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사료조사위원

앞서 유수덕, 유화덕, 조두환 세 분을 언급했는데 그들은 우리광양 뿐만아니라 전남동부권에서 당시 지체있는 분들이라 동학혁명활동 이외 집안 내력과 일반활동 사항을 잠깐 소개를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먼저 유수덕 공의 집안 후손들의 얘기로 광양군 봉강면 강변촌에서 발생한 이학조 치사사건 보고서(1897.8)등의 기록을 찾아보면.

유수덕 공의 가까운 집안 후손(유상열 1941년생)의 이야기에 의하면 유수덕 선조는 조령마을 출신으로 증조조와 유하덕 선조와 친형제 지간이나 사촌 형제로 알고 있는데 선조가 동학에 큰 인물로 활동을 하다가 희생을 당하다보니 족보에 기록이 없어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라고 하시면서 하는 이야기가 선조께서는 글을 많이 배워 조두환 공과 같은 훌륭한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을 우리 마을에서 나이든 분들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선조께서는 일찍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로 붙잡혀 간 이후로 생사가 불문인데도 누구에게도 알아보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해오면서도 오히려 관아에 주시로 가문이 좌초가되고 더큰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집안 어른들은 족보에도 누락시켰다는 것과 당시 동학농민혁명 중 잠시 집에 와서 쉬고 있을 때 관아에서 수배령이 내려 선조를 찾아 와 붙들려 갈때 공은 내가 살고자 했다면 피했을 것이나 나로 인해 집안에 피해를 막고자 순순히 걸어 나갔다 했으며 붙잡혀 갈 때도 그는 가면 이미 못 올 줄 알고 마을 뒤를 한참 돌아본(선영에 대한 인사) 후 포졸들이 묶으려고 하니 어라 나발로 갈 것이니 나를 놔아라하시면서 큰소리를 치며 가셨다는 집안 어른들에게 이런 이야기만 들었 뿐 이외는 전해오는 얘기도가 없으니 결혼을 했었는지, 자식이 있었는지, 형제는 몇 분이나 되셨는지, ()도 없지 하니 본인을 비롯 집안사람들도 그 선조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한다고 했다.(지금이니까 말이지,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었었던가요?)

조령마을 조일문(40년생)옹의 얘기에 의하면

유수덕 공은 저가 듣기로는 전주로 잡혀간 후에 전해져오는 얘기는 동학도에서 호남에서 몇 번째 가는 큰 어른이었다는 것과 그분이 전주로 잡혀가 죽는데 죽기 전에 몇몇 동료들과 같이 하라는 큰상(사짓밥상)을 걸게 차려주는 것을 아무도 겁이 나서 음식물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는 대담하게 닭다리를 찢어서 옆의 동료에게 건너면서 맛있게 먹으라 했다는 대담성을 들었으며, 또 당시 조정에서 전주에 유수덕을 죽이지 말라는 첩지를 내려 가지고 내려오는 도중 전주 감영에서는 이미 죽은 후에 첩지가 도착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897.8 광양군 봉강면 강변촌에서 발생한 이학조 치사 사건보고서(광양군수초검보고서 21692,와 순천군수복검보고서 21628)국역 내용에 의하면 동학도였던 이학조는 상봉리 조윤태라는 사람에게 구타 당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보면 유수덕 공의 흔적이 나온다.

과연 이학조와 더블어 광양에서 포교생활을 하던 유수덕은 누구인가? 광양출신으로 동학에 입교하여 호남지방의 동학교도들을 지휘하는 동시에 승려들을 부려 농민군 집회에 참여시키는 등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명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 萬事知)’라는 13자의 주문도 그가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천도교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꼽이는 조두환 역시 광양출신으로 유수덕 밑에서 수학했다고 그에 약력에 나온다. 유화덕이 김인배를 도와 영호수접주로 광양, 순천지역의 농민군을 지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유수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유수덕은 문서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오태원 등 5인이 아니라 정순팔과 유수덕이 이 모든 거사를 계획하고 지휘한 동학무리의 왕이라는 것이다. 승려들을 보은, 금구 등의 농민집회에 보내 변혁의 기회를 엿본 것도 이들의 계획이라는 의미였다. 밀고의 탓인지는 모르지만 1893년 광양 사또는 유수덕을 계룡산 개국의 실질적인 배후로 지목하고 체포했다. 당시 광양의 좌수 조용하는 유수덕 체포의 일등공신이였다. 유수덕과 광양에서 동학포교에 힘썼던 이학조는 서울로 압송되기 전에 유수덕을 구해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유수덕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순천과 광양지역의 동학농민군활동이 극성했던 18947, 이학조는 광양의 동도거괴(東道巨魁)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광양의 장청(將廳)에 설치된 접소(接所)에서 농민군을 직접 지휘하며 유수덕의 체포에 앞장섰던 좌수 조용하를 찾아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이학조는 유수덕의 일가 피붙이자 당시 김인배와 함께 호남의 동학농민군을 지휘하던 영호수접주 유하덕의 힘을 빌려 수백명의 농민군을 대동하고 조용하를 쫓았다. 그러나 이학조를 피해 들판을 떠돌며 숨어지내던 조용하는 그만 화증(火症)으로 객사하고 말았다...,(필자는 유수덕, 이학조, 조윤태 세사람의 후손을 찾으려고 4-5년간을 수소문했으나 한 사람만 찾고 두사람은 아직도 못 찾았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등록 신청안내(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2019.4.30.발간) p157에 의하면 참여자성명:유수덕(劉壽德.이명 劉水德). 참여지역:전라도광양.충청도홍성, 참여내용:유수덕은 접주로서 1894년 전라도 광양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전주점령에 참여했다가 충청도 홍성천투에서 패한 뒤 체포되어 전라도 조성으로 압송되었다가 살해됨, .:1857.-?,등록번호:2391”라고 기재된 내용을 보고 이학조 치사보고서 기록과 비교해보면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느껴진다.

다음은 유화덕(劉夏德) 공의 활동사항 및 집안내역을 보면

공은 백운산의 봉종인 도솔봉 새재밑에서 강릉유씨 국재(菊齋)공파 23세손으로 부() 재신(載臣) ()신안주씨(新安朱氏) 사이에서 조선오백년의 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 혼란기인 철종(강화도령)51854510일에 태어나 휘는 하덕(夏德.이명하석)이며 자는 윤중(允中)이다. 그는 30대 초반에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뛰어 들어가 누구의 알선으로 영호도회소 수접주(순천.광양.낙안.전라좌수<여수여천 돌산>)로 들어 갔는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이학조 치사보고서 언급했지만 아마도 유수덕(조두환의 스승)공의 알선이 있었지 않았나를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필자는 유하덕 공의 후손을 찾기 위해 2017부터 조두환 공의 후손 찾기와 함께 봉강조령을 4-5회 정도 찾았다. 그러다가 2019년 강릉 유씨 집안 종손 덕열 씨와 그에 당숙되는 상열 씨를 만나려 갔다. 전번에도 족보를 보았으나 찾고자 하는 것을 못 찾았는데 이번에는 실미리를 찾았다. 그리고 유환섭 씨를 찾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질문에 유상열옹은 유환섭 일가분이 광양, 순천 어디선가 통일교회 간부로 활동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통일교회를 주무대로 찾아보라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사무실(안영신 행정사)에서 광양서교 제41회 졸업생이며 광양중학교를 나왔다는 유하덕 공의 증손인 유환섭 선생을 찿기 위해 20191월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통일교회를 두고 광양을 비롯 순천, 여수, 목포, 광주를 수시로 전화를 수십회를 했으나 못 찾고 어떻게 4월중순 무렵 경기도 화성지역 통일교회에 있다는 소식을 들어 혹시 고향이 전라도 광양이 아니며 존함이 유환섭 선생이 아닙니까하고 물으니 맞다고 하여 결국 4개여월만에 연락이 된 셈이다.

그 뒤에 다시 연락을 해 같은 해 52일 서울 용산역에서 만나 서로 간단한 인사 함께 유하덕 공의 동학에 관한 정보교환을 하자하고 이야기를 나눈 후 서로가 또 언젠가는 만날 것을 약속하고 정해진 열차 시간에 맞추어 헤어질 때 그는 멀리서 오셨는데 적으나마 가다가 음료수나 드시라면서 돈을 일십만원을 주셨다. (그는 어쩌다 전화 연락을 하다보면 증조부묘를 가묘를 써서 성묘을 했는데 필자를 통해 이젠 광양 조령에 있다는 것을 인지, 언젠가는 죽기전에 증조부 묘역에 조그마한 비라도 하나 세우고 가야겠다는 얘기도 했다.)

용산에서 만난 이후 약 일주일쯤 후에 유환섭 씨는 족보(인테넷) 제적등본 증조부(하덕) 조부(영언)의 족보 기재 설명 내용 강릉유씨 영언님의 직계도 가족관계 증명서 .교사교리 연구:11(포덕14612. 천도교중앙본부-전라도 동남지역 동학혁명운동. 40p분량) 증조부에 대한 행적(어렸을적 들은 얘기와 본인의 험난한 세상살이)의 자료를 두툼하게 대봉투에 넣어 소포로 보내왔다.

봉강면 조령의 유하덕 묘
봉강면 조령의 유하덕 묘

다시 유하덕 공의 후손을 찾기 위해 2022.1.2. 봉강 조령에 강릉유씨 종손 덕열 씨와 그에 당숙되는 상열 씨를 찾아 다시 족보를 확인한 결과 유하덕 공의 후손을 찾는 데 있어 인테넷족보. 1970년대 지면 족보에는 아들 영언(永彦) 한 명으로 그 이후는 후손도 없는 것으로 기재된 반면 유하덕(이명:하석)공의 동생(창석)공의 후손은 1970년대 지면 족보에는 아들이 두 명으로 큰아들(영환)과 작은아들(영두)의 후손들이 자세한 기록을 확인하고 유하덕공 묘소가 근방에 있다하여 필자를 비롯 상열, 덕열, 조일문, 서재현 전 이장 5명이 같이 찾아가 묵념을 하고 난 뒤 덕열 씨가 말하기를 여기는 옛날 자기가 어렸을적 이 산소가 어린애들의 놀이터라 말했다.(여기서 그의(유하뎍) 후손을 보면, 먹고살기가 힘들어 세상을 헤매다 보니 족보도 누락 된 줄을 모르고 지내왔으며 조상에 묘도 유무을 몰라서 가묘를 써서 성묘를 했던 이러한 사실이 확인이 된 바 이런 사례가 우리가 흔이 얘기하는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의병(독립군)을 하면 집안은 3대가 망한다는 말은 그냥하는 말이 아니다. 그 유가족은 얼마나 피맺힌 삶이였을까? 국가에서는 그 유가족들에게 지금이라도 정당한 보상이 이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헤아려 보건대, 관아에서는 동학도를 경계코자 영호도회소 대접주 김인배 공과 영호도회소 수접주 유하덕 공 이 두분만 유일하게 광양객사에 효시를 했다. 김인배 공은 127일이고 유화덕공은 하루 뒷날 128일 광양객사 한가운데 간지대 꼭대기에 머리채로 묶은 그에 두상을 거두어다 지은 묘()가 바로 현재 이묘다. 비석하나 없는 묘가 너무 쓸쓸해 보였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초대회장(1994)을 지낸 고 김영중은 증언록에 이런 말을 했다. “살아생전 영호도회소 대접주를 지낸 자기증조부(김인배) 광양 적당한 곳에 비석하나 세우는게 꿈이다라고 했는데 결국엔 못하고 3-4년전에 돌아가셨다.(언젠가는 광양에서 현재 시장관사 주위 일대에 세워야할 것으로 사료됨 ) 문뜩 그 생각을 하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겨울이라 묘 주변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으나 한 세기가 지나고 30여년이 더 지나다 보니 묘 봉상은 많이 낮아져 밎밎해 보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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