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사료조사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

동학의 시발

19세기 중반기를 넘어 농민항쟁이 계속됨에도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반영되지 않고 더욱 악화일로에 있을 때 안으로는 외척세력의 발호와 폐단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밖으로는 서양과 일본세력의 침략이 노골화 함으로서 국민들의 위기의식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더욱이 삼정의 문란에 따른 중앙정부위 통제력이 이완되면서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증가하는 추세로 조선정부는 산적한 모순을 해결할 능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이 무렵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에 의해 창도된 東學이념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이론을 제시해 세상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실어 주었다.

이로서 동학이란 이념과 함께 1894년에 호남의 농민대중이 일어나서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쟁취하려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외형적으로 실패했지만, 농민들이 쟁취하려던 반봉건의 민주화는 갑오경장이라는 제도적 개혁을 통해 실현되었으니, 이로써 수천 년간 지속돼 온 전근대 사회가 무너져 새로운 사회가 되었다. 다만 혁명의 2대 목표인 반외세 자주독립은 위정자들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불러들인 일본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일제침략자와 맞서 끝까지 싸워 희생과 자주정신의 발로는 이 나라 근대사 민주화에 초석을 놓아 3·1운동과 4·19혁명. 광주5·18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바 우리들이 나아갈 할 길을 제시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로 인하여 농민전쟁은 전국곳곳에서 전개됐으며 우리지역에도 예외는 이니었다. 우리지역도 일찍부터 동학이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는 자신이 직접 1861년경에 남원 진산 금산 지리산 일대를 다니며 동학을 포교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남원외에 인근 지역도 일찍부터 동학이 포교되었을 것이며 우리 광양, 순천도 그영향을 받았을것으로 생각이 된다

순천시사(1998) p521에 의하면 당시 광양지역에서도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1년전 충청도 보은취회(:1893.3.11)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 참가한 광양 봉강출신 조두환(趙斗桓)과 고흥출신 송연섭(宋年燮)은 각자 고향에서 모두 20대 나이로 동학에 입도해 적극가담 하였다는 기록이동학혁명 첫페이지에 있다.

이무렵 황현 선생이 보은집회를 두고 오하기문(p66:1995년발간)에 의하면 동학인들은 서쪽으로 임피·함열에서부터 동남쪽으로 광양·순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를 팔고 땅을 팔아 행장을 꾸려 식량을 준비하고 표주박을 이고 배냥을 짊어지고 기일에 맞추어 도착하느라 도로가 메워 졌다. 민간에서는 소동이 일어났고 두려워하는 경색이 역력했으며, 수령들도 두려움에 위축되었고 진영의 장수들은 아무말도 못하였다....”라는 움직임을 보아 광양·순천에서도 40여명이 참가했다는 기록으로 그 이후 동학이 크게 포교되어 있었고 교단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하고 있었다.

1860년대 이후 동학교세가 광양·순천지역에서도 확대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항쟁이 세 차례나 있었다. 1869년에는 광양에서 병란이 있었고 20년 후인 1889년에는 농민들이 봉기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웃 순천에서는 농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18942월에는 농민봉기가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정부의 무능함에 정감록(鄭鑑錄)등을 이념으로 한 크고 작은 변란이 전국에서 일어나는데 우리 광양에서 1869324일 민회행(閔晦行)이 난리가 난다는 도참설과 유언비어로 소문을 퍼뜨려 동조자를 규합한 뒤, 하동을 거쳐 무장을 하고 광양동헌을 공격해 관아를 점령한 뒤 사창(社倉)을 열어 곡식을 읍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활동을 하다가 다음날 현감 윤영신(尹榮信)이 이끄는 창솔군(倡率軍)의 반격으로 진압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그 뒤 두 번째로 20년 후 가을에 광양농민들의 주도로 봉기가 일어났다.(발생 일자는 밝혀져 있지 않다) 농민들은 주모자인 이방 백지홍(吏房 白智洪)을 비롯한 3명의 주도로 집회를 연뒤, 관아로 쳐들어가 그동안 탐학함을 일삼던 현감 김두현(金斗鉉)을 축출하고 부정하게 징수한 공금을 탈취했다. 이 농민봉기는 곧 진압되었지만, 고종 집정기에 50여개 지역에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광양현에서 두건은 이미 있는 소요난 이였다.

그리고 광양에서와 달리 순천에서는 1894110일에 일어난 고부(古阜) 농민봉기가 해산될 즈음인 225일 순천농민 수천명이 들고일어나, 관아에 가렴주구로 간사한 아전들의 집을 파괴하고 조세법을 만들어 그 실행을 관에 요구했다. 이들은 그동안 전세(田稅)를 초과 징수한 부사 김갑규(金甲圭)가 농민들에게 애걸하며 요구조건을 들어줄 테니 물러가라는 말을 듣고 해산해 민난의 위기를 넘겨다는 사건도 있었다.

이로 보아 당시 전국이 탐관오리들이 탐학을 일삼고 가렴주구를 자행하던 시대로 광양에서도 동학교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광양에 문사(文士) 동학에 왕 유수덕. 무사(武士)영호도회소 수접수 유화덕. 접사 조두환 이 세분은 봉강조령 같은 마을 출신들이다.(이세분에 관계는 다음에 기재) 이 세분을 비롯 봉강접주 박흥서, 인덕접주 성석하, 박소재, 박치서, 사곡접주 한군협, 한진유, 옥룡접주 서윤약, 서향약, 이중례, 하종범, 서통보, 월포접주 김명숙, 섬거역도접주 김이갑, 도집강 정홍섭 등 뛰어난 활동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각 지역마다 동학조직이 결성되었던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우리 광양에도 집강소가 설치 되었음이 예상된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