 수단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혜철대사의 제자가 되다

혜철대사의 제자가 된 도선은 스승과 무설설(無說設) 무법법(無法法)”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주고받아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말 없는 말이고, 법 없는 법이다. 도선은 그의 수제자가 되어 혜철의 발우(鉢盂)를 전수 받았다고 한다. 발우란 스님들이 식사(공양)할 때 쓰는 식기를 말한다. 불교에서 총대주교(總大主敎)격인 스님을 조사(祖師)라 하고, 가사와 발우를 조사가 전법할 때 그 증표로 삼는 전통이 있다.

도선은 23살 때 혜철대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운수행각을 떠난다. 노을을 밟고 천석(泉石)을 완상하면서 훌륭한 곳을 답사했다. , 명승지를 찾아 선지식을 친견하고 문법(問法)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때로는 운봉산(雲峯山) 밑 동굴에서 참선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太伯)과 같은 큰 바위 앞에 초막을 맺고 좌선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스님의 명칭이 널리 퍼져서 온 천하 사람들이 그의 도덕을 추앙했다. 신비한 기적이 많았으나,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희양현 백계산에 옛 절이 있었으니, 그 이름이 옥룡사였다. 도선은 여러 곳으로 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그 경치가 뛰어나게 빼어나 옥룡사(864)를 중수하고, 시원하게 여겨 이곳에서 정진하다가 임종할 곳으로 뜻을 굳히고, 35년 동안 정주했다. 그리하여 그의 도덕을 흠모하여 학인들이 사방으로부터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문하에 제자가 항상 수백 명을 넘었고, 옥룡사를 중심으로 지리산 일대로 퍼져 나가 108곳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옥룡사는 정유재란 때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자 몇 번의 재건 과정을 겪었다. 한국 전쟁 후 조그마한 절을 지어 옥룡사라 했다가,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그의 높은 덕을 공경해 사신을 보내 궁중으로 맞이하고, 크게 기꺼워하여 초면인데도 궁중에 머물게 하였으나, 도선은 얼마 후 시끄러운 경주가 싫어서 옥룡사로 돌아가겠다고 간청했다.

어느 날 홀연히 제자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따라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따라가는 것은 진리의 상도이니, 어찌 오래도록 이 세상에 거()할 수 있겠는가?”하고 엄연히 입적하였으니, 향년 72세였다.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

사도촌(沙圖村)의 이인에게서 술법을 배우다

도선이 풍수지리를 전수 받은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이다. 첫째는 풍수의 비기를 스승인 혜철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리산 한 암자에서 만났다는 기인에게서 배웠다는 설이다.

처음 도선은 옥룡사에 자리 잡지 아니하고, 지리산 고개에 암자를 짓고 주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인이 찾아와 스님께 여쭈어 이르기를 제자(弟子)는 물외(物外)에서 깊이 숨어서 살아온 지가 벌써 수백 년에 가깝습니다. 조그마한 기술이 있어 높은 스님에게 받들어 올리려 하오니, 만약 천술(賤術)이라 하여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면 다른 날 남해의 바닷가에서 마땅히 알려 드리겠사오니, 이것 또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며,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옵니다라 하고,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스님께서 기이하게 여겨 약속했던 곳으로 찾아가서 과연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곧 모래를 끌어모아 산천에 대한 역순(順逆)의 형세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돌아보니 그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곳이 구례현과 경계 지점이니, 사람들은 사도촌(沙圖村)이라고 일컫는다. 지금의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섬진강 모래사장에서 지리산 기인으로부터 배워서 사람들은 이곳을 사도마을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산천의 형세를 순지세인지 역지세인지를 파악하여 살기에 적합한 곳인지, 아니면 산과 강이 서로 등져서 자연재해가 많이 생겨 해로움이 더 많은 곳인지로 구분하는 법을 기인으로부터 전수 받았다. 이를 계기로 도선은 스스로 홀연히 깨닫고, 더욱 음양오행의 술법에 연구하고 매진하게 된다.

이 당시 신라는 망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임을 최치원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최치원전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 계림은 누런 잎이고, 곡령은 푸른 솔이다.)”구절이다. 신라가 망하고,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의 곡령(鵠嶺)은 융성할 것이라 예언한 말이다. 또한 도선국사도 마찬가지로 신라의 멸망을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왕씨의 발상(發祥) 전설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조선의 풍수에 실린 이야기를 보자.

이 때에 신라의 승()으로서 유명한 풍수사 도선(道詵)이 한반도 풍수행각(風水行脚) 도중에 이곳에 도착했다. 때마침 제건(帝建)이 새로이 집을 지으려고 하고 있기에 산수(山水)의 이()를 가르치고, 신궁(新宮)의 기지(基地)도 잡아주며 장차 통합 삼한(三韓)의 주인을 낳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 예언이 적중하여서 새집에 옮겨 산 그달에 왕후는 임신하여 달이 차서 낳은 아이가 고려 태조 왕건이었다고 한다.

도선은 2년 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이어 책 1권을 지어 겹겹으로 봉하여 주면서 이 책은 아직 출생하지 아니한 군왕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서른 살 전후에 전해 주라.”고 당부했다. 바로 이 해에 신라 헌강왕이 즉위한 875년이었다. 877년에 이르러 태조 왕건이 과연 탄생했다. 그 후 장년에 이르러 스님이 전해 준 책을 받아 보고서야 천명이 자신에게 내려진 줄 알고, 드디어 궁예와 견훤을 물리치고 비로소 왕이 되었다. 모두 도선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이 전설은 고려 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도선의 권위를 빌어 와 후에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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