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

평양은 많은 사신이 왕래하며 머문 곳이었다. 따라서 연회(宴會)가 베풀어지기 일쑤였고, 이와 관련된 그림이나 시가 등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대동강가의 연광정에는 고금의 많은 시인·묵객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중국 사신들이 오면 다른 시들은 모두 떼어내고 정지상의 송인(送人)만 걸어두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송인(送人)은 우리나라 이별시의 백미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나라 때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왔다가 연광정에 올라 큰 소리로 장쾌하다고 부르짖고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는 여섯 글자를 제 손으로 쓰고 현판(懸板)을 만들어 걸었다. 정축년(丁丑年)에 청()나라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던 날에 이 현판을 보고 중원(中原, 중국)에 금릉(金陵)과 절강(浙江)이 있는데 여기가 어찌 제일이 될 수 있겠는가하고 사람을 시켜 그 현판을 부수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 글씨가 좋음을 아까워하여 천하(天下) 두 글자만 톱질해 없애 버리도록 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유홍준 교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언급됐다.

연광정에는 이런저런 현판과 주련(柱聯)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거기엔 김황원(金黃元)의 미완성 시구도 있고, 군말 없이 제일누대(第一樓臺)’라고 쓴 것도 있다. 그중 눈길이 가는 사연 깊은 현판은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었다. <중략> 그래서 한동안 제일강산이라고 붙어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누가 다시 천하두 글자를 새겨 넣어 지금은 또다시 천하제일강산이 걸려 있다. 그래서 천하두 글자는 글씨체가 약간 다른 것을 단박 알 수 있다.

조선의 3대 누각, 평양 부벽루

조선 사대부의 문화를 누정(樓亭)의 문화라 한다. 누정이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사방을 볼 수 있도록 다락식으로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만든 건축물을 가리킨다. 주로 아름다운 경치를 조망할 수 있어 유람이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된다. 부벽루는 북한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조선후기에 중건된 팔작지붕 형태의 누정이다.

부벽루(浮碧樓)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누정으로 꼽힌다. 부벽루에 올라서면 청류벽 아래 유유히 흐르는 맑은 대동강물과 강 건너로 펼쳐진 들판, 멀리 크고 작은 산들이 보이는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외부에서 본 부벽루는 비단 자락을 펼쳐 놓은 듯한 맑고 푸른 물과 푸르른 녹음,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이러한 풍광을 보고 고려시대의 유명한 시인 김황원(金黃元)은 시심(詩心)을 일으켜 장성일면용용수 대야동두점점산(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이라는 시를 지었지만, 이 글귀 뒤로 더 이상의 시구가 떠오르지 않자 통곡하며 붓대를 꺾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부벽루는 낮 경치도 좋지만 밝은 달이 뜬 밤 경치도 아름다워 부벽완월(浮壁玩月, 부벽루의 달구경)’은 일찍부터 평양 8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가 서산마루에 지고 밝은 달이 휘영청 하늘 높이 떠오른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곳의 풍광은 고금(古今)의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황홀함을 느끼게 해 주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해동 제일의 문장가인 김황원이 붓을 던지고 통곡했다는 곳이다.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한시 부벽루(浮碧樓)또한 매우 유명하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래정유고(歸來亭遺稿, 청구기호 : 3648-62-254-134)30면을 보자.

부벽루의 달 밝은 밤에
대동강의 물결이 고요하네.
단소 소리와 함께 어부의 노래가 들리고,
괴롭지만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月明浮碧夜
波靜浿江濱
漁歌與短笛
偏惱未歸人

귀래공 이준(李浚) 또한 인조 18년 경진(庚辰 1640, 62) 평양(平壤) 부벽루(浮碧樓)에 도착하여 시를 지었다. 고요한 달밤에 대동강 물결이 은빛으로 일렁이는 가운데 어부의 노랫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돌아올 수 없다. 부벽루에서 느낀 괴로움 즉, 인생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나타난 이준의 산성제야(山城除夜)

다음으로 희양문헌집에 실린 산성제야(山城除夜)에 대해 알아보자.

검산산성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에
관서 지방에서 나그네 되어 몇 해가 되었던가?
객사의 차가운 등불에 시름을 이기지 못하네.
천리 고향의 소식은 끊어지고
자정이 지난 이 밤에 눈물만 흐르네.

붓을 놓아버린 올해 몸은 이미 병들고
적을 섬멸하려는 오늘의 굳센 의지는 누구를 향할 것인가?
다른 해에 혹시라도 전원의 즐거움을 얻는다면
덧없는 세상에 실속 없는 공명은 누구를 위해 구했던 것인지?

산성제야(山城除夜)

爲客西關問幾秋
寒燈旅館不勝愁
故鄕千里音書斷
此夜三更淚自流

投筆當年身己誤
枕戈今日向誰尢
他年倘得田園樂
浮世虛名孰肯求

검산산성(劍山山城)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 밤[除夜]에 지은 시로 칠언율시이다. 고향을 떠나 먼 관서 지방에서 오랑캐가 융성하여 날로 강성해 가는 상황에 국방의 최전선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밤을 맞이한다. 나이도 연로하여 몸은 병들어 있다. 침과(枕戈)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창을 베고 잔다는 말이다. 변방에 나와서 나라를 생각하는 외로운 신하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잘 나타나는 시어이다. 공명을 쫓아 벼슬길에 나섰지만 자정이 넘어 변방의 차가운 등불을 보니 비애만 켜져 간다. 전원(고향)으로 돌아가 자연에 파묻혀 안빈낙도(安貧樂道)하고자 하는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광양시 골약동(骨若洞) 중군리(中軍里) 군재(軍才)마을 뒷산에는 이준의 부모와 자신의 묘가 묻혀 있었다. 이준이 강진군 성전면 금당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광양으로 이거를 하였고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사건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구포(鳩浦, 현 진월면 신구리 일대)에 귀래정을 짓기 전까지는 이 마을에 살면서 광양향교를 드나든 것으로 추측된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이 일어나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변방에서 소임을 다한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가시기 전까지 진월면 구포에 살았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장례 물품을 청나라 것으로 쓰지 말 것과 선산 곁에 묻지 말라고 유언했다. 후에 월포면(현 진월면) 늑포(勒浦, 예전에 걸망개라 불렀다.)에 있던 이준의 묘를 군재마을 뒷산 부모 묘소 곁으로 이장했다. 현재는 광양항 매립공사로 인해 토취장 허가가 나면서 묘를 진월면 월길리 가길 마을로 이장했다.

군재마을

군장마을과 재동마을이 합쳐진 군재마을은 평평한 땅에 있는 마을이 아니라 골약에서는 고도가 높은 산의 비탈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군장이 마을은 군쟁이라고도 하는데, 재동 동북쪽에 있다. 근처에 장군이 앉아 있는 장군대좌혈(將軍對座穴)의 명당이 있다고 전한다. 군장마을에서 옥곡 사그점(오류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사그점재라 한다. 원래 군장 마을의 원래 터는 안터라는 곳이다. 마을 뒤 북쪽 가야산에서 뻗어 내린 산등성이에 의해 생긴 골짜기를 사기골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서 사기그릇을 구웠기 때문에 이곳 주변을 파면 사기그릇 파편이 나온다고 한다. 사기골의 안쪽에 위치한 골짜기가 안터로 옛날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기에는 지금도 사기를 굽는 흙인 백토가 많이 나온다.
 

군장마을
군장마을
과 재동마을
재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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