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배형과 고산 윤선도’ 학술세미나 개최
2년 2개월간 옥룡 추동마을서 유배 생활

조선시대 유배형과 고산 윤선도학술세미나가 지난달 26일 광양예술창고 복합문화공간에서 열렸다. 조선시대 유배형과 유배 생활, 광양 유배에 대한 기초 연구 등을 발표한 이 날 행사에는 해남윤씨 종친회와 시민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고산 윤선도 선생은 강직하고 올곧은 정치인이자 문학가, 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시조문학의 최고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의 문인들이 한문학의 틀에 갇혀 있을 때, 고산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낸 작품세계를 이뤄냈다. 고산의 시조(時調)에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사람·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학술세미나는 김경숙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부 교수의 조선시대 유배형과 유배 생활김미정 순천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의 광양 유배인물 연구이욱 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고산 윤선도의 광양 유배지와 유배생활3강좌로 구성됐다.

김경숙 교수는 조선시대 유배형은 유배살이 또는 귀양살이로 잘 알려져 있는 형벌로 죄인을

특정 지역으로 보내 사면령이 있지 않은 한 종신토록 유배지에서 강제적으로 살게하는 형벌이었다이는 조선시대 형벌의 근간이 되었던 오형(五刑) 체제에서 사형에 버금가는 매우 가혹한 형벌이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 조선시대 유배형은 유배인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는 이미지처럼 엄격하고 가혹하게 운영된 것은 아니고, 유배길이나 유배지 생활은 오히려 죄인인가 싶을 정도로 자율적이고 느슨하게 운영되고 있었다이 때문에 특히 정치적 문제로 유배길에 오르는 경우 죄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국왕과 중앙 정계에서 추방되고 단절됐다는 소외감과 좌절감, 유배살이 자체의 물리적 고통보다는 정치적 심리적 고통이 컸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미정 순천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은 “2023년 논문에서 광양 유배인수를 69명으로 발표했고,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서는 약 8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유배제도는 중앙과 지방의 지식 교류의 중심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지식확산과 교육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했다. 유배는 단지 정치적인 형벌 제도로서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미정 박사과정은 광양도 결코 적지 않은 조선의 명사들이 유배 생활을 했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 관한 연구와 더불어 광양지역과 연계해 유배가 갖는 사회적이고 문화사적 연구가 더 필요하다전통적으로는 주로 유배인들의 문학적 유산에 대해 논의하고 연구했으나, 이제는 다각적인 시각과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학문과 문화의 주요 인사들이 거쳐 가며 남긴 유산들을 발굴해 체계화하고, 현재의 광양인에게도 유배에 대한 적극적 이해와 자긍심을 고취해 우리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욱 교수는 윤선도의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적합한 평가는 숨김이 없이 정직하고, 위험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며, 상대방 뿐아니라 본인에게도 늘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며, 진실을 말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사람 즉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아어 “16642273차 유배지 삼수에서 이배 명을 받고 함경도 삼수를 출발해 6월 광양에 도착한 윤선도는 이때부터 1667721일 해배 될 때까지 22개월의 유배 기간 윤선도는 광양 옥룡에서 머물렀다윤이후는 윤선도 유배지의 지척, 이현일은 곁에 옥룡사가 있다고 한 것 등을 종합하면, 윤선도 유배지인 광양 옥룡동은 월파마을에서 15리 정도 떨어져 있고 옥룡사와 가까운 어딘 가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현재 윤선도 유배지로 알려져 있는 추동마을이 위치와 거리상 가장 근접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선도 선생은 조선 현종 6(1665)부터 현종 8(1667)까지 약 22개월간 광양 유배생활을 하며 삼가 하운하여 겸재의 고유한 서운에 바침(敬和呈謙齋靜案), 원운(元韻), 나경주의 만사(挽羅慶州), 하의흥의 만사(挽河義興), 사간 이연지의 시에 차운함(次李司諫延之韻)등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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