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지난해 순천에서는 순천영호도회소 기념사업회를 창설해 동학농민혁명 129주년을 맞아 제1회 순천영호도회소 학술대회를 순천대학교 70주년 기념관에서 1026일에 개최한 바 있다.

이날 학술대회는 김평부 동학북소리 공연 후, 주영채(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이 좌장으로 한양대학교 윤석산 교수, 대구대학교 김용휘 교수. 청주대학교 김양식 교수와 토론으로 한국창의예술고 명혜정, 우석대학교 문동규, 순천대학교 최현주 선생이 참여했다.

학술대회에서 필자는 김양식 교수에게 영호도회소 수접주로 활동한 유수덕은 순천사람이 아니고 광양사람이며 광양 봉강 조령에 가면 그의 묘소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호도회소 대접주 김인배공이 1894.6 하순에 순천 동헌을 차지해 9~12월초 효시 당하기까지 순천, 광양, 하동, 곤양, 진주에 이르기까지 활동 사항이 나오는데 7, 8월의 활동은 애매하게 나와 이 부분에 대하여 말씀해주십시오라고 질문했다.

답변을 한 김양식 교수는 유하덕의 출신지를 순천으로 한 것은 동학의 모든 기록에 순천으로 등재가 되어서 그런 것으로 앞으로는 유하덕 출신지를 광양으로 하겠다라고 하고 김인배에 순천영호도회소에서 7, 8월의 기록은 본인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정확한 기록을 못 봤다면서 이렇게 동학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는 분이 계신다라고 매우 고무적이라 말했다.

조두환 공의 약력과 일대기
번은 조두환 공에 관한 내용이다.

공은 조선 말엽 안동김씨 세력과 풍양조씨 세력에 의한 묵은 세도정치 60여년이 끝나고 고종의 섭정 3년 병인양요(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가 일어난 그 이듬해 1867년에 어지러웠던 시대에 광양군 봉강면 조령마을에서 옥천조씨 부정공파 13세손으로 부() 연옥(淵玉)과 모()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사이에서 4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유년시절부터 총명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유수덕 문하에서 수학해 1893년에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집회에 당시 26세 나이에 참여했다.

허남호. 고 숙암 조두환 씨를 추도함(“천도교호월보”279.1935.9)p37.

그의 약력을 보면 포교 8년 정묘(1867) 1030일에 전남 광양군 봉강면 조령리에서 생하다. 포교3 1년 경인(1890:23) 1212일에 본군(같은 마을) 유수덕 씨에게 도()를 수()하다. 34년 계사(1893:26) 12월에 경성 광화문 복합시(伏閤時)에 참행(參行)하다. 동년 3월에 신사(神師)의 명령에 의하야 보은장내(報恩帳內)에 참석하다. 35년 갑오(1894:27)에 접사가 되다. 127일에 민군이 난을 백운산 중에서 피할 때 천사의 감응하신 은덕으로 누차 화를 피하시다. 45(27) 갑진 1월에 해접주가 되다. 46년 을사에 일진회 광양지회 부회장으로 피선되다. 58년 정사 825에 광양 교구전재원(敎區典制員)으로 피선되다. 66년 을축 11월에 광양군대표위원으로 피선 되다. 67년 병인 710일 포덕사가 되다. 68년 정묘 321에 숙암도호를 받다. 74년 계유 221광양교장으로 피선되다. 76년 을해 712일 환원(還元)하니 시년(時年)69(1935:을해)로 일기(一期)를 볼 수 있다.

조두환 공에 대한 弔辭 내용
또한 공에 수제자였던 빈암 허남호 선생의 조사(弔辭:숙암 조두환 추도함) 내용을 보면 오호 숙암조두환씨 환원이여 더욱 통탄함은 마지아니합니다. 내가 성미 상납차로 금월 2일에 20리 태령을 넘어서 조령리 교회당에 도착하야 숙암장을 뵈옵고 근일에는 기력이 어떠하십니까 하니 동리 행보뿐이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이렇게 기력이 감숙되어 가던 장래 사업을 어찌할가요하고 성미문박을 수정해야 상납을 부탁하며 씨()를 배별(拜別)한 후 본제로 돌아와서 씨의 환후를 염여하고 있었던 중 일일(一日)은 씨의 종손 두 아이가 성화 중에 태령을 넘어왔는지라 나는 급히 문에 나가서 오는 연고를 물어본즉 두 아이 근심하는 빛을 띠며 우리 종조부님이 오늘 아침을 잡수시고 나서 별안간 정신이 혼미하고 구진과 안목이 빈동하다며 점점 병세는 생전에 서로 대면이나 하게 오시라고 합디다. 나는 여러 날 복통으로 고심하는 중이나 태령을 겨우 넘어가서 문전을 당도하니 벌써 환원 하시었는지라 할수 없이 청수탁전가서 기도를 필한 후 실내에 들어가서 숙암장의 시체를 대하니 자는 듯이 누어 있어 숙암장 숙암장 하고 수 차례 불러도 대답이 없는지라 재래(在來)의 정의(情誼)와 미래의 사업을 생각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이 비오 듯 하는지라 나는 부끄러움도 불원하고 흑흑 흐느끼어 울었다. 할수 없이 3일만에 영결식을 고하고 신촌 덕용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오호 숙암장이시여 입교한지 50년간에 파산인수를 다 지내고도한 우리 교회의 파란과 분열이 한 두번이 아니로되 평시에 늘 하는 말씀이 우리가 천도교를 생명으로 알아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또 춘암상사를 신봉해야지 난법난도한 저무리를 따라서는 않된다고 말씀하시었다. 근년에 와서는 나에게 더욱 부탁을 하시는 말씀이 내가 기력이 점점 감축되고 정신이 차차 허약해지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성공을 못하고 갈것같네. 내가 죽은 후라도 우리 병열과 기하(其下) 여러 자식을 잘 근유하야 내가 남기고 가는 목적지를 유감없이 도착하게 되면 그 아니 은덕인가 나는 도시 빈암만 믿는다고 하시던 숙암장이 이제 정말 환원객이 되었습니다. 오호 애재 숙암장이시여 소지를 미달하시고 육신이 일진토가 되었으나 영령은 반기듯이 우리 후생에게 융합이 일치되어 포덕천하에 광제창생 보국안민의 목적을 속히 달성하도록 명조가 있을 것을 믿고 생전에 부탁하신 말씀을 더욱 명심하기로 숙암장 영전에 다시금 맹서하옵니다.(1935.7.12.)라고 기록돼 있다.

조두환 공의 흔적을 찾아서

공은 20대 중반부터 동학에 가입 남달리 일찍이 18932월 경성 광화문 복합시에 동학교단 교조신원, 보국안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에 참여와 같은 해 3월에 보은장내(報恩帳內)에 참가로 굳은 의지와 혈기로 그 이듬해 1894에 봉강면 박흥서를 접주로 추대하고 공은 접사가 되어 수하에 20여 명의 농군을 거느리고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 12월 초순 성불계곡에서 민보군을 주도한 김석하(광양 민보군들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김석하만이 동학당정토인록에 기록됨)가 아전들과 일부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성불계곡을 샅샅이 뒤져갈 때 바위 밑 굴속에 숨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다는 전설적인 그 장소를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나섰다.

그 장소가 성불사계곡에 있다는 소리만 듣고 필자는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광양문화원 부원장(김경희)과 옥룡 추동에 사는 정순배(39년생) 어르신에게 사전 연락해 202215일 조두환 공이 숨어 살아났다는 그 바위 밑 굴을 찾으려 하니 눈이 온 뒤라 바람이 세게 불고 개울 주변이라 도저히 추워서 못 찾고 다음에 와서 찾기로 하고 내려온 바 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23116일에도 성불사 주위 계곡의 바위 밑 굴을 찾기 위해 옥룡추동에 사는 정순배 어르신과 찾아 나섰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높은 산에는 아직 녹지를 않아 겨울 날씨답게 차가웠다, 성불사절 뒤에 있는 기도처(높은 바위 절벽에 초대가 있음)를 거쳐 개울을 따라 쭉 올라가는데 나이가 많은 정순배 선배님은 필자 이상으로 산을 잘 탔다. 여기저기를 굽어보며 올라간 것이 중복도로까지 올라갔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도로 모퉁이에 서서 위를 쳐다보니 높은 도솔봉에 아직 녹지 않은 하얀 눈 위로 파란 하늘가에 외로이 떠가는 구름을 보니 백사 이항복 선생이 생각났다. 폐모론 반대사건으로 1618년 정월 한추위 나이 60에 유배길에 올라 그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하인에게 수의를 가지고 귀양 가는 길에 흰 눈이 내린 철령을 넘을 때 그가 지은 시조가 문뜩 떠 올랐다. “철령(鐵嶺)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 비삼아 띄었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 뿌려본들 어떠하리란 시조를 읊조리며 나는 양지 한쪽을 찾아 정순배 어르신과 준비해간 빵과 음료로 간식을 하고 다시 내려오면서도 찾았으나 못찾고 길을 잃은 뻔하다가 다행이 길을 빨리 찾아 내려왔는데 결국에는 못 찾고 하산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동학 관련 조령마을에 사는 조일문(40년생)옹과 전화를 하는 과정에서 조두환 공이 숨어서 살았다는 그 장소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 223일 아침 9시 마을회관에서 만나기로 약속 아침에 출발한다는 연락드리고 들것(음료) 하나를 준비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회관 앞에 도착하니 조일문옹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바로 성불사 올라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그 바위를 찾아갔다.

마을회관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비가 내려 었는데 여기서는 좀 더 올라왔다고 싸리 눈이 내렸다. 지금으로부터 130년전 이때<1894()127>쯤 조두환공이 여기서 바위 밑 굴에 숨어서 살았다는 그 굴을 찾아왔는데 아쉽게도 조두환공 숨었던 그 바위 밑에 있던 흙이나 잔돌이 오랜 세월과 함께 백운산에서 내려오는 홍수로 인한 많은 물에 씻기고 빠져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위가 기울어져 있는 상태로 현장 설명을 없이는 찾기가 어려운 형상이었다. 현장을 확인하고서는 날씨도 차고 사진 한 카트 찍고 바로 내려와 마을회관으로 돌아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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