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세계종교와 원시종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종교(宗敎)는 초인간적 세계와 관련된 신념이나 의례 등으로 구성된 문화현상이다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초월적·절대적 존재에 대한 경험과 신앙에 기반을 둔 교의·의례·시설·조직을 갖춘 사회 집단이 형성되는 문화현상을 다룬다. 종교는 신을 연구해 그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있다고 믿는 인간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종교를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나눈다. 보통 의 반대개념은 이고, ‘의 반대개념은 로 쓴다. 물론 고하(高下)’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구분하는 것은 고등생물, 하등생물처럼 나누는 생물학의 분류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고등(상등)과 저등(하등)으로 나눈다면 높고 낮음’, ‘위 아래’, ‘귀하고 천함’, ‘좋고 나쁨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으므로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가 파생되고, 또 등급이 매겨 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신의 등급을 따지지 말아야 하듯, 신을 경배하는 종교 또한 등급을 나누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원시(原始)라는 용어가 미개하다는 선입견을 주긴 하지만 시작하는 처음또는 처음 시작된 그대로 있어 발달하지 아니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필자는 고등종교 대신 세계종교, 하등종교 대신 원시종교라는 용어를 쓰고 싶다. 거듭 말하지만, 종교의 우열(優劣)를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원시종교(原始宗敎, primitive religion)란 문화적 요소가 없는 미개한 종교. 교리나 성직 제도, 교단 조직이 없고 신관(神觀)도 미흡하다. 또 씨족이나 부족을 중심으로 사회와 종교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고 족장이 사제(司祭)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많이 존재했으나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기독교를 비롯한 고등종교의 활동으로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정치적 위기나 사회적 갈등기에는 과거의 원시종교가 신흥 종교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교회용어사전)

영혼이나 자연을 숭배하는 애니미즘, 토테미즘도 원시종교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세계종교는 인류 역사상 인정을 받는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처럼 경전, 사제, 내세관을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을 모두 갖추지 못한 원시종교는 종교의 원형을 보여줄 뿐이다. 마을에서 행해지는 제의인 동제(洞祭)와 마을 신앙은 원시종교에 해당한다. 세계종교와의 수준이나 질적인 차이를 떠나서 민중들의 삶의 단면과 의식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세계종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문화적 상대주의

논의에 앞서 먼저 문화를 이해하는 태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자기 사회와 다르다고 타() 문화를 폄훼하는 자문화중심주의, 자기 문화를 부정하고 다른 특정한 사회의 문화를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문화사대주의, 그리고 그 사회의 특수한 환경과 역사적 상황을 고려한 입장에서 이해하고 그 사회의 문화를 존중하는 문화적 상대주의가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시각으로 자문화중심주의와 문화사대주의이다. 그렇다고 문화적 상대주의가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서구식 교육이 일반화되다 보니 모든 것을 서구문명적 시각으로 보고 서구적이 아닌 것은 야만이라고 보는 관점은 조심해야 한다. 인간과 문화 이해에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일반원리와 개념을 규명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문화가 다양하며 인간의 인식과 가치관은 문화에 따라 다르다는 명제를 기본 인식으로 삼고자 한다.

스웨덴의 언어학자 겸 자연농법 전문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가 쓴 오래된 미래가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라다크로부터 배운다이다. 라다크는 인도령 카슈미르의 지역으로, 히말라야산맥과 카라코람산맥, 그리고 인더스강의 상류 계곡에 걸쳐 있는 해발 3000m가 넘는 고원 지대이다. 이 책은 모든 것을 서구 문명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반성을 갖게 해 주었다. 예를 들어 비위생적이므로 똥은 깨끗하게 치워야 한다.’는 서구문명적 시각으로 본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똥을 연료로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전래의 똥돼지는 키울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위생적이라는 수세식 변소가 더 수질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우월주의 관점에서 재단한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본다. 우리의 퍼내기식 변소인 재래식은 비위생적인 것이고, 야만으로 규정되어 현재는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재래식 변소는 인분(人糞)을 모아 이를 발효시킨 뒤 다시 거름으로 사용하는 친환경적인 시스템이다. 서구우월주의 시각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시각에서 상대방을 야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문화적 폭력임이 분명하고,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 중의 하나이다.

옥곡면 장동리 푸조나무(검은팽나무)

정원에 나무와 돌을 조경해 놓았다. 정원을 만든 사람과 정원의 구성요소인 나무와 돌은 어떤 관계일까? 사람들이 나무를 심고, 돌을 가져와 경치를 아름답게 꾸몄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무와 돌보다 우월할까? 전통적인 관점이나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볼 때, 우리 인간이 지구에 있는 나무와 돌보다도 우월하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우주에서 바라본다면 나무나 돌이나 인간은 그저 지구의 소소한 존재일 뿐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이 나무나 돌보다도 존재론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불과하다. 오히려 나무가 인간보다 더 영험하기도 한다. 나무가 일종의 신적인 존재인 것이다. 무엇이 신()인가?

신은 초인간적 또는 초자연적 힘을 지닌 신앙 대상을 의미하는 신()이다. 보이지 않는 중에 존재하며,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인류에게 화복을 내린다고 믿는 신령이다. 한국 전통사회의 경우 신이란 민속신앙에서 숭앙 되어 축원과 굿을 바치는 영험 있는 신비한 존재이다. 산이 신들의 큰 집이라면 마을은 그들의 마당이고 집은 그들의 안방같이 여기는 등 수없이 많은 신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신들은 인간의 사고가 확장되고 우주 질서를 인식하면서 하나의 원리로 통일된 최고신 혹은 초월신 개념으로 통합되는데, 인도의 브라만, 유대의 야훼신, 중국의 상제 등이 그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 자료는 옥곡면 장동리에 있는 푸조나무(검은팽나무)와 관련된 전설이다. 1983년 군지편찬위원회가 설문조사에서 얻은 자료라고 한다.

장동리 매동과 곡동마을 경계에 서 있는 이 팽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이 넘는 자연수로 높이 약 20m, 흉고직경 1.2m, 425m가 되는 노거수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심야에 이 나무 부근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들리기 시작하여 사람들이 잠을 깨어 나무 밑으로 가보았더니 이 나무가 우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무 밑에 모였을 때 나무에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마을에 재화가 올 것을 나무가 예고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걱정을 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왜병들이 마을을 향하여 쳐들어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보고 크게 놀랐으나, 왜병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오는 것을 미리 안 사람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자기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여 후퇴해 버렸다.

수일 후 왜병들은 다시 이 마을을 급습해 먼저 이 나무 밑에 진지가 있었다고 하여 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를 마구 잘라냈는데 잘려진 나뭇가지가 땅에 떨어지면서 나무 밑에 있던 왜병들이 모두 나뭇가지에 깔려 죽어버렸다. 이 일로 하여 왜병들은 다시는 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했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당산목으로 모셨으며 질병이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 나무에 비는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후 심한 전염병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앓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제수를 차려놓고 정성을 드렸으며 그 나뭇잎을 주워다 약으로 끓여 마셨다. 그런데 이 약을 마신 사람은 모두 병에서 안전하게 나았다고 하며 이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어 아직도 이 나무는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광양시지, 3, 663~664)

옥곡 장동리 팽나무
옥곡 장동리 팽나무

이 보호수는 옥곡면 장동리 796-7번지에 있다. 팽나무과의 낙엽수로, 팽나무보다 검어서 검은팽나무라고도 부르며 한자로는 양목(椋木)이라 표기한다. 그러나 이 푸조나무는 일상적인 나무가 아니다. 마을의 재앙을 예고해 주었다거나, 왜적을 죽이고, 전염병을 낫게 해 주는 등 가장 성스러운 나무로 질적인 전환이 이뤄졌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당산목으로 모시고, 제물을 차리고 정성 들여 소원을 비는 거룩한 나무가 되었다. 실제로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음식을 장만한 후 마을 이장이 제주(祭主)가 되어 마을의 강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고 전한다. 이로 볼 때, 장동리 푸조나무(검은팽나무)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초월적 존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나무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종종 기사화되곤 한다. 국가에 재이(災異)가 일어날 것 같으면 비석이 땀을 흘리거나,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물기가 촉촉하게 적셔져 흐른다든지, 전염병이 마을에 돌 것 같으면 울기도 하는 등의 이적(異蹟)을 보인다. 나무나 돌, 꿀벌 등이 영험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영물(靈物)로 취급을 받고 신성시된다. 경남 밀양의 땀 흘리는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로 알려진 비석은 나라에 큰일이 있기를 전후하여 물방울이 맺혀서 몇 시간씩 구슬땀처럼 흘러내린다. 이 외에도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대제복구비는 피 흘리는 비석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꿀벌의 예지력을 보여주는 사례도 더러 나온다. 꿀벌들이 주인이 죽으면 상주(喪主) 노릇을 한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도 있다.

경북 군위에서는 벌을 기르던 사람이 돌아가시면 그 부고를 벌에게도 전한다. 부고를 써서 벌통에 붙이면 벌이 하얀 띠를 매고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벌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근검절약하고 자손을 끊임없이 이어 나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벌을 사람과 같이 여겨 벌에 부고를 전하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충남 천안에서는 초상집에 다녀오면 벌통에 삼베를 꽂아 두어야만 부정이 타지 않는다고 한다. 삼베를 꽂아 두면 벌이 하얀 띠를 두른 것처럼 나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정을 타서 벌이 모두 죽는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토봉고사)

일상적으로 아침에 까치가 울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예견한다. 까치가 길조(吉鳥)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벌이나 까치 등이 예조(豫兆)를 보인다거나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용이나 범뿐만 아니라 말, 집안의 터주인 뱀이나 두꺼비 등도 숭배되기도 한다. 이는 일종의 의인화 과정을 거쳐 초자연적인 신격화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단군신화의 곰, 금와왕신화의 금개구리, 박혁거세신화의 말 등도 동물숭배가 신화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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