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동아시아의 의사소통, 필담(筆談)

한국, 중국, 일본 3국을 동아시아라고 한다. 동아시아 3국과 베트남은 서로의 말이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구한말까지는 각 나라의 사신들이 외교 사절로 가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했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가능할까? 물론 가능했다. 바로 필담(筆談)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은 서로 다르니 통할 리가 없다. 그런데 한자문화권에 있는 나라는 한문을 써서 서로 묻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이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사행사로 갔을 때의 필담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중국 사신을 수행하며 접대하던 임시 관직이 있었는데, 이를 접반사(接伴使)라 했다. 사신을 처음 맞이하는 직무의 특성상 예의와 문장이 뛰어나고 풍채가 좋은 인물로 선발됐다고 한다.

승정원일기인조 4년 병인(1626) 312(을묘)의 기록이다.

심액(沈詻)이 영접도감(迎接都監, 중국에서 오는 칙사(勅使)를 영접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관서) 낭청(郎廳, 비변사·오군영·균역청·준천사 등에 두었던 낭관)이 전하는 원접사(遠接使,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관직 또는 그 관원)의 뜻으로 아뢰기를 전부터 천사(天師, 제후국(諸侯國)에서 황제의 사자)가 우리나라의 서법(書法)을 보자고 요구할 때가 매우 많았던 까닭에 반드시 당대의 서법에 능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 규례입니다. 전라도 강진(康津)에 사는 유학 이빈(李彬)이 예서(隷書)에 능하므로 이전처럼 제술관(製述官)이라는 이름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그가 지금 먼 곳에 있으니, 말을 주고 재촉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올라오게 하도록 본도의 감사에게 파발마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傳敎, 임금의 명령)하였다.”

이 기록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알려 준다. 1626년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게 되었다. 영접도감 원접사는 명나라 사신들이 과거에도 서법(書法)을 보여달라는 요구가 많았으므로 예서에 능한 전라도 강진에 사는 이빈을 속히 올라오게 할 것을 임금에게 청한다. 이빈은 예서에 능하다고 전국에 소문났지만,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유생 신분이었다. 임금은 이빈을 역마(驛馬)에 태워 급히 상경시키라고 전라감사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면 이빈(李彬, 1597~1642)은 누구인가? 1626(인조4)에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접반사(接伴使)에 뽑혀 벼슬도 없는 시골 유생 신분으로 참여하여, 명나라 사신으로부터 신선 중에 한 사람이라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이빈은 이러한 경력을 가지고, 1627년 생원시, 진사시 양과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했다. 관직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까지 이르렀다가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옮겨진 뒤 불행하게도 향년 46세로 돌아가셨다.

지금은 글로벌(global) 시대라고 한다. 교통수단의 발달과 유비쿼터스(Ubiquitous)를 특징으로 하는 정보기술(BT)의 혁명으로 지구촌이 되었고, 온 세계가 개방화·국제화되었다. 옛날에는 어떠했을까?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과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면 다른 나라와 외교를 어떻게 했을까? 그나마 역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외교에 필요한 전문통역사를 양성하는 곳인 사역원(司譯院)이 있었고,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인 승문원(承文院)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외교적인 필요로 인해 한학(중국어), 몽학(몽고어), 왜학(일본어), 청학(여진어)을 하는 역관을 양성했다고 한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이경석(李景奭, 1595~1671) 등은 문신(文臣) 어전통사(御前通事)로 유명하다.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왕명을 전달한 것을 비롯해 중국 측 통관(通官)에게 왕이 중국 사신을 마중 나온다는 소식을 전하거나 명사에게 명 황제의 안부를 전언하는 것 등의 직무를 가졌다. 이들은 문관(文官) 출신이지만 한어[중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이 중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과는 대화 자체가 어려웠다. 실제로 중국에 가서 배워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는 한자라는 문어(文語)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사신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필담으로도 가능했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한문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글이 없었던 시대의 표기, 음차(音借)와 훈차(訓借)

한글은 1446년에 반포되었다. 그러면 그 이전 한반도에 글자가 없던 시대는 어떻게 했을까? 글자가 없을 때는 모든 것을 구전이나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정확한 전달이 힘들었을 것이다. 구전문학은 구연자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가 확대 재생산되어 그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문자를 바탕으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전달되는 기록문학은 이전의 구비문학과는 다르다. 기록문학이 생기면서 이를 읽게 되는 수용자 계층이 생기고 기록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정확성과 신빙성은 배가된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글자를 사용하였을까? , 기록은 언제부터 남겼을까? 우리 한반도에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기원전 2세기경 선진문명인 한자가 도입되었다. 글이 없을 때는 기록을 할 수 없지만, 글자가 전래 되면서 이를 이용해 지명과 인명 같은 것을 우리말식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자의 의미를 버리고 음만 빌려오는 경우인데, 이를 음차(音借)라고 한다. 또 하나는 반대로 한자의 음을 버리고 의미만 빌려오는 경우로 이를 훈차(訓借)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사곡 대실 마을은 1912(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왜정시대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는 사곡면(紗谷面) 죽곡리(竹谷里)라 하였다, 이 마을은 대나무가 많은 골짜기란 뜻이다. ‘이 한자로는 으로 쓰지만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다. 은 대 죽이고 은 실 곡이다. 순우리말인 대실을 적기 위해 한자로 적으면 竹谷이 되고 고대에는 이를 대실로 읽었을[훈독(訓讀)했을] 것이다. ,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자. 옥룡 율천리 율곡마을이 있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밤실이라고도 부른다. 밤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이므로 우리 글자가 없었던 시대에 한자로 옮기면 은 밤(나무) , 은 실(골짜기를 나타내는 순우리말) 곡을 써서 栗谷이 되었다. ‘대실과 마찬가지로 栗谷으로 적었지만 밤실로 훈독(訓讀)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몇몇 고유명사만 한자식 표기를 하다가 우리말의 어순에 맞추어 모든 표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가 향찰(鄕札)이다. 향가의 표기 방식인 향찰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의 형태와 의미 요소를 전면적으로 기록하는 표기 형태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은 관제를 정비하고 개혁하는 데 힘썼다. 757년에는 우리말로 된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꾸었으며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 이름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요즘 같으면 백성들이 한자를 전혀 모르지만, 도로 교통표지판을 한자식으로 바꾼 혁명적인 사건에 비유할 수 있다.

광양의 지명 변화, 마로(馬老)희양(晞陽)광양(光陽)

경덕왕이 관직명과 지명 등을 중국식으로 바꾸었으니, 광양이라는 지명 또한 예외가 아니다. 광양이라는 지명은 지금까지 마로(馬老)희양(晞陽)광양(光陽) 순으로 바뀌게 되는데, 광양시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광양의 지명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로 백제 마로현(馬老縣)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마로는 마루로 꼭대기, 으뜸이란 뜻이니 으뜸가는 고을이다. 신라 경덕왕 16년 서기 757년에 희양현(晞陽縣)으로 개칭된다. 는 밝을 희, 은 볕 양이므로 밝고 따뜻한 고을이란 뜻이다. 고려사 제57권의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23940년에 희양현(晞陽縣)을 광양현(光陽縣)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은 햇빛이고 ()은 남으로는 광양만을 접하고 북으로는 백운산을 가진 남수북산(南水北山)의 형국을 뜻한다. 이것은 땅이름에도 따뜻한 햇빛 고을’, ‘밝은 고을이라는 의미가 그대로 녹아 있다.

마로산성과 광양읍
마로산성과 광양읍

광양시지의 해석은 도선국사가 광양이 지구상에서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최고의 길지로 본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 당시 유럽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중국을 제일 크다고 생각했을지라도 동아시아에서 광양이 일조량이 제일 많다는 것은 지명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대 국어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해 왔는지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광양지역연구회 마로희양이은철 대표는 광양의 옛이름인 마로산성에 주목한다.

마로산성은 광양읍 용강리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테를 두르듯 둘러쌓은 테뫼식(머리띠식) 산성으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고 있고, 형태는 남·북측이 길쭉한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통일신라 때까지도 꾸준히 이용되어 왔고 임진왜란 때는 광양읍성 회복을 위해 왜군과 치열한 싸움을 한 곳이기도 한데 지리적으로 주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이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 550m, 성벽너비 5.5m, 외벽높이 3~5m, 내벽높이1~2m, 성내면적 18,945인데 현재 대부분이 허물어져 내린 상태이다. 산성 안에서는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다량의 기와류와 토기류를 비롯하여 흙으로 빚은 수통, 석환(전투용 주먹돌)등이 출토되었고, 「馬老」, 「官」, 「軍易官」등의 글자가 있는 기와를 발견했다. 광양의 옛 이름이 마로현으로 이 성은 마로현의 중요 행정관청이 있던 곳이었을 가능성과 행정관청을 방어하던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광양시지, 4, 238~239)

마로에 대한 그의 어원 분석은 탁월하다. 역사학자답게 고고학적 유물로 고증하며 논리적인 주장을 펼친다. 이은철 대표는 요즘도 행정관청이 있는 곳이 그 지방의 중심이듯이 옛날에도 행정관청이 있었던 곳이 광양의 중심지인데, 그곳이 마로라는 것이다. 옛날의 관청을 마루라 한 기록도 보인다. 제정일치 사회에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제단을 설치하고 통치자가 이를 주관하였기 때문이고, 외적의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에 관청이 높은 곳에 위치하면 좋다. 신라시대의 왕의 칭호인 마립간도 우두머리를 뜻한다. 산 정상을 마루라 하고, 신체의 맨 위에는 머리가 있으며, 마루의 사투리로 마리를 쓰는 지역도 많다. 마리, 머리, 마루는 그 어원이 같다. 맞춤법이 없고 문법 의식이 약하던 시대에는 머리와 마리를 같은 의미로 혼용해서 쓰는데 이를 음운상통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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