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광양 향사당과 우산공원의 유림정

국사편찬위원회 안영신 사료조사위원은 역대 광양 현감 중 선정을 베풀고 치적을 세운 인물로 문관으로는 박세후, 무관으로는 어영담을 꼽는다. 먼저 어영담(魚泳潭, 1532~1594)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도와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는 어영담이 물길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영담은 함안 사람으로 실제 돌산도에서 어부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물의 귀신이었다고 한다. 어영담을 임발영이 창고에 쌓인 곡식을 문제삼아 파직시켰는데, 김두 등 126명이 연서를 통해 개인의 착복이 아니라 내년에 쓸 종자이거나 구휼하기 위해 600석을 쌓아 놓은 것이라고 구명운동을 벌였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로 수군 조방장이 되어 큰 공을 세웠고, 1594년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다음으로 문관인 박세후(朴世煦, 1494~1550)에 대해 알아보자.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자는 중온(仲溫), 호는 인재(認齋) 또는 눌재(訥齋)이다. 박안의(朴安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미창(朴美昌)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 박사화(朴士華)이며, 어머니는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며, 처는 순흥안씨 공조판서 교지를 받은 안침(安琛)의 형인 안호(安瑚)의 따님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광양현감, 밀양부사,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516(중종 11) 진사가 되고, 151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사림이 일소되자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성균관전적에 등용되고, 1522년 박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됐다. 1527년 다시 박사로 복직되어 전적을 지내고 사헌부감찰로 승진됐다. 이듬해 광양현감이 되어 해상의 방위에 전념하고, 공자의 묘가 허술한 것을 보고 터를 닦아 묘우를 옮겨지었다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광양시지에 소개된 그의 치적을 살펴보자.

광양현감으로 재임 중(1528~1533) 치적을 문헌자료에 의거 살피면 해상방위에 전념하여 현의 남쪽에 위치한 주변루(籌邊樓)를 중건하고 광양 숲을 조성해 왜적의 해상침입에 대비했으며, 한편으로는 사마소(司馬所, 생원과 진사들이 참여하는 향촌 기구)를 개장해 고을 선비들에게 학업을 권장하여 많은 문사(文士)를 배출했으며 특히 향사당(鄕射堂)을 건립해 고을 선비들에게 예악덕행(禮樂德行)을 세우고 궁도(弓道)를 연마케 했다”(2, 232)

이 기록으로 보면 광양의 향사당은 박세후가 광양현감 재임 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으로 향사당이 있었는데,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를 감찰하며 민의를 대변했다고 한다. 따라서 향사당은 고을마다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그 가운데 1975년에 제주도의 향사당이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고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봄과 가을 두 차례 모임을 갖고 활쏘기와 함께 주연을 베풀며 고을의 당면 과제를 의논하거나 민심의 동향을 살피던 곳이다. 향사당의 임원으로는 좌수 1인과 별감 3인이 있었으며, 이후 지방의 자치기관인 향청(鄕廳)의 기능을 갖게 되면서 고을 주민들의 여러 가지 일을 자치적으로 의논하여 처리하기도 했다. 향사당은 처음에는 유향소(留鄕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1475(성종 6) 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예악과 덕행을 세우는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유향소라는 뜻으로 향사당(鄕射堂)이라 개칭했다. ()는 공자가 확상(矍相, 땅이름)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어진 이를 얻는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옛날 어진 임금들이 몸소 인의를 실행하여 백성을 인도한 것을 모방한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광양에도 박세후 현감이 건립한 향사당이 있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도 이에 대한 기록을 광양시지에서 찾았다. 광양읍 구산리 135-1 우산공원 내에 있는 유림정(柳林亭)이 그것이다.

광양읍 목성리 신성마을에 있었던 유림정은 단층 팔작지붕 목조가옥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재실형 건물로 우측 후방의 1칸에만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마루를 깔았다. 사대(射臺)의 정자였다. 사장(射場)은 원래 1528년 박세후(朴世煦) 현감이 현재 읍사무소 북쪽에 향사당(鄕射堂)을 건립해 궁술을 연마한 것이 시초이며 그 이후 1905년에 광양읍 단위농협 창고자리에 남사장(南射場), 1907년경에 광양읍 칠성리 호북마을(칠성리 178-1로 추정)에 북사장(北射場)이 건립됐으며 1917년 그곳 사장이 통합되어 유당공원 북쪽으로 옮기면서 유림정(柳林亭)이라 칭했다. 1943년 당시 이문화(李文華) 사두가 부지를 기증해 유당공원 남쪽으로 옮기었으며, 19971220일에 유림정을 유당공원에서 광양읍 구산리 135-1번지의 우산공원 내로 옮기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광양시지, 3, 340~341)

우산공원 내 유림정
우산공원 내 유림정

이준의 한시, 향사당(鄕社堂)

, 광양의 향사당(鄕社堂)을 소재로 한 시도 찾았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래정유고(歸來亭遺稿, 청구기호 : 3648-62-254-134)17면에 나온다. 앞에서 향사당(鄕射堂)을 언급했는데, 향사당(鄕射堂)과 향사당(鄕社堂)은 같은 명칭임을 알 수 있다.

향사당(鄕射堂)은 당초 가락천 서쪽에 있었으나 1691(숙종 17) 판관 김동(金凍)이 현 위치로 옮겨지었고, 1797(정조 21)에 방어사 유사모(柳師模)가 건물의 명칭을 향사당(鄕社堂)으로 고쳐 편액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뿐만 아니라 향사당(鄕射堂)이라는 명칭은 향사당(鄕社堂향서당(鄕序堂집헌당(執憲堂풍헌당(風憲堂향헌당(鄕憲堂회로당(會老堂) 등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이준(李浚, 1579~1645)은 광해군·인조 때 광양시 진월면 구포(鳩浦, 현 신구리 일대)에 거주하다 의주부윤까지 현달하신 분이다. 인조 7(1627, 49)은 정묘호란이 일어난 해이다. 이준은 겨울에 양남의 군적사무로 왕명을 받들었는데, 칠곡을 거쳐 광양에 도착했다. 이때 향사당(鄕社堂)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는다.(到光陽題詩鄕社堂曰)

고향을 떠나 천릿길의 객이
십 년이 되어 지금 비로소 돌아오네.
산과 강은 옛날 모습으로 오늘도 변함이 없는데
사람의 일은 이전의 시간과 다르네.

백발의 내 동년배들은
장부들은 지난해 아이였는데,
서로 만나 서로 알지 못하고
이가 누구인가 도리어 물어보네.

千里離鄕客
十年今始歸
山河依舊日
人事異前時

白髮吾儕輩
丈夫去歲兒
相逢不相識
却問是阿誰

십 년 동안 벼슬길을 떠돌다가 다시 고향에 오니 자연은 변함이 없는데, 친구들은 백발이 되었고, 고향 친구들은 성장하여 대장부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자연은 변함이 없는데 인간은 변화를 겪는다. 변화된 모습을 보고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몰라 오히려 되묻게 된다. 자연의 변화 없음과 인간의 변화 있음을 대조하여 인생무상과 벼슬길의 덧없음을 잘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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