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광양의 우주수(宇宙樹)

읍치(邑治)란 고을 수령이 일을 보던 관아(官衙)가 있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그 고을의 행정 중심지였다. 일반적으로 읍치는 여러 가지 환란(患亂)에 대비하기 위해 길지(吉地)를 택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읍치(邑治)에서는 1()3()이 기본적으로 운영됐다. 다시 말해 각 고을의 문묘,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네 곳을 나라가 관리했다는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정전(正殿)으로 하여 구성돼 있다. 여기에는 공자를 비롯한 오성(五聖)이라 불리는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가 배향돼 있다. , 우리나라의 신라·고려·조선조의 명현 18(十八賢)도 종사(從祀)하고 있는데, 신라의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 고려의 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를 배향한다. 정몽주 이하의 유현(儒賢)은 조선조의 태종 때부터 정조 때까지의 인물이다. 우리 지역에도 광양읍에 1985225일 전라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된 향교가 있는데, 여기에 문묘가 있다.

또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이 있다. 봉강면 석사리 명암마을에 있었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사직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지방마다 관아의 서쪽에 사직단을 세우고 국태민안과 풍년을 빌었다. 한때는 시 차원에서 복단(復壇)을 한다고 했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고 한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단(社壇)과 서쪽에 직단(稷檀)을 따로 설치했다. ()는 토신(土神), ()은 곡신(穀神)을 말한다. 사단에는 국사(國社)의 신위를 남쪽에서 북을 향해 봉안하고 후토신(后土神)을 배향시켰으며, 직단에는 국직(國稷)의 신위를 봉안하고 후직(后稷)의 신을 배향시켰다. 제례는 문묘(文廟)와 종묘의 예에 따르고 2월과 8월 및 동지와 제석(除夕)에 행했다. 그 밖에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의 제례와 가뭄에 비를 비는 기우제(祈雨祭)와 풍년을 비는 기곡제(祈穀祭) 등을 여기에서 지냈다.

한편,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주는 여제단(厲祭壇)도 있다. 우산리 내우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성황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황단도 있었다. 여기에서 처음에는 도성(都城)을 지켜 준다는 성황신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차츰 마을로 확대되고 전파되어 민간에서도 서낭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광양읍 성황동 성황마을에서 열렸던 제사(제의), 동리 사람들의 안녕과 농사일의 순조로움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다. 서낭나무에 금줄을 쳐 두거나 청록색 헝겊을 둘러쳐 놓고, 제물로 시루떡, 삼색 과일, 북어 등을 놓고 대보름 전날 밤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가 끝난 뒤 시루떡을 떼어 나뭇가지에 북어와 함께 매어두고 삼색과도 그대로 둔 채 집으로 돌아간다. 현재는 광양읍의 시가지가 조성되면서 그 흔적들이 남아있지 않고 서낭당(성황)이 있던 곳은 지금의 목성리 사무소 자리였다고 전해진다.(두산백과)

광양의 성스러운 나무는 광양시지(2005)에 골약 통사 느티나무를 비롯해 총 14종이 소개되고 있다. 황길동 324번지 통사마을의 느티나무에는 마을에서 주관하여 매년 섣달그믐날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마을에 흉사가 있으면 정월 보름날에 지내기도 한다. 이 나무가 봄에 잎이 푸르고 무성하면 그해에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 70개 마을의 당산제가 광양시지(2005)에 정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중마동 길호(吉湖)마을 당산제, 진상면 섬거(蟾居)마을 동제(洞祭), 광양읍 우산리 내우(內牛)마을 여제(厲祭, 돌림병을 막는 제사), 광양읍 성황마을 성황제(城隍祭)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는 마을마다 동제를 지냈는데, 산업화ㆍ도시화된 오늘날 사라진 곳이 매우 많다.

당산제란 당산(堂山)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당산이란 토지나 그 마을을 수호해 주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가리킨다. 이러한 신에게 개인과 가족 그리고 마을의 제액초복(除厄招福)을 기원하는 제의(祭儀)를 한다. 이 제의를 당산제라 부른다.

광양 지역의 신앙 대상으로는 천신(天神), 산신(山神), 목신(木神), 용왕신(龍王神), 성황신(城隍神), 장승으로 분포돼 있으며 신체(神體)는 대개 마을 가까운 산에 만들어 놓은 신당(神堂)이나 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나무 등으로 한다.

특히 마을마다 당산나무를 신수(神樹), 신목(神木), 신체(神體), 당목(堂木)으로 삼아 제사를 올리는 것은 수목 숭배에 연원을 둔 것이다. 수목이 이렇게 신앙의 대상이 되는 원인은 천상과 지상(또는 지하)을 잇는 우주의 축()으로 산과 함께 나무가 중심의 상징으로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잎이 졌다가 다시 피어나는 나무의 단절 없는 생명의 재생적 순환성을 영원한 것으로 보고, 종말이 있는 순간적인 세속(世俗)의 반대쪽에 있는 영원 쪽에 나무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광양시지, 3, 417~418)

당산나무를 문화인류학자들은 우주수(宇宙樹), 우주목(宇宙木)이라고 한다. 당산나무가 있는 곳을 당터라고 하는데, 이곳에 때로는 당집이 있기도 한다. 이곳이 그 지역의 중심지에 해당하며, 천상의 신령들이 강림(降臨)하는 곳이므로 거룩한 공간인 성소(聖所)가 된다. 이곳의 우주수(宇宙樹)는 천상계와 지상계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마한의 소도(蘇塗), 단군신화의 신단수(神壇樹) 또한 일종의 세계수이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 보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천상의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처음 강림(降臨)한 곳이 신단수 아래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언제나 단수 아래에서 웅녀가 빌어 아기 가지기를 원하였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도할 수 있는 신앙처에 해당하고, 사람의 기원대로 되는 신기한 징험이 나타나는 곳이다. 이러한 신단수의 후대적 모습이 서낭나무나 당산나무이다.

이와 같이 우주수는 민간신앙적 측면에서 보면 수목 신앙의 원형을 보여준다. 만주나 몽고 등의 동북아시아에도 매우 많은데, 솟대 문화 또한 여기서 약간 변형된 것이다. 우주수는 우주 나무, 세계수(世界樹), 생명수(生命樹)라고도 한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위그드라실(Yggdrasil)이나, 색슨족의 이르민술(Irminsul)도 그 기능이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마을에서 성현(聖顯)을 보이는 곳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는 곳은 성현(聖顯, hierophany)을 보이는 곳이다. 주로 장승, 솟대, 서낭당, 누석단 등이 있는 곳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곳이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성역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상징적인 곳이다. 솟대는 솟아 있는 장대라는 뜻이다.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신앙물이다. 천상의 신이 지상으로 강림(降臨)하는 곳이다. 장승이나 솟대를 예전과 같이 볼 수 없다. 하지만 마을의 경계나 이정표 역할을 하기에 충분함을 보여준 곳이 진월면 오사리 돈탁마을이다. 마을 입구를 나타내는 표지석과 더불어 돈탁대장군돈탁여장군, 솟대 3개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매화마을 청매실농원 장독대 뒤 솟대
매화마을 청매실농원 장독대 뒤 솟대

 

장승은 장신, 수살, 벅수, 우석목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돌이나 나무 기둥에 무사, 장군, 역사 등을 나타내는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하여 마을 어귀에 세웠다. 이는 마을 수호신으로 액막이 구실을 하거나, 적석위표(積石爲表)란 말처럼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제주도 돌하르방도 장승의 일종이다.

돌하르방의 기능에 대해 민속학자들은 크게 3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성안 사람들의 강녕과 융성을 지켜 주는 수호신적 기능을 가졌다고 본다. 둘째, 전염병을 막아준다는 믿음이나, 돌하르방의 코를 빻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은 돌하르방의 주술종교적 기능면을 드러낸다. 김몽규 목사도 당시 제주에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원귀가 되어 산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하여, 이를 막기 위해 돌하르방을 성문 밖에 세우게 됐다고 전한다. 셋째, 돌하르방이 성문에 세워져 있으므로 마을 경계를 분명히 알려주는 위치표지적 기능도 가졌다. 따라서 외부 사람들은 함부로 돌하르방을 지나쳐 성내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돌하르방은 한반도 마을 어귀에 세웠던 장승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돌 많고 비바람 잦은 제주섬 선조들은 그들의 기원을 비바람에도 지워지지 않도록 단단한 검은 현무암에 조각했던 것이다. 오늘날 그 후손들도 제주인의 자부심을 표현하듯 돌하르방을 자랑스레 문밖에 세우고 있다. 제주의 대표 상징물, 돌하르방. 구멍 숭숭 난 검은 현무암에 조각해 낸 툭 불거져 나온 눈과 뭉툭한 긴 코, 꼭 다문 입매와 불룩한 배에 얹어 놓은 두툼한 손. 돌 할아버지를 뜻하는 돌하르방이란 이름이 말해주듯 모진 환경에서 한평생을 보낸 우리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닮았다. 그렇지만 이 석상(石像)돌하르방으로 부른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조선조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세 읍성(邑城) ··남문에 각각 세워져 있었던 제주섬 고유의 석상을 1971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하려 할 때 공식 이름으로 새로 지어 붙인 것이 돌하르방이다. 본래 민간에서는 돌하르방을 벅수머리’, ‘우성목’, ‘무성목등으로 불렀고, 문헌에는 翁仲石(옹중석)’으로 표기한 예가 있다. 제주의 민속학자 고() 김영돈 선생에 의하면 광복 전후에 도민들 사이에서 반 장난삼아 부르던 돌하르방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결국 많은 민속학자들의 열띤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의 공식 이름으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제주특별자치도 누리집>민속/문화>신앙문화>석상>돌하르방)

돌하르방의 기원은 제주자생설, 몽골기원설, 남방기원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조선 후기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돌장승 문화의 영향을 받아 태어났다는 것이 제주자생설이고, 몽골의 석인상인 훈촐로에서 나왔다는 것이 몽골기원설이며, 적도 해류와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남태평양에 널리 퍼진 거인숭배신앙(이스터섬 석상)이 전파되었다고 보는 것이 남방기원설이다.

그럼, 이스터섬(Easter Island)의 모아이(Moai) 석상을 살펴보자. 이스터섬은 동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제도 끝에 위치한 칠레령으로, 해저 화산 폭발로 생긴 화산섬이다. 칠레에서 서쪽으로 약 3,500떨어진 곳에 있다. 원주민들은 이스터 섬을 커다란 땅을 의미하는 라파누이(Rapa Nui)’라고 불렀는데, 네덜란드의 제독인 야코프 로헤베인(Jakob Roggeveen)이 오랜 항해를 하던 중, 1722년 부활절에 이 섬을 발견하여 이스터섬으로 부른다. 이 섬에는 모아이(Moai)라 불리는 887개의 석상이 있는데, 그 크기는 차이가 많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하는데,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100~168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기술로 만들기에 불가능하다고 여겨 외딴 섬에 누가, ,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몰라 외계인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원주민이 만들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석상을 옮기기 위해 숲속의 통나무를 베어 내자 식량이 고갈되었고, 씨족 간에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고 식량이 부족하여 식인 풍습까지 생기게 되었고, 발견될 당시에는 극소수만 살게 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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