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룡서 유배기간 학문 더욱 견고해져

연재를 시작하면서…
‘광양향토문화순례’에 나선다.
광양, 우리가 살고 있는 광양은 산하 그
어디를 가도 마냥 정겹다. 그곳에는
오랜 시간을 통해 문화의 층이 켜켜이
쌓여 생겨난 우수한 문화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역사적 문화적 의미가 큰 유적들이
시민과 광양시의 관심부족으로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남기기고 간
유적들을 찾아 기억속에서도 묻혀버리고
현실 속에서도 사라져가는 스토리들을
조금이나마 붙들어 문화적 풍요와
역사적인 넘나들기를 확장해가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먼저 유배지기행을 떠난다.

차제에 광양시는 광양시민신문이
연재하는 지역 향토 유적들에 대해,
적려유허지 등을 통해 향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길 권고한다.

영남의 도학자 갈암 이현일(1627~1704)

영남의 도학자 갈암 이현일(1627~1704)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옥룡면 옥동마을을찾았다. 사랑하는 광양 산하를 바람에 구름가듯, 구름에 달가듯이 내 벗 삼아 발걸음을옮기니 얼마나 기쁜가. 더욱이 시민들이 만들어 준 광양시민신문의 일원으로 발품을팔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는 조선 시대의 문제를 온몸으로 해결하려 했던 퇴계 학맥의 응축이자 영남 사림의 중심이 되기도 한 그가 남긴 광양 발자취는 누구보다 확연했다.

그가 옥동마을에 이배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15년 전인 1697년 7월 18일로 그의 나이 71세였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 70여일을 옥에 갖혀 온갖 고초를 겪은 뒤 함경북도 홍원에 유배되었고 다시 함경북도 종성에서는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는 이른바 위리안치 처지로 중죄인 취급을 받았다.

남정마을 서신구 극진히 모셔

함경북도 종성에서 53일간의 육로와 뱃길을 통해 비로소 옥룡면 옥동마을에 이배된 그는 건너 마을에 사는 남정의 월파 서신구를 만난 후 학문이 더욱 정밀해 졌음을 고백한다. 28살 아래인 남정마을 서신구(徐藎龜.1655~1714)는 통정대부시절 귀양 온 갈암을 금방 알아 차리고 자신이 소유한 장서수 백 권을 제공하며 대 학자인 그를 스승으
로 때로는 아버지처럼 모셨다.

갈암은 도학적 경세가로서 경치 수려한 옥룡의 유배생활은 물을 만난 것이다. 그는 옥룡의 그윽한정취를 벗 삼아 월파가 제공한 장서 수백 권을 빌려 이치를 완미하면서 학문에 전념 했다.“ 다시 세간의 이해와 영욕이 따로 있음을 의식하지 않게 되니, 경(敬)을 지키고 이치를 살피는 공부가 날로 정밀해 졌다”는 고백을 할 정도니 당시 분위기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갈암에게 장서를 제공해 학문이 더욱 견고해지도록 산파역을 한 월파 서신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월파 자신이 장서를 많이 소장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자는 평소 이천서씨 족보를 가지고 공부하고 있었다. 광양신문 편집국장 때도 그랬고, 광양향토문화연구소를 운영할 때도 그랬다.

광양의 이천서씨는 근 7백년을 뿌리 내리고 있으니 역사적인 향토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을 수밖에.그러던 와중에 갈암 이현일의 유배지를 주유하는데 역시나 이천서씨를 빗겨갈 수 없음을 또 한 번 각인한다. 실제 월파 서신구의 집안 내력을 보면, 신재 최산두 어린시절 스승이자 장인인 서극수 (徐克綏.1429~1496)는 이천서씨 18세 손이며,19 세 손 은 백 운 거 사 인 서 열 (徐悅.1447~1508), 와룡강에 암연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천일(千鎰.1483~1561)은 20세이며 월파 서신구는 24세 손으로 서천일(徐千鎰)의 고손(高孫)이다.

옥룡 초입인 우산리 월파마을은 서신구의 호를 따서 월파(月波)이며, 마을 왼쪽 바위에 자리한 유적비 월파대(月波臺)는 서신구가 통정대부를 끝으로 벼슬에 물러나 와룡강에서 틈틈이 낚시를 하던 곳으로 자신의호를 따서 월파대라고 칭한 곳이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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