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조선시대의 강학 공간

조선시대는 반상이 구별되는 계급사회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인 조선 전기의 주인공은 사대부들이다. 사대부란 양반 관료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사()와 대부(大夫)가 합쳐진 말이다. ()계층이란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공부하거나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에 묻혀 속세와 거리를 두는 은일지사(隱逸之士)를 말한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에 사림파(士林派)들은 화를 입고 세력을 잃어 귀양을 가거나 지방으로 내려가 자연을 벗 삼아 풍류 생활을 했다.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산실이 된 곳이 누정이다. 누정이란 누각과 정자를 합친 말이다. 흔히 한국의 문화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누정의 문화를 이야기한다.

대부(大夫) 계층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들을 키워낸 곳이 강학의 공간이다. 강학하는 대표적인 곳이 향교와 서원, 서당인데,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교육기관에 해당한다. 오늘날 교육제도와 비교하면 향교는 그 지방의 최고 공립 교육기관에 해당하는데, 각 지역의 교촌, 교리, 교동은 향교가 있던 자리를 나타낸다. 서원은 지방의 최고 사립 교육기관이고, 성균관은 국립대학인 서울대쯤에 해당한다. 요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재들을 교육하면서 동시에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향촌의 지배 질서를 확립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서당은 마을이나 마을과 가까운 곳에 설립된 것으로 향교나 서원의 입학하기 전의 가장 기초적인 유학을 배우는 곳이다.

광양향교와 신재서원

일종의 공립 교육기관인 광양향교는 언제 생겼을까? 1397(태조6)에 완성됐다. 여기서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을 제사 지내면서 동시에 지방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광양향교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출입문인 풍화루로 구성돼 있다. 국가에서는 향교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학전(學田)과 각종 잡역을 담당하는 교노비를 내려주어 이를 운영하게 했다. 도유사(都有司)는 일종의 요즘 학교의 교장 선생님 격으로 향교 관리를 총괄했고, 장의(掌議)와 재임(齋任)은 향교의 행정·재정적 업무와 교육적 업무를 담당한다.

이에 반해 사립 교육기관은 서원과 서당이 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해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운영기구이다. 서원은 사림파의 세력 근거지가 되었고, 붕당에 가담하면서 많은 폐단을 만들었다. 결국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호남지방에서는 광주의 포충사, 장성의 필암서원, 정읍의 무성서원 등 3개만 남고 그 나머지는 철거되었다.

광양향교
광양향교

광양 지역에는 유일하게 신재서원(新齋書院)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발간한 광양군지에는 봉양서원(鳳陽書院)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신재서원은 우산리 향교 옆에 1577(선조 10)에서 1580(선조 23) 사이에 현감을 지낸 정숙남(鄭淑男)1578년에 건립했다. 이곳에서 광양 출신의 기묘명현이면서 대학자였던 최산두(崔山斗)와 역시 기묘명현이면서 중종 때에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朴世煦)를 향사했다. 신재서원은 1868(고종 5) 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해방 이후 1967년에 봉양사복설기성회가 조직되고 1977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겨 복설됐다.

백운산과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최산두

사림의 계보는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진다. 김굉필은 무오사화(1498)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김굉필은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는데, 제자로 키운 대표적 인물이 최산두와 조광조이다. 최산두(崔山斗, 1482~1536)는 한훤당 김굉필로부터 배운 후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사간원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1519(중종 14) 의정부 사인으로 근무할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한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지목되어 화순 동복(同福)으로 유배되었다.

이름이 산두인데, 이는 태산북두(泰山北斗)를 줄여 쓴 말이다. 태산북두는 태산과 북두칠성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뛰어난 인물을 비유하거나, 학문이나 예술 분야의 권위자나 대가를 이르는 말이다. 태산은 성산(聖山)으로 모두가 우러러보는 산이고, 북두는 모든 별의 중심인 북두칠성이다. 북두칠성은 큰곰자리의 탐랑[Dubhe], 거문[Merak], 녹존[Phecda], 문곡[Megrez], 염정[Alioth], 무곡[Mizar], 파군[Alkaid]이라는 일곱 개의 빛나는 별로, 우리나라 고인돌이나 벽화에도 그려져 있다. 이 별이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고, 소원을 이뤄준다고 믿는다. 최산두가 백운산과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서 산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학사대
학사대

또 학사대(學士臺)는 최산두와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옥룡면 동곡리 동동마을 앞 옥룡천 산경사면에 위치한 학사대는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동복(同福)에 유배되었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가 어린 시절 3년 동안 수학했던 자연 암굴이다. 이 암굴 내부는 사람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넓이이며,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자연수가 흘러나온다. 또한 이 암굴 상단 5m 지점의 암면에는 학사대(學士臺)’라는 자필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 학사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최산두가 3년을 계획하고 이곳에서 수학했는데 자신감이 생기고 지루하기도 하여 2년만에 굴을 나와 밖의 풍경을 보고 문득 외우기를 泰山壓後天無北(태산압후천무북, 태산이 뒤를 덮어 하늘에는 북쪽이 안 보이고)’이라 한 다음 이음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한 초동이 나타나 그의 시를 받아 大海當前地失南(대해당전지실남, 큰 바다가 눈앞에 있어 땅에는 남쪽이 없다)’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에 최산두는 자기의 부족함을 깨우치고 1년을 더 공부하고 나와서 성공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 암굴 바위 위에 5인이 앉을 만한 정각을 세우고 학사대(學士臺)라는 현판을 걸어두고 있다.”(광양시지, 3, 341~342)

최산두는 주자강목(朱子綱目)을 하루 100번씩 읽었다고 한다. 주자강목은 사마광(司馬光)자치통감294권을 주자(朱子)59권의 강목체로 정리한 책이다. 또 전설에 의하면 옥룡 학사대에서 열심히 학업을 닦는 신재공을 낮에는 호랑이가 지켜주고, 밤에는 이무기가 지켜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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