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응 스님(대한불교조계종 가피사 주지)

만응 스님(대한불교조계종 가피사 주지)
만응 스님(대한불교조계종 가피사 주지)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그러면 서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진리가 되리라

중국 당나라의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가 남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은 고도로 복잡하고 경쟁적인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한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 경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의 현실적인 자화상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자만심과 자존심의 덧
'가짜 주인'의 슬픔

우리는 학생시절부터 '자존감'이 있어야 된다라는 교육을 받고 자라왔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자만심(自滿心)과 자존심(自尊心)이라는 덧에 걸려 진짜 주인의 자리를 놓치고 있습니다.

자만심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타인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마음입니다. 예컨대 SNS의 화려한 이미지나 직함, 물질적 성공에 취해 '나는 남들과 다르다', '나는 최고다'라고 착각하며 벽을 쌓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늘 불안합니다. 그 성취나 외적 조건이 무너지면,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만은 자신을 세우려다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입니다.

자존심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자기 존중(Self-Respect)'이 아닌, 남에게 깎이거나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허상에 가깝습니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내 삶의 기준을 오로지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둡니다. 이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타인의 평가라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증거입니다.

임제 선사가 말한 '작주(作主, 주인이 됨)'는 이런 외적 조건이나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는 '가짜 주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의 흔들림 없는 중심, 바로 '깨어있는 자기(Self)'를 확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내 안의 청정한 본성(眞如佛性)에 근거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주체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시비분별(是非分別)의 늪진짜 진리'를 가리다

현대 사회는 '시비분별(是非分別)'의 아수라장입니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너와 나, 우리 편과 네 편을 끊임없이 나누고 판별하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정치적 견해, 경제적 계층, 심지어 커피 취향까지도 시비의 대상이 되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분별심은 우리의 마음을 쉴 틈 없이 흔듭니다. 모든 것을 '선택의 문제'로 환원하며,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더 좋은 직장, 더 나은 배우자, 더 멋진 기회를 찾아 끊임없이 '현재 있는 곳'을 부정합니다. 마치 지금 이 자리는 부족하고 결함이 가득하며, 진정한 행복과 진리는 '다른 곳', '미래의 어떤 조건'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임제 선사는 말합니다. "입처개진(立處皆眞), 서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진리가 되리라"

우리가 옳고 그름을 가르고, 여기와 저기를 비교하며 번뇌하는 순간에도, 본래의 진리는 털끝만큼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주인의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있는 이 자리를 '도피해야 할 곳', ‘포기해야할 곳이 아닌, '삶을 완성해야 할 기회의 무대'로 인식할 때, 그곳이 바로 살아있는 진리의 현장이 됩니다. 주체적이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임하는 곳이라면, 출근길 복잡한 지하철도, 쌓여있는 업무 속에서도, 심지어 고통스러운 순간 속에서도 배움과 깨달음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체적 삶으로 가는 길: 경전의 가르침

결국 '수처작주 입처개진'은 어떤 환경에서도 가볍게 휘둘리지 않고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며, 그 중심에서 주체적인 삶의 자세를 확립하라는 준엄한 호통입니다. 이는 불교의 오랜 경전 구절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한국 불교의 유명한 경전 중 금강경(金剛經)”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우리의 마음이 외부의 특정 대상, 특정 생각, 특정 시비분별에 '머무르지(所住)' 않고, 항상 깨어있는 상태에서 주체적인 작용(生其心)을 일으킬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습니다. 자만심, 자존심, 시비분별 모두 ''라는 환상에 머무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작주'하는 마음을 낼 때, 그 순간의 모든 상황이 '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불안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 주인의 자리를 잃고, 타인의 시선과 끊임없는 비교에 휘둘리는 나약한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수처작주'의 자세로 내 삶의 주인이 되어보십시오. 당신이 서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立處)가 온전한 진리(皆眞)의 세계로 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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