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옹불암(舞翁佛岩)

진상면 섬거(蟾居)마을 동제(洞祭)

전국에 장승제를 지내는 곳은 많다. 예전에는 진상면 섬거(蟾居)마을 동제(洞祭) 때 장승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광양군지(1983), 마을유래지(1988)에는 섬거마을 당산제로 기록되어 있으나 마을에서는 당산제라는 용어는 쓰지 않고 섬거 동제라 부르고 있다. 동제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의 유래가 500여년을 넘었고 지신(地神)을 모시는 신체(身體)의 귀목나무(느티나무) 수령이 400년을 넘었다고 전하니 마을의 역사와 거의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 마을 김태호(金泰鎬) 전임 면장이 동청(마을회관) 방안의 벽면에 붙여 둔 축문을 보관한 햇수가 삼십 년이 넘었는데 이 축문으로 지금까지 동제를 지내고 있다.

섬거마을에는 다섯 곳에 제사를 지내는데 천룡대신제(天龍大神祭, 마을 뒷산 배나무골) 지신대신제(地神大神祭, 마을 중앙 귀목나무) 지신대신제(地神大神祭, 마을 오른쪽 입구 귀목나무) 별신대신제(別神大神祭, 마을 왼쪽 입구) 장승제인데 이곳 장승제는 장승과 제단에 지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이곳 제사가 제일 먼저 생략되었다고 전한다.(별신대 아랫마을 왼쪽 입구)

동제는 정월 초사흘날 자시(子時, 23시부터 다음날 1)에 지내는데 섣달그믐날이 가까워지면 마을 주민이 모여 동제를 지낼 제관(祭官) 세 사람과 축관(祝官) 한 사람 그리고 제물을 준비할 유사를 뽑게 된다. 제관이나 축관은 마을에서 정결한 원로로 생기복덕(生氣福德, 그날의 운수를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을 가려 선정된다. 그런데 제관과 축관은 본인의 정결함이 중요하며 제물을 준비해야 할 유사는 그 집안 식구 모두가 정결한 한해 운수를 가져야 한다. 제관과 축관, 유사가 선정되면 삼일을 금기해야 하는데, 삼일 전에 자기 집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왼새끼를 꼬아 창호지 조각을 끼운 금줄을 대문간에 치며 대문간 주변에 깨끗한 황토를 파다가 뿌려둔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다섯 곳의 주변에도 황토를 놓아야 하고 제단 주의 네 곳에 햇대[생죽(生竹)] 끝을 꼽고 금줄을 걸치며 신체(神體)에도 금줄을 두른다. 이는 부정한 사람이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유사는 금기된 깨끗한 몸가짐으로 제물을 섬구장터’(섬거장터 새장터)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제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제물을 흥정해서도 안된다.(광양시지, 3, 422~423)

섬거마을의 동제는 수령이 오래된 귀목나무와 별신대신대(別神大神臺)라는 돌, 그리고 장승을 대상으로 거행한다. 동제를 지내기 위해서 제관이나 축관, 제물을 준비할 유사는 부정(不淨)해서는 안 되므로, 이들은 3일 동안 금기(taboo)를 지킨다. 뿐만 아니라 원래 일상적인 공간에 금줄을 치거나 황토를 놓아 신성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뒤 제의 공간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제단 주위에 사각형의 금줄을 치면 제의 공간이 왜 성스러운 지역으로 바뀌는 것일까? 그 비밀은 왼새끼에 있다. 인간이 사는 곳의 일상적인 새끼줄은 모두 오른쪽으로 꼬는 반면, 신들이 좌정하는 공간은 비정상적인 왼새끼가 필요하다. 그래서 왼새끼로 꼰 줄은 부정을 막고 신성한 공간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왼새끼로 꼰 금줄이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신통력이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신체(神體)에 금줄을 두르거나 다섯 곳에 황토를 놓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행위는 신성한 공간에 부정(不淨)한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방어주술의 표현이다.

진상면 섬거마을 별신대신대
진상면 섬거마을 별신대신대

왼새끼로 꼬는 금줄

주술은 그 기능과 목적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눈다. 가지지 못하거나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행하는 주술로 기풍(祈豐)주술인 증식(增殖), 재앙을 물리치거나 미리 방비하기 위하여 행하는 제액(除厄), 상대방에게 위해(危害)를 가하기 위하여 주문을 외워 기원하는 저주(詛呪)가 바로 그것이다. 제액에는 대항(대처)주술과 방어주술 두 가지가 있는데, 대항주술은 이미 재앙이 발생하였을 경우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주술이고, 방어주술은 액이 오기 전에 미리 막으려는 주술이다. 방어주술로는 마을 입구에 세운 장승과 출산할 때 산모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금줄이 대표적이다.

금줄은 신성한 곳임을 표시하고 부정한 사람의 접근을 막으며 잡귀의 침범을 방어할 목적으로 설치하는데 이를 금기줄[禁忌繩], 또는 인줄[人繩], 검줄이라고 한다.

금줄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글자 그대로 ()’은 금지(禁止)의 뜻을 지닌다는 시각이다. 갓난아기 집에 늘어뜨린 금줄은 외인의 출입을 금하는 데 목적을 둔다. 당산제나 마을굿을 위해 동네 입구나 제관의 집, 당집에 쳐 두었던 금줄은 신성 구역과 일상 구역을 구분하고 잡신의 침입을 막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들 금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바로 걷어 낸다. 두 번째 시각은 금줄을 ()’이 아니라 으로 보는 견해다. 일제시대 국학자 이능화는 금줄을 감줄로 간주하면서, ‘은 검ㆍ곰ㆍ한과 같은 고대어와 상통하는 신성어라고 추정하였다. 역사 민속학의 개조격인 손진태도 검줄 문화라고 했다. 이 경우 대표적인 예가 장승, , 당산나무 등에 감아둔 금줄이다. 이 금줄은 썩어 없어질 때까지 그대로 두는데, 감아둔 대상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것이라 하겠다.(주강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50~52)

금줄은 제의 장소나 제관(祭官)의 집 같은 신성한 장소에 늘일 때와 출산 시 금기(禁忌)의 표시로 설치할 때의 형태는 약간 다르다. 신성한 곳의 금줄은 짚으로 왼새끼를 꼬아 백지, 백포, 솔가지나 댓잎 등을 드문드문 끼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후의 금줄은 왼새끼줄에 숯, 생솔가지나 댓잎을 끼워 금줄을 친다. 이때 아이의 성별에 따라 남아는 고추를 금줄에 끼우지만, 여아는 끼우지 않는다. 요즘 아기의 출생지가 산부인과가 있는 병원으로 주소가 모두 같지만, 나이가 든 세대들은 대개 본인이 살던 집에서 태어났다. 보통 금줄을 치는 기간은 세이레(21) 동안이다. 마을에 아이가 태어난 것을 금줄이 늘여진 집을 보면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금줄을 친 집에는 왕래하는 것을 삼가고, 특히 몸과 마음이 부정한 자는 절대로 출입시키지 않았다.

그러면 왜 왼새끼줄에 고추나 생솔가지, 그리고 숯을 끼어 제작했을까? 고추는 남성 상징의 기능도 있지만, 붉은색이 양색(陽色)으로 악귀를 쫓는 기능을 한다. 생솔가지의 푸른색은 생번력(生繁力)의 왕성함을 상징하고, 숯은 썩지 않으면서 나쁜 것을 정화하는 힘이 있다. 또 검은색은 음색(陰色)으로 잡귀를 흡수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금줄이 액운을 방어하고 나쁜 기운을 쫓아내는 벽사(僻邪)의 기능과 갓 태어난 아기나 출산한 산모를 보호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출입 금지의 기능을 겸하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전통적 습속이 미신(迷信)이 아닌 과학적 지혜의 소산임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출산과 성장과 관련된 민속신앙으로 삼신신앙이 있다. 보통 삼신할매, 삼신할망이라 하는데, 아이를 점지해 주고, 산모의 출산 후 건강 및 신생아의 출산과 건강, 수명, 그리고 각 가정의 제액초복(除厄招福, 재앙을 미리 예방하여 없애고 복을 불러 들임)을 관장하는 신이다.

삼신은 삼신(三神), 산신(産神)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삼신은 한 분이라고도 하고 삼신할아버지와 함께 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삼신의 삼을 숫자 삼()으로 해석하여 세 분이라고도 한다. 이런 이유로 밥 세 그릇, 국 세 그릇, 정화수 세 그릇을 제물로 올리기도 한다. 이능화(李能和)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를 통해 가정신앙을 논의하면서 삼신의 삼을 ()’으로 표기하였지만, 숫자 삼의 의미로 보지 않고 태()를 보호해 준다는 생명의 탄생과 연관 지어 삼신의 성격을 단편적으로나마 드러내 주고 있다. 최남선(崔南善) 또한 인간의 생명을 잉태하는 기관을 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을 삼신이 관장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삼신은 세 명의 신을 모아 놓았다고 보아 삼신(三神)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출생과 관련한 신의 기능을 부각시켜 산신(産神)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을 지칭한다는 설과 산신(山神)이 삼신으로 음운변화하였다는 설이 있다.

여러 설 가운데 을 순수한 우리말로 보아 를 의미한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삼신의 이 우리말 동사 삼기다또는 삼다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한다. 상징적으로 보아 탯줄(삼줄)을 꼬아 생명을 만들어 내는 신이라는 의미로 삼신을 해석할 수 있다. 삼신의 의 우리말로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며, 아이의 출산을 돌보아 주는 신으로서 생명의 탄생과 연관시켜 삼신을 이해할 수 있다.(한국민속신앙사전)

금줄은 마을의 당터, 당산나무, , 장승, 솟대, 마을 공동우물 등 신성한 지역을 표시할 때도 걸어둔다. 이곳은 엄격하게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금줄을 걸면 속된 공간이 성스러운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속된 시간은 멈추고 성스러운 시간으로 빠져든다. 장독대에도 금줄을 쳤다. 장독 둘레에 금줄을 두르고 고추나 한지, 숯을 끼우는 방식이다. 때로는 장독 표면 바깥에 한지로 오린 버선본을 거꾸로 붙였다. 왼새끼로 꼰 금줄과 거꾸로 선 버선본의 비정상적인 성스러운 공간에 귀신이나 벌레, 잡균 등이 과연 범접할 수 있겠는가?

한편, 금기(禁忌)는 소극적 주술이다. 주술이 적극적으로 바라지 않는 재난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반면, 금기는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조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안에 귀신을 불러들이는 살구나무나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는다든지, 임신 중에 아이의 손발이 오리발처럼 되기 때문에 오리고기를 먹지 않는 것 등이다.

민속신앙에서 문제되는 깨끗함더러움’, ‘청정(淸淨)’부정의 이원론적 대립을 두고 볼 때, 금기는 더러움이나 오염 또는 부정에 걸리지 않고, 청정·맑음·깨끗함을 보장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종교적 오염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금기이다. 부정을 타는 것은 오염이다. 그러나 금기에서 오염감·더러움을 느끼는 마음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두려움이나 무서움, 그리고 위험감도 금기를 촉발하는 중요한 심리적 동기가 되는 것이다. 더러운 느낌을 줄 수 있는 금기의 대상 가운데서 우리들이 오관을 통해 직접 불결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오줌··가래, 그 밖에 여성의 경도(월경)들은 대표적인 것이거니와, 이 더러운 것들의 배설기관과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행동 또한 금기의 대상이 된다. 성행위가 그 본보기의 하나이다. 심지어 여성의 생산 행위도 같은 보기에 들 수 있다. 이 행위가 한편으로는 생명력·창조력의 원천으로써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을 생각할 때, 여성의 생산 행위는 민간신앙에서 상반되는 양면성, 곧 등가성(等價性)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기를 종교적인 것, 사회와 관련된 것, 인간과 관련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종교적인 것은 종교행사와 관련되어 있거나 그것을 둘러싸고 지켜지는 관습으로서 금기이다. 이것은 민속신앙의 여러 예에서 보이는 현상이다. 특히 마을 신앙에서 제관으로서 지켜야 할 금기, 제사음식을 준비하면서 지켜야 할 금기, 제의 기간 중 마을 사람들이 지켜야 할 금기 등이 있다. 사회와 관련된 금기는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집단의 관습으로 고착화된 것들이다. 이러한 예로 언어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에 관련된 것, 불쾌한 사물에 관련된 것, 손위 어른의 이름 등에 관련된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금기도 있다. 이것은 예상되는 재난을 피하고 건강한 생활을 도모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들이다. 가령 당산 주위를 더럽히거나 당산나무를 자르면 벌을 받는다거나, ‘손톱이나 발톱을 깎아서 불에 넣으면 해롭다등 여러 금기가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행하는 금기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임산부가 금하는 여러 가지 행위 금기와 음식 금기도 있다.(광양시지, 3, 807~808)

광양의 동제와 마을 신앙의 근저에는 유사 이래로 우리 민족의 자연 숭배와 같은 원시 신앙 그리고 주술과 같은 원시적 사고들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주술도 여러 논란이 있으나 원시종교의 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주술도 세계종교처럼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당이 주술사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심지어 치병(治病)의 기능까지 담당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인류는 과학 만능 시대를 살아간다. 성스럽고 신비적인 것은 모두 낱낱이 까발리고 모든 것을 과학적 잣대로 재단하고 인식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종교적인 관념마저 미신적이고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置簿)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러한 현실은 인간의 심성 중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성스러운 것에 대한 추구를 상실하고 속된 차원에 머무르게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에는 아직도 주술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다. 종교를 찾는 것은 근원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성스러움과의 만남을 추구하기 위해서이다. 아무리 과학의 시대라고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성스러움에 한번쯤은 귀 기울여 볼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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