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차원이 다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할 것이며,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나 정신병자 취급을 할 것이다. 물론 필자가 이야기하는 바가 정답은 아니다. 단지 이해의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해서 이 글을 쓴다. 201371일 자 ○○일보 유명한 칼럼에 소개된 적이 있다.

“25년 넘게 전국의 혈() 자리를 발로 밟아본 풍수 전문가 정택민(鄭澤玟·49)이 필자에게 그 비급(祕笈)을 털어놓았다. 기원전 10세기부터 서기 1세기 무렵에 걸쳐 만들어진 고인돌들이 놓여 있는 위치가 바로 생기가 올라오는 지점들이라는 것이다. 그 무거운 고인돌을 아무 데나 놓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은 언양지석묘라고 불리는 울산 언양읍 서부리에 있는 고인돌이다. 9m30×6m70에다 높이가 4m에 달한다. 대략 500t의 무게이다. 돌이 크면 클수록 그 자리에서 올라오는 생기의 구멍, 즉 혈() 자리도 비례해서 크다는 것이 정 도사의 주장이다. 여수 왕바위재 고인돌은 250t가량인데, 그 혈의 형태에 맞추어 고인돌의 모양을 쪼아 놓았다.([00 살롱] [893] 풍수(風水) 변천사)”

우리나라 유명한 동양학자가 풍수 전문가인 정도사를 소개한 글이다. 운공(運空) 정도사는 혈처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염력을 지녔다. 이에 반하여 일반인들은 신통력을 갖지 못한다. 신통력을 갖기 위해서는 천문 육통(六通)이 열리거나 일정한 통과제의를 거쳐야 한다. 샤머니즘을 예로 들어 보자. 세습무(世襲巫)와는 다르지만, 보통 강신무가 되기 위해서는 무병을 앓고 내림굿이라는 입사식(入社式, initiation ceremony)을 거쳐야 만신(萬神)이 될 수 있다. 만신(萬神)이 되면 신의 뜻을 알아내는 특별한 방법과 능력을 지니게 되어, 일반인들은 갖지 못하는 색다른 능력을 지니게 된다.

지금은 과학 만능의 시대가 되었다. 과학을 빼놓고 이야기하면 다 미신으로, 비과학적이고 원시적 사고로 치부하기가 일쑤다. 물론 과학을 폄훼하려고 쓰는 글은 아니다. 과학의 시대가 전개된 것은 인류 역사상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흔히 중세를 종교의 시대라 한다. 그때는 신 중심의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콜럼버스(Columbus)가 신대륙을 발견한. 그리고 종교 개혁 일어나 가톨릭의 절대적 권위가 추락한다. 이제야 근대의 여명(黎明)이 밝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신에서 인간으로 중심이 이동되어, 인간의 이성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자 과학기술의 발전하고, 산업화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제는 과학지식과 테크놀러지(technology)가 전 지구를 장악해 버렸다. 다시 말해 과거의 종교가 누렸던 영광을 과학이 대신 누리는 상황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추구하는 종교의 역할을 우주항공기술(ST)과 생명공학기술(BT), 의료기술이 맡고 있다. 생명과 우주를 창조했던 신에게 맡게 두었던 신비로운 영역을 가감 없이 밝히고 낱낱이 파헤쳐 버린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날 아무리 과학 지상주의 시대일지라도 과연 종교가 종말을 다한 것일까 반문하고 싶다.

흔히 신 중심의 시대는 과학과 달리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인류가 이성적 사고가 이뤄지면서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며 근대가 시작되었다. 원시적 사고는 추상화가 되고, 직관보다는 이성에 의한 증명의 정신이 그 원천이 된 것이다. 이제, 종교적 권위나 정치적 권력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증명을 통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수긍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인 사고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철학적·연역적 사고를 이루지 못하면 그것은 원시적 사유 체계일 뿐이다. ()·()·()이 미분화된 상태의 원시종합예술(Ballad Dance)이 노래, 무용, 음악으로 각기 나누어 발전했듯이, 학문도 고대에는 분할되지 않고 통합돼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의 연쇄(連鎖)를 보여주는 기하학인 수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였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였던 것은 아직 학문도 미분화된 상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직관을 뛰어넘는 이성을 갖게 된 인류는 증명의 정신을 통해 중세를 넘어서서 근대 과학의 시대라는 여명을 보게 되었다.

과학적 세계관은 결정론적 인과율에 기초하고 있다. 어떤 결과는 반드시 원인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본질을 찾기 위해 물질을 쪼개기 시작하였다. 이런 것을 환원주의(還元主義, reductionism)라고 한다. 물질의 궁극적 단위인 분자, 원자, 소립자, 쿼크(Quark)까지 밝혀냈다. 그런데 아무리 잘게 쪼갠 물질의 최소 입자를 다시 합친다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 지금까지 물질의 근본이 무엇인가 탐구해 봐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고 환경 문제들이 일어나고 지구의 모순만 증가한다. 그래서 방향 전환을 한 것이 신과학운동이다. 하나의 유기체에 관심을 갖고, 부분보다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주목하게 되었다. 인류는 전지구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생태학적 세계관을 지향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

쿼크 이론 이후에 연구에 의하면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가 입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는 끈(superstring)이라고 본다. 이러한 초끈이론을 소개한 책이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엘러건트 유니버스이다.

폭이 수백 미터쯤 되는 계곡을 가로질러 수도용 호스가 이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은 약 500m가량 떨어진 곳에서 연결된 호스를 바라보고 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길게 연결된 호스가 보이겠지만 당신의 눈에는 그것이 수도용 호스가 아니라 가느다란 끈처럼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호스의 굵기가 인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개미 한 마리가 이 호스 위를 기어가고 있다면,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에서 볼 때 개미가 이동할 수 있는 방향은 호스를 따라 나 있는 좌-우 방향뿐이다. 당신에게는 호스의 굵기가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당신의 눈에 보이는 호스는 ‘1차원적 물체인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당신에게 개미의 현재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했다면, 당신은 오로지 한 개의 좌표만을 명시하면 그만이다. , 호스의 왼쪽(또는 오른쪽) 끝에서 개미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면, 개미의 위치는 유일하게 결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호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의 이야기다. 멀리서 바라본 호스는 1차원적 물체로 보이기 때문에 좌표 하나만으로도 정확한 위치를 정의할 수 있다.”(284, 285)

우주 공간이 3차원 이상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가늘고 기다란 호스를 예로 든 이야기이다. 가늘고 긴 호스에서도 넓은 영역으로 뻗어 있어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차원과, 좁은 영역 속에 감겨 있어 쉽게 감지되지 않는 차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차원 인식에 대한 매우 중요한 속성을 보여준다.

보통 지구에서 시·공간은 자신이 경험했던 인식과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호스의 굵기를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차원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과학적으로 다 해결할 수 있고, 이를 과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필자는 어렵다고 본다. 과학적인 것을 우상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종교적으로 치유할 수도 있고, 문학·예술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상상력도 한몫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1884년 소설가 에드윈 애벗(Edwin Abbott)이 쓴 평평한 세계(Flatland)가 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2차원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을 점과 선 등 2차원으로만 인식한다. 이곳에는 폭과 길이만 있고, 평면적인 일만 할 수 있다. 물론 이곳은 왼쪽, 오른쪽, 앞과 뒤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여기에 사과가 놀러 왔다. 이 사과를 평면국에서는 입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평면국 사람들은 높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위, 아래의 개념이 없다. 오로지 평면국 사람들은 사과를 점과 선으로만 인식할 것이다. 3차원 생물은 2차원의 평면국에서 처음에는 작은 점으로 보이다가, 그 점이 점차 커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결국에 가서는 원 비슷한 모양으로 인식될 것이다. 만약 높이를 발견한 어떤 선구자가 있어, 이를 아무리 이해시키려고 해도 평면국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 선구자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감옥에 갇힐 확률이 매우 높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도 이 부분에 주목하였다.

하루는 사과처럼 생긴 3차원 생물이 이 납작이나라[평면국]로 와서 그 위를 떠다녔다. 인상이 좋아 보이는 한 납작이가 납작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3차원 생물은 차원 간 선린(善隣)’을 돈독히 할 목적에서 그에게 인사를 건네기로 작심했다. 사과가 3차원에서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했다. “소생은 3차원의 세계에서 온 방문객입니다.” 가없는 납작이는 문이 닫혀 있는 자신의 집안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목소리가 자기 몸 안에 들리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그는 과감하게 자신을 타일렀다. ‘아무래도 우리 집안에 정신병 병력이 있는가 보군!’ 자기를 환각 증세로밖에 알아주지 않자 분이 난 사과는 3차원에서 내려와 납작이나라로 들어갔다. (코스모스(2004), 428)

가로, 세로, 높이가 존재하는 세상이 우리 지구이다. 여기에는 물리학적 법칙들이 존재한다. 뉴턴, 갈릴레이 등의 학자들이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Einstein)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지구로 한정되었던 인식을 우주로 확장시켰고, 가로, 세로, 높이라는 기존의 3차원에서 하나의 축을 더 설정한다. 시간의 차원인 4차원으로 세계로 본 것이다. 이로써 기존의 인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시공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상대적이라고 재해석하여 뉴턴의 고전물리학과는 다른 접근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 이 우주는 몇 차원으로 존재할까? 2차원, 3차원, 4차원……. 필자는 아직도 몇 차원까지 있는 줄 모르겠다. 내가 어디로 간다고 할지라도 공간을 이루고 있는 좌우, 상하, 전후가 선택될 뿐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아인슈타인처럼 3차원의 공간에 과거·미래인 시간을 덧붙여 4차원이라는 시공간으로 본다면 더 폭넓은 진리와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만큼 인식의 차원이 확장된다면 인간의 안목과 미래에 대한 예측을 더 정교하게 해 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현대의 초끈이론과 같은 이론물리학에서는 10차원의 세계도 입증했다고 한다.

한 번씩 신안(神眼)을 가진 사람들을 본다.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무튼 과학의 눈으로 봐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종교적 현상을 과학적 현상으로 이해하면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이분들이 기존의 3차원에 하나를 더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적인 축()을 갖고 있다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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