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풍수지리의 유형

풍수지리는 보통 이기론(理氣論), 형기론(形氣論), 잡기론(雜氣論)으로 나눈다. 먼저 이기론(理氣論)은 사주명리학이나 주역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일생[포태법]이나 자미두수(紫微斗数)와 같은 별들의 점술을 빌어 온다. 이를 차용하여 그 시기의 적합성 여부를 따져 길흉(吉凶)을 판단한다. 이 방법은 드러난 형세의 근원을 움직이는 기의 본질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청오 지창룡(池昌龍, 1922~1999)이 유명하다.

다음으로 삼성 이병철 회장을 자문한 하남 장용득(張龍得, 1925~1997)은 형국을 중시하는 형기론(形氣論)자이다. 형기론은 형상과 기운을 위주로 좋은 땅을 선택하는 것으로, 드러난 형세의 본질을 파악한다. 장풍득수(藏風得水)하는 곳을 최고의 길지로 친다. 이기풍수를 시간 개념을 위주로 하는 것, 무형의 것, 주역의 ()’에 해당하는 것 등으로 설명하는 반면, 형기풍수는 공간 개념을 위주로 하는 것, 유형의 것, 주역의 ()’에 해당하는 것 등으로 대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독립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상보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부모와 현대 정주영 회장의 묘소를 잡아준 손석우(孫錫佑, 1928~1998)와 같이 신통력이나 염력을 통해 신안(神眼)을 갖게 된 경우이다. 이를 이용하여 음·양택을 결정하므로 잡기론(雜氣論)으로 분류한다.

풍수지리가의 성향에 따라 유교적 풍수가, 불교적 풍수가, 도교적 풍수가로 나눌 수도 있다. 먼저,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의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산 윤선도(尹善道)는 유학자이므로 대표적 유교적 성향의 풍수가로 꼽을 수 있다. 고산 윤선도는 우리나라 시가(詩歌)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풍수지리에도 능통하였다. 윤선도가 잡은 효종의 능자리를 잡은 후 쓴 글이 산릉의(山陵議)이다. 광해군 때 교하천도론을 주장한 명풍 이의신(李懿信)과도 인척 관계로 교유하였다. 조선 중기 문인 택당(澤堂) 이식,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유학자들이 주역에 능통하였으므로 집을 짓거나 묘를 소점할 때 이기론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불교적 풍수가로는 대표적인 인물이 선승인 도선국사이다. 도선은 우리나라의 자생적인 풍수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전통 풍수의 초석을 세웠다는 것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물론 우리나라가 모든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 풍수 또한, 청오경, 금낭경, 옥수진경 등 중국의 풍수지리학 이론이나 서적을 전범(典範)으로 한 것도 틀림없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나옹화상, 진묵대사, 초의선사 등도 모두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는 스님들이었고, 이들이 소점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터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셋째, 도교적 풍수가로는 숙종 때 서오릉을 잡은 갈처사(葛處士), 흥선대원군이 명당자리를 부탁한 정만인(鄭萬人), 남사고(南師古), 북창 정렴, 토정 이지함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기록은 빈약하고 설화로 많이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한 장생법이나 자미두수(紫微斗数)와 같은 것도 모두 도교에서 사용하는 점술 방법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성향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종교학자들도 우리나라의 종교는 특이하게 혼재성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찰에 가면 산신각, 칠성각 등이 있듯이 토속신앙과 불교, 도교가 혼재된 특징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문화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유ㆍ불ㆍ도 삼교가 서로 융합되어 발전한 결과로 보이는 현상이다.

옥룡사의 비보 흔적

도선의 풍수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비보풍수(裨補風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비보풍수는 신라 말기 도선국사의 비보사탑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다. 신라 말기의 사회는 혼란과 분열이 극심하고 기근과 자연재해로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도선국사는 그 원인이 국토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지방 각지의 적절한 지점에 사탑을 설치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도선의 비보사탑설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에게도 영향을 주어 국토 운영의 원리로 수용되었으며, 신종 원년(1197)에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풍수지리적 결함이 있는 곳에는 성이나 제방을 쌓고 지맥을 손상하는 사탑 등은 파괴하도록 했다.(두산백과)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2조에 신설한 사원은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과 역()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 정해 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고 했다. 무분별하게 사탑을 건립하면 지덕이 손상돼 나라가 망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고려 말의 승려인 굉연(宏演)고려국사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을 저술하였다. 여기에 비보사탑설이 체계화돼 있다.

만약 사람이 병을 들면 곧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병이 낫는다. 산천의 병도 역시 그러하다. 이에 내가 지적한 곳에 불상을 세우고 부도를 세우는 일은 사람이 침을 놓고 뜸 뜨는 일과 같다. 이를 비보(裨補)라 한다.”

이처럼 기가 센 곳은 억누르고, 기가 약한 곳을 덧보태며, 기가 흘러갈 때는 연못을 만들어 기를 멈추게 하는 등 우리 국토를 인간과 동일시하였다. 이는 지구를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생명체로 바라보면서 지구가 생물에 의해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체임을 강조한 가이아이론(Gaiatheory)과 비슷하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모신(地母神)에 해당한다. 그러나 비보사탑설이 성행하고, 비보 사찰의 수가 증가하여 폐단이 생기자, 고려 말기에는 성리학을 수용한 신흥사대부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옥룡사지 동백숲
옥룡사지 동백숲

도선국사가 35년간 정주한 옥룡사에도 역시 비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바람을 막아 주는 아주 편안한 곳이다. 와혈(窩穴)로 바구니 모양이다. 이러한 명당에도 다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좌청룡(왼쪽)이 함몰되어 있고, 절터 앞으로 기가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백운산 정상의 정남방 7의 지점에 위치한 백계산(403m, 옥룡사지의 뒷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는 옥룡사(玉龍寺) 동백(冬柏)나무 숲(추산리 산35-1)2007년 천연기념물 제489호로 지정되었다. 이 동백림의 학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동백나무는 주로 남쪽 해안지대 또는 도서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해안이 아닌 내륙에 동백림이 형성된 것은 매우 희귀한 일로 약 7의 넓은 면적의 천연생 순림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도선국사의 비보를 위한 의도적인 식재가 아니면 불가능했으리라.

어려운 시기일수록 민중들은 이상세계에 대한 소망을 꿈꾼다. 도선의 풍수지리와 선()사상은 신라말 혼란한 시기에 민중의 갈망을 치유해 주었다. 그 당시의 지배 세력들은 그들의 사상적 기반으로 도선의 풍수지리와 선사상을 이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혼란스런 사회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희망으로 제시하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옥룡사지 동백나무 숲
옥룡사지 동백나무 숲

비보풍수가 적용된 화순 운주사

도선의 비보풍수가 적용된 사찰이 화순의 운주사이다. 운주사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 있는데, 이 산을 천불산(千佛山) 또는 영구산(靈龜山)이라 부른다. 천불탑이 있고, 뒷산이 거북이 형상이라 이렇게 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이곳은 경주 남산인 금오산과 매우 비슷하다. 경주 남산에도 올라가 보면 일반 민중과 같은 모양을 한 석불과 석탑이 즐비하다. 일종의 야외박물관이라 불릴 만하다. 운주사에도 경주 남산과 마찬가지로 90여 구의 부처님 불상과 20여 기의 석탑이 남아 있다.

필자가 1990년대 운주사에 간 일이 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잘 정비가 되어 있지 않고 부산 온천장에서 온 보살이 불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운주사에 대한 창건 기록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통일신라말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에 근거한 비보(裨補)사찰로 세웠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전해지고 있다. 인간 모양을 한 많은 불상과 불탑이 경주 남산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전남 화순에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화순 운주사
화순 운주사

도선은 한반도 지형을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보았다. 마치 한반도의 지형이 배가 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최완수가 지은 명찰순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나라 지형은 떠가는 배와 같으니 태백산, 금강산은 그 뱃머리요 월출산과 한라산은 그 배꼬리이다. 부안의 변산은 그 키이며 영남의 지리산은 그 삿대이고 능주의 운주는 그 뱃구레(船腹)이다. 배가 물 위에 뜨려면 물건으로 그 뱃구레를 눌러주고 앞뒤에 키와 삿대가 있어 그 가는 것을 제어해야 배가 솟구쳐 엎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다. 이에 사탑과 불상을 건립하여 그것을 진압하게 되었다. 특히 운주사 아래로 서리서리 구부러져 내려와 솟구친 곳에 따로 천불천탑을 설치해 놓은 것은 그것으로 뱃구레를 채우려는 것이고 금강산과 월출산에 더욱 정성을 들여 절을 지은 것도 그것으로써 머리와 꼬리를 무겁게 하려는 것이었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273호인 와형석조여래불이 있다. 도선국사가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고자 했으나 불사가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꼬끼오하고 닭소리를 내는 바람에 석수장이들이 모두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올라 가버려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누워서 남게 되었다고 전한다. 와불이 일어나는 날이 땅에 미륵불이 나타나거나, 서울로 바뀐다거나,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거나,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전해온다.

, 많은 석탑과 불상 가운데 운주사 9층 석탑은 보물 796호로 9층 석탑이 배의 돛대 역할을 한다고 전한다.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석탑으로 도선국사의 비보풍수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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