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과학 경시 대회에 참여하느라 이모네에 가 있던 아들을 데리러 오스틴에 가는 길이다. 이제 네 시간 후면 허전했던 옆구리가 꽉 채워질 것이다. 차는 초여름의 초입에 접어든 오 월의 들판을 달린다. 못 다한 열정을 태우기라도 하듯 데일듯 뜨거운 텍사스의 한 낮 숨막히게 훅훅거리는 김마저 사랑스럽고 달다.

온몸의 세포들은 벌써부터 주인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웅성웅성거린다. 제 새끼들을 곧 만날거라는 에미로서의 소박한 기대와 흥분으로 모처럼 세상에 얼룩졌던 몸과 긴장된 마음은 저만큼 물러났다. 처음 들뜬 마음과는 달리 이내 졸음이 몰려왔다. 남아있는 식구들 입성 챙기랴, 언니네 갖다줄 것 이것저것 챙기랴, 들뜬 마음 다독거리랴 밤잠을 설친 탓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게하는 신영옥의 노래 ‘그리운 이름이여(베르디)’를 듣다가, 성경 말씀도 듣다가, 아이들과의 재회장면을 상상하며 멋진 여배우처럼 품위있는 대사도 흉내내어 보다가, 껌도 씹어 보다가 온갖 몸부림도 소용없이 나도 몰래 깜빡 깜빡 졸고 있다. 수다를 떨면 좀 나을까? 궁여지책으로 만만한 아버지께 전화를 건다. “억울하고 분한 일이나 슬픈 일을 생각해봐라. 그럼 잠이 달아날 것이다” 억울하고 분했던 일? 체질적으로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슬픈 일? 슬픈 일! 내 생애 슬픈 일…… 어머니를 잃은 일……어머니! 이제 내게 슬픈 단어가 되어버린 어머니. 돌아가신지 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지금도 어머니 생각만 하면 아무데서나 눈물이 난다. 투병 중인 어머니 곁을 일 년 넘게 지키면서 난 무시로 목이 잠겼다.

봄이면 꽃이 핀다고, 여름이면 초록이 눈부시다고, 가을이면 낙엽이 진다고, 겨울이면 눈이 쏟아진다고…….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고 자연스레 어머니와 연결되던 그 시절. 하루종일 울음을 품고 살았지만 정작 맘편히 소리내어 울어보지는 못한 세월이었다. 당신 맘 상할까봐, 지레 약해지면 안될까봐, 누가 보고 있어서.그 때마다 꿀꺽꿀꺽 집어삼킨 눈물은 가슴 속에 돌덩이로 들어앉았다. 그렇게 잘 참아내던 눈물을 딱 한 번 어머니 앞에서 보이고 만 적이 있다.

여느 날처럼 어머니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있었다. 잠시라도 통증을 잊게 해드리려고 손주들 얘기를 조랑조랑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한숨처럼 뭐라 그러신다. 말할 기운도 없는 어머니의 말씀은 늘 한숨처럼 들려서 난 손길을 멈추고 귀를 귀울였다.만삭의 임산부보다 더 부푼 어머니의 배가 힘겹게 오르락 거린다.
가파르기만 했던 당신 삶처럼. “누워 있으믄 내 발이 안보여야. 후- 이 배만 꺼져도 좀 살 꺼 같은디” 밤새 나무에서 수액을 뽑아내듯 어머니 배에서 빼낸 물이 링거 병으로 세 병이나 되건만 여전히 부풀어 있는 어머니의 배. 쪼르륵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뱃 속의 물. 어머니의 피눈물을 받아내는 것만 같아 어젯밤 얼마나 이를 앙다물며 울음을 참아냈던가. 편한 숨 한 번 쉬어보는 게 소원이라는 어머니. 뭔가 위로의 말을 해드려야 겠는데. 뭔가 희망을 드리고 싶었는데. 고구마 줄기처럼 마른 어머니의 손을 잡자 기어코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차마 우는 얼굴을 보일 수가 없어 장작개비같은 어머니 다리에 얼굴을 묻고 피토하듯 울음을 쏟았다. 뛰쳐 나갈 수도 얼굴을 들 수도 없어 어떻게든 추스려 보려 했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었다. 어머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썩거리는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야야, 졸리냐? 니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다. 그대로 엎드려서 한숨해라” 얇은 홋이불이 내 눈물로 이미 흠씬 젖어 모르실리 없건만 애써 모른척 해주시던 어머니. 어머니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어머니도 참고 계신데 어머니도 맘놓고 한 번 울어보지 못하셨는데 내가 그만 상처를 덧내고 말았던 그 기억. 평생 드린 거라곤 상처밖에 없는 딸. 해드리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데 이제는 곁에 안 계신 어머니. 한스럽고도 한스러운 이 아쉬움, 이 그리움.

달려도 달려도 오스틴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낯선 길만 끝없이 계속됐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근처 주유소에 차를 대고 물어보니 한 시간이나 더 지나왔단다. 어머니 생각에 퍽퍽 울다가 모처럼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 맘놓고 꺽꺽 울다가 그만 길을 놓쳐버린 것이다. 내가 어머니께 효도할 수 있는 길을 영영 놓쳐버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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