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간밤에 비가 내린 탓이었을까?

방금 세수를 끝낸 듯한 나무들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모처럼 맑은 풍경을 대하니 흐려있던 내 눈도 마음도 한층 밝아진 느낌이다. 겨울이면 항상 주위를 맴도는 바람과 추위에 익숙한 산속 생활이지만 가끔은 수고했다며 슬쩍 건네주는 선물은 그동안의 힘겨웠던 시간들을 모두 잊게 해 준다. 겨울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따뜻한 햇살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다가오는 햇살의 유혹에 이끌린 나머지 뒷산에 가려다 말고 처마 밑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정수리 부근이 따뜻해지면서 온몸으로 편안한 기운이 퍼져간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온기를 즐기다 보니 앞마당의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도 햇볕을 받으며 겨우내 쌓여있던 냉기를 털어내고 있다.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는 나무는 계곡을 흐르는 물과 함께 균형 잡힌 우리 집 풍경의 중심을 이룬다. 나무와 나는 늘 가까운 거리에 있고 가족처럼 격이 없고 친근하다. 그의 넓은 품은 언제든 내 마음이 쉬어가기 참 좋은 곳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를 통해 세상의 변화를 확인하고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곤 한다. 느티나무를 빈번하게 접하다 보니 어쩌다 먼 곳에 떠나와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날 때면 가장 먼저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기도 한다.

마당에는 항상 나무가 떨군 낙엽과 썩은 잔가지들이 뒹군다. 아침이면 나는 그가 내려준 잎과 마른 가지들을 정성 들여 쓸어낸다. 구석구석마다 쓱쓱 대빗자루를 힘차게 밀면 쓸모가 없고 필요 없는 것들이 말끔히 정리되고 나무의 모습도 한층 밝아진 느낌이 들곤 한다. 그뿐만 아니라 마당을 쓸고 나면 내 안에 눌어붙어 있던 갖가지 잡념이나 게으름도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나무의 고마움이나 수고를 그냥 바라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결국 나를 위한 일이 되었다.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고난이나 고통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고 돌아오는 대가는 언제나 달달해서 살맛이 더해지는 때가 있다. 일상이 밋밋하고 건조해질 때마다 나 스스로 힘든 노동을 자처하며 땀을 흠뻑 흘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고 편안한 일상을 꿈꾸지만 그것이 너무 흔하거나 쉽게 얻어지는 것이라면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그리 달콤하지도 않을 것이다.

느티나무는 비록 한 그루의 나무이지만 스스로 숲을 이루기도 하고 높은 산을 이루기도 한다. 비록 한자리에서 홀로 살아가지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수많은 세월을 거쳐오면서 그가 내민 가지들은 여기저기 방향을 바꾸며 그들의 영역을 풍성하게 펼쳐 놓았다. 그들은 허공에서 서로 어울리며 가족이 되고 이웃이 되고 하나의 우주를 이루기도 한다. 잎들이 자라 하늘을 뒤덮을 만큼 울창한 숲을 이룰 때면 그는 우리 집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존재가 된다. 그가 오랜 정성을 기울이며 이루어 놓은 숲과 내가 함께 어우러지며 산다는 것이 가끔 자랑스럽고 두 어깨가 으쓱해지곤 한다. 웬일인지 그를 볼 때마다 내가 궁지에 몰리거나 어려운 일에 처하더라도 나를 반드시 지켜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기기도 한다.

나무를 찬찬히 둘러보다 보면 그에게도 만만치 않은 시련이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두가 한 나무에서 비롯되었지만 생각이 다른 가지들은 도중에 길을 바꾸거나 헤어짐을 반복하며 그들만의 길을 갔다. 때로는 강한 바람에 휘어지고 사라지기도 했다. 가지는 세상을 향한 나무들의 꿈과 욕망이 끓어오르면서 생겨난 산물이었다. 그곳에는 동그랗게 패인 옹이들이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을 말해주고 있다. 옹이란 지워지지 않는 나무의 상처이며 한 때 가지들이 함께 살았던 자리이기도 하다. 사나운 태풍을 견디지 못했거나 햇빛을 볼 수 없어 심하게 앓았거나 죽어간 곳이었다. 옹이는 지나간 상처였지만 치유할 수 없는 나무의 고통이며 슬픔이었다.

나에게도 한때는 나뭇가지들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번민했던 날들과 후회되는 일도 많았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뚜렷한 확신도 뜨거움도 없이 적당히 세월에 편승하듯 살아온 시간들이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그러나 한편 아름답고 즐거웠던 기억들도 힘들고 후회스러웠던 일도 모두 한 사람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요즘은 그렇게라도 새침해진 나를 위로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나무에게도 인간에게도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분명한데 속상하게도 나무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존재의 가치가 높아지는 데 나는 갈수록 쓸모가 없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가는 듯한 생각이 들어 쓸쓸하다. 무엇이든 해보려 하지만 하고 싶은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진다. 그래서 골똘히 나무가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해 보곤 한다. 나무는 우리처럼 매년 소유하려 하거나 욕심을 쌓아가는 삶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도 욕심도 버리는 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욕심 때문에 세상살이가 힘들거나 몸과 마음을 다치는 일도 없으니 건강하게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또 하나 그가 오래 사는 이유는 그를 향한 사람들의 사랑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가 세상에 내미는 새로운 풍경들을 향해 쏟아지는 감탄사와 찬사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내게 무심하게 전해주었던 말 없는 그의 위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과연 내가 그가 없는 곳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을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나무는 세상의 어떤 종족보다 따뜻하고 우월한 존재임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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