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충희 한국대중음악박물관장
“대중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닙니다. 우리 근현대사의 감정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시대의 기록입니다.”
지난해 문화예술분야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자랑스러운 광양인상’을 받은 유충희 대중음악박물관 관장은 대중문화 연구자이자 수집가다. 30여 년간 모은 음반, 포스터, 악기, 앨범, 방송자료 등 수만 점의 아카이브는 단순한 취미의 산물이 아니다. 그는 음악을 통해 한 세기의 이야기를 복원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무대를 광양에도 마련하고 싶다고 바람을 품고 있다.
부산에서 30년 넘게 전력 엔지니어링 사업에 몸담아 온 유충희 한국대중음악박물관장이 전혀 다른 길인 ‘대중음악박물관’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는 오랜 시간 쌓인 음악에 대한 애정과, 치열했던 삶 속에서 얻은 위로가 있었다.
“원자력, 수력, 풍력, 태양광 등 우리나라 전력사업에 거의 다 관여했습니다. 일이 워낙 예민하고 민감하다 보니 스트레스도 컸죠. 그러다 음악을 들으며 위로를 받았고, 자연스레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시절 클래식과 팝을 즐기며 음악 수집을 시작한 그는 어느 순간, 대중음악이 자신의 삶에 가장 가까운 음악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대중음악은 그 시대의 사회상이 녹아 있는 기록입니다. 힘든 시기엔 더더욱 마음에 와닿죠.”
그는 “대중음악은 그 시대의 사회상이 녹아 있다. 힘든 시기엔 더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며 “처음에는 좋아서 모으기 시작한 LP 한 장, 포스터 한 장이 어느새 방 하나, 집 한 채를 가득 채우게 됐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모은 이 자료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일제강점기부터 분단과 산업화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그것을 누군가는 기록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쌓인 자료를 바탕으로 그는 2015년 경주에 한국대중음악박물관을 설립했다.
유 관장은 “원래는 부산에 세우려 했다. 부산시에 제안서를 내고 3년가량 추진했지만 일이 잘 안 풀리던 중 마침 지인이 경주를 추천해서, 결국 경주에 박물관을 개관하게 됐다”고 했다.
소리와 음악의 100년사, 박물관에 담다
경주 보문단지에 자리한 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다.
2층 전시관에는 1900년대 초 최초의 대중가요부터 BTS, 블랙핑크까지 우리나라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가 10년 단위로 구분돼 전시돼 있다. 최초의 직업 가수, 최초의 트로트, 최초의 코믹송 등 ‘최초’를 기준으로 한 콘텐츠 구성은 관람객들에게 단순한 흥미를 넘어 음악사적 인식을 일깨운다.
3층은 소리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전 세계 단 1대뿐인 프랑스 ‘레옹 스카’의 축음기,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팀플 축음기, 미국의 전설적 음향기업 웨스턴 일렉트릭의 유성영화용 스피커 등은 소리에 대한 유 관장의 집요한 수집과 집념의 결과물이다.
그는 이 모든 장비들을 자비로 수입해 전시했고, 수백억원에 달하는 투자에도 후회는 없다고 했다.
유 관장은 “사실 강남에 아파트를 샀어야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이일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며 “하이엔드 오디오가 유행하기 전부터, 빈티지 아날로그의 감성에 매료됐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진짜 소리, 진짜 기기를 모았다. 창고에 보관하며 몰래 모은 오디오들이 결국 이 박물관을 채웠다. 집사람이 이혼을 안 한 게 그저 감사할 뿐”이라며 웃음 지었다.
광양을 대한민국 대중음악 산업의 거점으로
유 관장은 고향인 광양에 한국대중음악박물관 분원을 설립하는 구상을 수년 전부터 품어왔다. 직접 광양시를 찾아 계획서를 제출하고, 문화복합단지 구상에 발맞춘 제안도 했다.
몇 년 전, 광양시장을 찾아가 광양을 음악 산업 도시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대중음악박물관을 기반으로, 공연장, 녹음실, 창작공간을 갖춘 메모리얼 타운을 만들면 산업적으로도 큰 효과가 있다고 제안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무산됐다.
유 관장은 “좋은 의지가 있었지만, 행정과 정치 현실은 쉽지 않았다”며 “지자체장부터 문화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비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제안도 그냥 흘러가 버린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광양에 대중음악박물관 분원을 세우고 싶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음악 공연장, 녹음실, 창작공간, 박물관을 연계한 ‘뮤직 메가타운’을 광양에 구축할 수 있다면, 문화산업 도시로의 도약도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는 “광양이 포스코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음악 산업이라는 새로운 콘텐츠로 미래 세대를 위한 산업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며 “건물만 지어준다면, 제가 가진 전시 콘텐츠로 채우고 운영하겠다. 광양이 대한민국 대중음악 산업의 거점이 되는 게 제 바람”이라고 소망했다.
이어 “전 세계 관광지는 결국 ‘볼거리’와 ‘이야기’로 먹고산다. 조그만 축음기 하나로도 마을 경제를 살린 미국 시골 마을처럼, 광양도 한국 대중가요의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다. 지자체의 확고한 문화 마인드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유 관장은 “광양은 철강 도시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문화예술 측면에서는 아직 충분히 조명되지 못한 곳이다. 저는 광양이 문화적 자산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대중음악박물관이 그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광양이 산업과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복합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