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역설(逆說)
중세의 신 중심의 시대가 가고, 오늘날 과학 지상주의 시대가 되었다. 과학이란 것은 모두 좋은 것,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과학은 관찰이라는 수단과 그것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 먼저 대상과 세계에 대한 개별적 사실들을 발견하고, 다음으로는 그 사실들을 상호 연결해 주며, 미래에 발생할 것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해 주는 법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제 과학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되고 만병통치약으로 쓰인다.

인간이 과학적이고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해서 지구의 모순과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성스러운 것과 비합리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 아쉬운 것은 산업화ㆍ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요소를 잃어버리고 기층 민중들의 문화도 급속하게 사라진다는 점이다. 장동리 푸조나무(검은팽나무)와 같은 신목(神木)이 사라져가는 현실은 과학의 시대에 사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나무는 가장 일상적인 나무[()]’이자 가장 신성한 나무[()]’라는 역설을 지니고 있다.

역설은 언뜻 보아서는 모순된 것 같지만 그 속에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는 표현법이다. 영어로 패러독스(paradox)라고 한다. 우리가 일상 속의 대화에서 사용하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바쁘거든 돌아서 가라.”라는 말도 다 역설의 진리를 담고 있다. 지는 것은 패배하는 것일 뿐이고, 돌아가면 늦게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격언(格言)들은 각각 관용과 포옹하라.’, ‘서두르지 말고 오히려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진리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의 소개하는 시 또한 역설을 통해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다.

()과 극은 그렇게도 멀었고/ 극과 극은 그렇게도 가까웠다.// 언어(言語)의 패러독스를/ 하나의 진리(眞理)로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김용호, 역설)

극과 극은 양극단에 있으므로 이 둘은 가장 먼 곳에 떨어져 있다. 멀면 멀 뿐이고, 가까우면 가까울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극[가장 먼 곳]과 극[가장 가까운 곳]이 서로 멀고도 가까울까? 역설은 논리적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을 일부러 사용하여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반대적 진리(眞理)를 강조하여 표현하는 언어(言語)의 패러독스이다.

역설의 대가로 흔히 노자(老子)와 시인 한용운(韓龍雲)을 든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도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이 멀었다고 한다. 귀가 먹으면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어떻게 향기로운 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눈이 먼 소경이 어떻게 님의 꽃다운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만큼 님이 시적화자에게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나타내는 수사법이 역설이다.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의 중심 개념이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 한다. 말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도는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도를 배울 수 있겠는가?

원효의 사상적 기반도 다 역설적 진리를 함의(含意)한다. ()와 무(), ()과 속(), ()과 중(), ()과 근(), ()과 정()은 모두 양극단이다. 이 둘을 아우르면서도 하나가 아니고, 하나가 아니면서 양극단을 아우르는 비논리의 논리, 비합리의 합리가 역설이다. 이것이 원효가 살았던 갈등의 시대를 해결하고자 했던 화쟁 사상의 근간이라고 한다.

오늘날 인간이 과학과 기술로 더 세상을 광범위하게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시각으로 본다면 역설적인 표현은 어쩌면 모순적이고 미개한 수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역설은 종교의 신비성처럼 논리나 합리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다룰 때 자주 사용하게 된다. 가장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종교도 가장 속된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종교와 현실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스러운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인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인간을 정의하였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이성적 인간),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유희적 인간), 호모 파베르( Homo faber, 도구적 인간), 호모 로퀜스( Homo loquens, 언어적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 Homo politicus, 정치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등 다양하다. 전문 분야가 다른 학자들이 본인만의 시각으로 보니 인간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생겨난 것이다.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가 쓴 ()과 속()이 있다. 저자는 인간을 종교적 인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로 정의한다. 동물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간이 성스러운 것을 지향하는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다. 종교적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 달리 성스러움이 존재하기를 마음 깊이 소망하며, 현실에 참여하고 힘으로 충만하기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그러면 장동리 푸조나무(검은팽나무)는 왜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까? 성스러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를 성현(聖顯, hierophany)이라고 한다. 이는 "거룩한 것이 나타남"을 의미하는 종교 용어이다. 성현이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대상은 이전의 상태와는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간주되어 종교적 경배의 대상이 된다.

근대의 서구인들은 성스러운 것의 적지 않은 현현 앞에서 어떤 불편스러움을 경험한다. 그들은 성스러운 것이, 예컨대 돌이나 나무와 같은 것 속에서 현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은 돌 그 자체에 대한 숭배나 나무 그것 자체에 대한 예배가 아니다. 성스러운 나무, 성스러운 돌은 돌이나 나무로서 경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정확히 그것이 성현이기 때문에, 그것이 더 이상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성스러운 것, 전적으로 다른 것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숭배를 받는 것이다. <중략> 성스러운 돌은 여전히 하나의 돌이다. 외관상(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을 다른 모든 돌과 구별 짓는 점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돌이 성스러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의 직접적인 실재성은 초자연적인 현실로 변형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종교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모든 자연은 우주적 신성성으로서 자연을 열어 보일 능력을 갖는 것이다.”(미르체아 엘리아데, 성과 속)

성스러운 돌은 일상에서는 하나의 돌에 불과하지만, 그 돌이 성스러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변형되어 나타났으므로 믿음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성속일여(聖俗一如), 진속일여(眞俗一如)

원효(元曉, 617~686)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마무리하는 시대로, 민중들은 전쟁의 참화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 골품제도로 인하여 신분적 제약이 심했고, 불교와 속세 및 종파 간의 갈등이 심했다. 이를 봉합하고 통합하는 사상이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이다.

원효는 그 어느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분석하고 비판하고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하여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모순과 대립을 한 체계 속에 하나로 묶어 담은 이 기본구조를 가리켜 그는 화쟁(和諍)’이라 하였다. 통일·화합·총화·평화는 바로 이와 같은 정리와 종합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하였다. 화쟁은 그의 모든 저서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기본적인 논리이다. 마치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그 파도와 바닷물이 따로 둘이 아닌 것처럼, 중생의 일심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그렇지 못한 무명(無明)이 둘로 분열되고는 있으나, 그 진여와 무명이 따로 둘이 아니라 하여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화쟁의 원리를 제시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효는 성이 설()씨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다가 무덤에서 시체 썩은 물을 마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다. 사물 자체에는 정()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데, 이는 화엄경(華嚴經)의 중심사상이다. 그리고 요석공주와 사이에 아들 설총을 낳고 환속을 한 후, 조롱박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추며 수많은 거리를 돌아다녔다. 중생들에게는 나무아비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치게 하였고, 행하고 먹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이는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는 무애행(無碍行)의 경지였기에 가능하였다.

승려인 원효가 속인(俗人)의 복장을 했고, 귀족인 원효가 광대짓을 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한 도()로써 생사를 벗어났다는 뜻에는 무애(無碍)라고 이름 지은 노래와 춤을 들려주고 보여주면서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녔다. 승려이며 귀족인 원효는 무엇보다도 먼저 승려와 귀족의 특권의식을 스스로 파괴하고자 했다. 원효는 육두품(六頭品) 출신이다. 육두품은 진골(眞骨) 다음가는 위치에 있는 귀족이지만 사회적 진출에 제한이 있었고, 이런 귀족 의식에 있어서의 한계 때문에 민중과 가까울 수 있는 지성을 지녔다고 하는데, 원효의 경우에는 이러한 성향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광대가 되어 광대 스승에게 배운, 기괴하게 생긴 큰 박을 희롱하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민중 속을 돌아다닌 원효는 협소한 주장에 사로잡히지 않는 보편적 인간, 귀족적 편견에서 벗어난 민중적 인간, 분열을 극복한 통일적 인간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한국문학사상사시론, 조동일)

원효는 승려이면서 속인이고, 귀족이면서 광대였다. 자신의 기득권을 격파하고 스스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돌아다녔다. 특권의식을 거부하고 다툼의 시대를 한데 아우르는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삶을 추구한 최고의 사상가이자, 성과 속이 하나임을 보여주고 이를 실천한 최고의 성인(聖人)이었다.

장동리 푸조나무(검은팽나무)는 우리 문화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일상 속의 팽나무가 선사한 그늘은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이자 놀이 공간으로 기능을 한다. 그러다가 팽나무 주위에 금줄을 치면 제의의 대상이 되고, 이곳은 신성한 공간이 된다. 성과 속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성과 속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이를 문화인류학자들은 우리 문화를 성속일여(聖俗一如) 또는 진속일여(眞俗一如)라고 한다. 원효 또한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이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