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의 늑포(勒浦)

기밀록(機密錄)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東五十里勒浦 天馬嘶風形 龍遠虎近 左有卓旗 右有大江 小溪合流 三陽多峰 世世登榮(9)

(현의) 동쪽 50리 늑포에 천마가 바람을 가르며 울부짖는 형국이 있다. 용은 멀고 범은 가깝다. 왼쪽에 탁자의 깃발이 있고, 오른쪽에 큰 강이 있다. 적은 냇물이 합류하고 삼양에 봉우리가 많으니 대대로 영화에 오른다.

늑포(勒浦)가 어디일까?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주위의 사람들과 연로하신 분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분이 없다. 진월면 구동마을에서 재를 넘으면 금동마을이다.

구동마을 처음 이름은 구량포(仇良浦)인데 포()즉 포구를 뜻하는 말이므로 구량(仇良)이 고유의 마을 이름이다. 이 말은 주민들이 부르는 구러개·구로개에서 연유된 지명으로 마을 지형이 굴레()’같이 생겼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굴러개구러개구로개로 변화되었는데 굴레 같은 모습을 한 마을에 위치한 포구를 뜻하는데 이를 한문식으로 음차(音借)하여 구량포(仇良浦)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광양시지, 4, 871)

그런데, 늑포(勒浦)를 소개하는 기밀록의 맨 아래에 월포(月浦)라고 적혀 있으니, 아무튼 늑포(勒浦)’는 월포 지역과 관련된 곳임은 분명하다. 구동마을이나 금동마을은 예전에 월포면(月浦面)에 소속된 곳이니, 현 진월면 오사리, 신구리, 송금리, 월길리의 어디쯤일 것이다. 지명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일단 풍수지리상 말과 관련된 마을인데, 섬진강과 인접하는 어디쯤일 것이라 추정된다.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은 말[] 명당에 해당한다.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으로 첫손을 꼽는 곳이 조선의 8대 명당에 해당하는 순창 마흘리 김극뉴의 묘이다. 천마는 기가 콧구멍에 응집되었다고 하니 천마의 콧구멍에 해당하는 곳이 진혈처이다. 용어 그대로 시풍형(嘶風形), 울시·바람풍이니 천마가 히잉거리며 바람을 가르고 우렁차게 우는 형국에 해당한다. 훌륭한 장수에게는 오추마(烏騅馬, 항우가 탔던 말 이름)가 필요하고, 깃발을 꽂아 놓은 모양의 사()를 좌우에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주위에 오사리 오추마을과 깃대봉이 있고, 오른쪽에는 섬진강이 흐른다. 적은 냇물이 합류한다고 했는데, 금동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가는골또는 갓골이 있었다고 한다. 저수지 위쪽에 있는 폭이 가늘고 긴 골짜기로 송금리 공동묘지 옆이 된다고 한다. , 갓골에서 금동마을 쪽 골짜기를 맹갓골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 깃대봉은 갓골 산정에 있는 산봉우리로 일제강점기 이곳을 측량 기점으로 삼았다는 곳이다. 삼양다봉(三陽多峰)은 무엇인가? 삼양(三陽)이란 풍수지리에서 내양(內陽, 묘 앞에 물이 모이는 곳), 중양(中陽, 묘의 맞은편에 있는 안산(案山)), 외양(外陽, 묘 앞의 안산 바깥쪽에 있는 산)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흔히 명당을 삼양이라 한다. 주위에 남산(45.1m), 할미봉(177.5), 삼봉산(299), 깃대봉(414.9), 국사봉(447.2) 등의 봉우리가 많다. , 금동마을 뒤에는 장군바위가 두 개나 있고, 걸망개터에 은포정(광양시지, 4, 880쪽 걸망개터 사진이 수록되어 있음)과 예전에 사람이 살았던 집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은포정도 필자의 관심을 끄는 곳인데, 연구해 볼 가치가 큰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제 늑포(勒浦)는 진월면 금동마을 앞 수문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금동마을
금동마을

다음의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늑포(勒浦)의 순우리말은 걸망개이다.

마을 본래 이름인 거을망포(巨乙亡浦)는 마을 지형에 연유하여 붙인 이름으로 이 지역이걸채(걸개)’ 즉 말안장에 해당되는 걸망모습인 것에 착안해 앞에 포구가 있어 걸망개라 했는데, 이를 한문식으로 음차(音借)거을망포(巨乙亡浦)’라 했다고 생각된다. 그 이후 마을 이름을 두 글자로 제한하면서 금동(琴洞)’으로 바뀌어졌는데 거을망을 한문식으로 쓰면서 음이 비슷한 거문고로 음차(音借)되어 거문고 금()’하여 금동(琴洞)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주민들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마을 앞에 조그마한 산을 똥메똥이라 하는데 이곳 산세가 거문고형이라 금동(琴洞)이라 했다고 하며, 320년 전 거문고를 잘 타던 이 마을 이천서씨의 거문고 가락에 착안해 ()’자를 이름하였다고도 전한다. 이 마을 관할구역 내에는 옛날 마현리(馬峴里)란 마을이 있었는데 즉 금동마을 남쪽에서 왼고개로 가면 몰(, )처럼 생긴 지형인 몰고개란 특정 지명이 있는데 이는 마현리의 마현(馬峴)과 똑같은 의미를 갖는 지명으로 과거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주민들이 살았다.(광양시지. 4, 876)

이상을 종합해 보면 금동마을의 원래 이름은 걸망개, 거을망포(巨乙亡浦)였다. 이곳은 섬진강 물가로 지형이 휘어서 말안장의 걸채처럼 굽은 곳으로, 마을 앞에 개()가 있었다. 다시 말해 말의 형국인 옛 마현(馬峴)마을 밑으로, 말안장의 걸채 형국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을 걸망개로 부르고, 한자식 지명으로 늑포(勒浦)’라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금동마을에서 구동마을로 가는 큰 재가 있었는데, 이를 마을 사람들은 사투리로 엔곡재라 한다. 금동마을의 왼쪽에 있는 고개라는 이름인 왼고개가 와전(訛傳)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포장된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공동묘지 아래쪽으로 2호 국도가 관통한다. 지금은 도로가 발달해 옛날의 수운 교통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자 지역민들에게 늑포라는 지명이 묻혀 사라져 거의 잊힌 것으로 보인다.

복룡농주형(伏龍弄珠形)과 용무정(龍舞亭)

요즘 가장 핫(hot)한 곳이 섬진강변이다. 고도의 경제성장 시대를 넘어서, 이제 삶의 질을 강조한다. 강 주변의 경치는 힐링(healing)의 최적 장소를 제공해 준다. 지리산과 백운산이 섬진강을 만나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뛰어난 지세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산수의 경치가 맑고 아름답다. 장경(葬經)에 나오는 계수즉지(界水則止)’가 있다. 생기(生氣)가 용맥(龍脈)을 따라 흐르다가 수계(水界)를 만나면 멈춘다는 말이다. 이곳도 백운산과 지리산이 섬진강을 만나서 기의 흐름이 멈추게 된 곳이다. 따라서 섬진강 근처는 기가 멈추어 혈()이 맺힌 길지에 해당한다.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조선의 풍수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천지의 정기(精氣)가 모였다가 생기를 발하는 곳이며, 풍광명미(風光明媚)해 상탄(賞歎)해 마지않을 만한 형승(形勝)의 땅이며, 영초이수(靈草異獸)가 나타나는 곳이며, 생활의 발달 신장을 축복할 만한 땅이다. 그리고 대석(大石)을 사우(四隅, 네 구석)에 두면 재이(災異)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섬진강 양안으로 광양시와 하동군이 인접해 경계를 이룬다. 세계 4대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발생했고, 세계의 주요 대도시들은 강을 품고 있다. 과거 육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는 수운 교통이 주요 교역의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섬진강 하류 지역은 강을 품은 것이 아니라 강으로 나누어 동서 갈등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곳이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눠지지 않았다면 섬진강 포구를 중심으로 대도시가 생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물물교환 장소였던 화개장터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영·호남 화합의 상징적인 장소가 된 것처럼 보인다.

섬진강과 다압면
섬진강과 다압면

우리나라에서 칠레처럼 가장 길이가 긴 면이 다압면이라고 한다. 다압면은 백운산이 섬진강을 만나 멈춘 곳이다. 장장 섬진강 따라 남북으로 28Km나 된다. 예전에는 다사마을의 섬진강 건너편이 지금의 하동읍 화심리 만지마을인데 광양 땅인 다압면 섬진리에 속하였다. , 그 아래 두치진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곳을 비입지(飛入地) 또는 월경지(越境地)라 한다. 19141222조선총독부령(173)에 의해 광양군 섬진강 동쪽의 다압면 섬진리 일부 두치진(豆恥津)을 경상남도 하동군에 넘겨주고, 섬진강 서쪽의 섬진리 잔여 지역은 다압면 도사리(道士里) 지역에 편입시켜 정리했다.

하동읍 두치진과 만지마을의 약간 위가 호암마을과 흥룡마을로 대길지이다. 명당은 장풍득수(藏風得水)와 제화초복(除禍招福)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이 마을은 용이 여의주를 물고 강을 건너는 청룡도강형(靑龍渡江形)에 자리 잡았다. 여의주를 문 용두는 섬진강 건너 섬진마을과 다사마을 경계 뒤쪽 제일 높은 산인 쫓비산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지명도 용이 흥한다는 흥룡이다. 청룡도강형을 달리 표현한 말이 흥룡도강형이다. 흥룡의 맞은편은 용이 춤춘다는 다압의 용무정(龍舞亭)마을과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요충지였던 섬진마을이 있다. 자연 마을인 용무정(龍舞亭)마을에는 전에 용소라는 소(, 연못)가 있었다고 한다. 용소 전설은 다음과 같다. 구술자는 김택곤(1902년생, (), 다압면 금촌리)이고, 1983년에 채록한 것이다.

옛적에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디 질()은 험허고 밤이 짚()어 인가를 찾을라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질을 못찾꼬 밤은 어둔지라 보니 바구(바위)가 큰 것이 있는기라. 그 바구가 용소바구라. 한잠 자는디 꿈에 그 바구신인 큰 용이 나와서 그 바구를 지나간시롬(지나가면서) 그 아래에 있는 꼬랑댕이(꼬리)로 둑을 무너띠리고(무너뜨리고) 지나자 둑이 둥둥 떠나가는 기라. 그러면서 그 용이 선비에게 과거시험 문제를 가르쳐주는 기라. 그리하야 그 선비가 과거에 급제했다 해서 용소(龍沼) 또는 용무쟁(용무정(龍舞亭))이라 허지.(광양시지, 3, 663)

, 다사마을 남쪽에서 진상면 어치리로 가는 고개 부근에는 용신암(현재 각심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지명들은 이곳이 흥룡도강형이라는 증거가 된다. 흥룡도강형이나 복룡농주형(伏龍弄珠刑局)은 같은 용어이다. 복룡농주형(伏龍弄珠刑局)이란 숨어 있는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이란 뜻이다. 이는 기밀록(機密錄)11면에 나온다.

東六十里 伏龍弄珠形 庚申龍申作 壬亥水歸乙辰 龍躍天門 世世甲科((현의) 동쪽 60리에 복룡농주형이 있다. 북쪽 용()이 신방(申方)으로 향한다. 북쪽 물이 동쪽으로 흐른다. 용이 천문(天門)에서 뛰노니 대대로 과거를 한다.)

이곳의 산은 신방(申方) , 서쪽방향과 서남쪽의 중간 방향으로 향한다. 실제 쫓비산에서 원동마을 뒤의 불암산으로 향한다. , 섬진강이 마을 앞의 동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용무정마을과 용소라는 증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복룡농주형(伏龍弄珠刑)이 허혈(虛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과 직금(織錦)

우리나라의 곳곳에 옥녀봉이 많다. 그 자리가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의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의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옥녀가 산발한 형국의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 등의 명당과 관련이 깊다. 옥녀봉은 산 모양이 매우 단아하고 수려한 것이 공통점이라고 한다. , 옥녀봉 주위에는 옥녀직금설화가 전한다. 이 전설은 옥녀가 앉은 자리가 명당이고, 이 자리는 7대에 걸쳐 장군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딘지 모른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직금마을 또한 다음과 같은 설화를 갖고 있다.

이 고장 주변에는 예부터 유명한 명당자리가 있다고 전해오는데 백운산을 주봉으로 옥녀봉이 있고 아래로 보디열(섬진강과 인접된 지역), 북섬, 진바늘(직금마을 별칭)이란 지명이 있어 옥녀가 베틀을 짜는 형국이라 전국에서 풍수들이 예부터 이곳을 찾고 있다. 또한, 옥녀봉을 중심으로 현재 분묘가 공동묘지처럼 조성되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묘로서 전남지사를 지낸 해남 출신 민()지사의 조상묘, 경남 산청 출신 정()국회의원의 조상묘 등이 이곳에 조성되어 있다. 한편 이곳 명당자리를 정확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는 설이 있으며 경남 하동 화개 검두마을에서 화개장터 방향으로 가면서 섬진강과 백운산 아래 옥녀봉을 바라보면 사방주위의 산세와 형국으로 보아 명당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광양시지, 4, 979)

기밀록(機密錄)12면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北六十里織錦 川上玉女織錦 機在水中形局 邃密 累代文武((현의) 북쪽 60리 직금에 천상(川上)에서 옥녀가 비단을 짜니 베틀(의 북)이 물 가운데 있는 형국이 있다. 아주 깊다. 여러 대에 문관과 무관이 난다.

직금은 어디인가? 다압면 금천리 직금마을을 가리킨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에 의거 옥녀직금(玉女織錦) 형국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을의 개울이 백운산에서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을 지금내라고 한다. 이것은 직금내의 사투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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