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신 광양시 문화유산 보호관리위원

안영신 광양시 문화유산 보호위원
안영신 광양시 문화유산 보호위원

영하의 날씨에 산에서 내려와 마을 회관에서 거실 옆에 자그마한 방에서 따뜻한 차()를 나누며 그는 어렸을 적 어른들한테서 들었다면서 하는 말씀이 조두환 공이 민보군에 쫓길 때 그날 새벽에 눈이 내렸는데 본 마을 출신으로 지역 지형을 잘 아는 편이라 민보군에 쫓기다보니 엉겁결에 신은 짚신을 거꾸로 신고 바로 보이는 도랑(또랑)쪽으로 들면서 바위밑 굴속으로 숨어 들어가 있는데 불과 몇 분후 굴바로 앞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서서 조두환 공을 쫓던 민보군이하는 얘기가 , 이사람이 금방 빠져나가 부렀네라고 하는 소리를 굴안에서 듣고 지나가는 사이에 천신만고 끝에 살아 남았다라는 이야기와 눈,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찾고자 했던 그 장소 안내와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데에 대해 이 지면을 통해 정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 장소를 두 번이나 오십여리 길을 와서 찾고자 하였으나 못찾고 돌아갔는데 오늘 이렇게 찾고 보니 매우 흐뭇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만약에 조두환 공이 잡혔더라면 그때가 127일 당시 광양읍성 객사에서 여기 저기서 체포해 온 농민군을 127일은 김인배 공의 효수를 비롯 봉강접주 박흥서 등 23명이 포살하고 그 이튿날 8일도 역시 객사에서 유하덕 공을 효수하고 연이어 같은해 12월에 농민군이 200여명이 총살하는데, 여기에 포함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살아남아 그는 동학혁명군에서 빠져 나온다. 그 이유를 보면 같은 조령마을출신으로 영호도회소 동학혁명군에 큰 지도자로 활동하신 스승이던 유수덕 공이 먼저 전주로 압송돼 가서 죽었다는 풍문설을 들었을 것으로 예상해 볼 때 신변에 이상을 느꼈음이 이해가 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그래서 그는 약력에 포덕35(1894)127일 민군(民軍)의 난()을 백운산중에서 피()할 때 천사(天師)의 감응하신 은덕으로 누차 화()를 피하시다.”라는 기록과 그후 2년 후에 낙안군(순천낙안면) 김인두(金仁斗)씨에 안내를 받아 정식 동학교도로 입문 광양에 많은 농민을 포교하여 생활하던 중 1905년 손병희 선생이 천도교로 개칭 이후 광양천도교 교구장으로 피선 많은 치적을 남기신 기록이 있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며 1970-80년대에 광양농촌지도소에 근무하시던 서정만(41년생)옹에 이야기에 의하면 자기 선고(先考) 삼형제분들도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은 조두환 공에 후학이라 했으며 이어 본인 형님(서정팔)도 천도교 절실한 신자라고 했다.

이러한 조두환 공에 동학관련 얘기를 듣고자 장손인 조태규 옹도 만나 뵈었다. 그의 집은 마을의 개울 건너편 약간 높은 산비탈면 음지에 있는 외진 독농가(봉강면 조령리 하조길 24)로 하조마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첫 번째 방문했을 때가 201712월 당시 마을 이장을 지내던 서재현 씨랑 같이 찾아가 뵐 때는 건강이 괜찮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왔었다.

그 뒤 두 번째 201911월에는 남매지간인 서정만 옹을 모시고 방문했을 때는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방에서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이야기하며 많은 고문서를 보여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기 조부(조두환)가 남긴 고문서를 어느 교수가 와서 보고 돌려드린다면서 41점을 수년 전에 가져갔는데 그중 25점은 돌아왔고 나머지 16점도 곧 돌려준다며 지난 여름(20197)에 편지만 왔지 아직도 고문서는 안 돌아왔다 라고 언짢아하시며 거기에도 동학과 관련 서류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교수가 보낸 편지를 보여 주셨는데 결국에는 그 고문서를 못 받고 2-3년 전에 돌아가셨다. 이상으로 동학교도이면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조령출신 세분에 특이한 동학 활동과 집안 내역을 살펴 보았으며,

1902년동학교도 이충실의 명첩
1902년동학교도 이충실의 명첩

아울러 천도교 개칭 이전 동학교도 명첩이 있어 소개한다. 광양읍에 거주하시는 2천년대 초반에 광양.순천.여수시 농협중앙회 시지부자장을 지낸 이종태 선생의 조부(이충실) 1902년도의 동학교도 명첩이다. “명첩(名帖)/ 용담연원<(龍潭淵源) 수운 최재우선생>/ 검악포덕<(劍鍔布德) 해월 최시형선생> /북접법대도주봉<(北接法大道主奉) 의암 손병희선생> 명전수(命專授)/ 광양 이충실(李忠實)/ 봉수(奉受)/ 계해생(癸亥生)/ 전주후인(全州後人)/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대도(布德天下廣濟蒼生輔國安民大道)/ 壬寅(1902) 3월 일이 명첩은 광양읍에 거주했던 이충실공의 천도교에 신분증으로 보이데 그는 1863년생으로 조두환공보다 3살이 많은 분으로 자세한 활동사항은 잘모르겠으나 이 두분은 함께 광양동학교도에 일찍 포교활동을 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은 영호도회소의 대접주 김인배 공에 대해 살펴보자

영호도회소 대접주 김인배(1870-1894)는 누구인가? 때는 조선 후기 철종의 삼정문난의 세도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1863년에 승하하자 고종 등극으로 대원군 섭정 4년째인 1867년 전북 금구(현 김제시 봉남면 봉화마을)에서 그의 4대조인 성현(成鉉)대에 전북 김제에 살기 시작한 부() 현표(顯彪:1852-1923) () 경주이씨(1851-)의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난 그는 백부 현모(顯模:1844-1873)의 양자로 입적 본관이 김해김씨 안경공파 71세손이고 보명(譜名)은 용배(容培) ()는 양여(陽汝). 부인 김제조씨(金堤趙氏)와 사이에 종성(鍾成)과 종철(鍾哲) 두 아들을 둔 어엇한 가장이었다. 영호대접주로 광양에서 생을 마친 그의 이름을 우리가 알기까지, 그 영혼은 이름 없는 별이 되어 밤하늘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다. 1894년 민씨 정권의 부정부패와 침략의 물결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스물다섯 약관의 나이로 금구(김제시) 고향을 떠난 한 젊은이가 봉건수구세력이 일본군과 손을 맞잡고 농민군을 반란군으로 몰아 만행을 저지를 때 맞서 싸우다가 타관 객지 광양에서 불귀의 몸이 되었다. 그이가 바로 김인배 공이다. 1894128일 광양객사에서 보국안민의 기()가 걸려야 할 위치에 그의 영정(影幀:두상)이 걸렸었기로 그 안타까움이 광양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기가 비록 지났다 할지라도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분에 묘비를 찾아 성묘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동학을 접한 후 늘 가졌으나 실행에 못 옮겼었는데 어찌어찌 공의 증손인 김영중(초대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선생에 사모님과 연락으로 동생인 김영만(1938년생:연무고등학교 교장)선생과 전화로 202293일 김제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해 선생님에 자가용으로 김인배 공의 고향인 봉서마을과 공적비가 있는 곳을 안내 받아 다녀온 적이 있다.

김제에 있는 김인배공의 碑
김제에 있는 김인배공의 碑

봉서마을을 찾는 길은 전주에서 1번 국도를 따라 정읍쪽으로 가다보면 원평에 닿기 전 호남고속도로 금산사 톨게이트를 들어가는 샛길이 나타난다. 샛길을 따라 1-2분 달리면 금산사 톨게이트를 못 미쳐 왼쪽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지는 들목에 40여호의 마을이 보인다. 이른바 봉황이 깃든다는 뜻의 봉서마을 뒤로는 구성산과 모악산을 진산으로 김제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이곳에서 김인배 공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다. 봉화가 사뿐히 내려앉아 둥지를 틀고 광활한 들녘을 굽어보는 듯 한 전형적인 마을로 부()티가 있어 보였다.

마을 옆으로 호남고속도로가 쭉 뻗어있고 금산사 톨게이트를 곁에 끼고 있어 교통이 원활하게 되어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공에 증조모의 정려각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정려각이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그 자리에 종중에서 새로 정려비만 세웠다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김인배 공이 살았다는 집터가 나오는데 지금은 집터의 일부가 곡물창고로 되어있고 행정구역상으로는 화봉리 23-18번지로 되어있는 옛날 집터 등을 한나절 돌아본 적이 있는데 거기는 호남지역의 곡창지대로 사방이 들녘이었다.

김인배 공의 기록(대접주 김인배,동학농민혁명의 선봉에서다)에 의하면 옛날 공이 살아을 적 봉서마을은 지금과 비슷한 40여호 남짓한 전형적인 마을이었다 한다. 당시 공의 집은 100여석을 수확하고 상당수의 머슴을 거느리는 부농이라 일찍부터 학문에 전염 상투를 천장에 줄로 매달고 밤새도록 독서에 몰두해 마을에서 촉망받는 젊은이로 성장 공부도 잘하고 남에 모범이되고 기골이 장대하여 장군감이라 하였기에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영호대접주라는 중임을 맡았다. 그랬기에 집안에 한 항렬이 위인 김현익도 공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여 광양에서 활동하시다가 전사 했다. 그는 1867년생으로 김인배 공보다 3살 위였다. 김현익 공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공과 호흡이 잘 맞아 서기(書記) 임무를 띠고 왔는데 전투에까지 동행하였다고 하면서 죽을 때까지 공과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라는 것으로 볼 때 그는 분명 나고 자란 그 지역에서 촉망받는 청년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던 걸로 보인다.

그런 공은 영호도회소의 중심인물로서 18946월 하순 순천에 내려온 이후 조직적인 준비와 안전적 기반을 마련해 통치권을 장악했으며 그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25세의 나이에 영호도회소의 동학혁명을 주도하였다. 공은 김개남의 명령에 따라 순천을 장악했으며 지도자로서의 모습은 유학과 입도(入道) 이후 실천적 투쟁 경험이 그를 새롭게 만들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을 대의(大義)를 위해 버리는 혁명가가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공에 희생을 알리는 조그마한 위로비라도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18946월부터 12월까지 전남동부의 순천, 광양, 여수 등지와 경남서부 하동, 진주 등지를 관장하는 사실상 통치 권력을 장악했다. 여기에는 동학교도들을 비롯해 아전 농민 사노비 등 다양한 계층이 참가했다. 그러나 내부 소동이 없이 대규모의 조직으로 항일전쟁을 위해 최초로 출전한 영호도회소군이었다. 반외세의 선봉으로 후방 방위 임무를 열성적으로 동부지역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패배한 이유는 화력의 차이가 주요하게 작용했고 결정적 패인(敗因)의 하나는 일본군의 신식무기라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양반과 향리들의 배반 행위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이로써 그는 동학농민혁명군의 10대 지도자로 평가받은 인물로 유년 시절과 집안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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