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렬의 쉴만한 물가

5월 반토막 자리까지 지내오면서 감사해야 할 날이 참 많았습니다. 5월의 첫날은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기억하며 고마워 해야했고, 다섯번째 날엔 건강하게 자라준 아이들에게 고맙다 해야했고, 여덟번째 날엔 어버이의 은혜에 카네이션이 고마워했고, 열두번째날은 간호사의 날, 열닷세날엔 스승님께 감사할 날이었고, 이제 스무하룻날엔 부부의 날로 함께 살아준 아내와 남편들을 고마워하는 날이라 합니다.

음력 초파일에는 욕심으로 점철된 세상에 자비의 가르침을 설파한 석가모니의 탄신을 또한 감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오늘이 있기까지 붙여준 고마운 많은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어느새 누군가에게 그런 고마운 사람이 되고 있나 생각해 보면 여전히 부족함에 부끄러워집니다.

5월엔 탈도 많았습니다.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독재정권이 시작된 날이 하필이면 스승의 날 다음 날입니다. 이 정권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는 커녕 오히려 경제적인 식민지로 전락케 했고 아직도 이것을 혁명이라 세뇌된 무리들이 여전히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의 요직에 자리하고 있으며, 차기 정권도 이 독재의 딸이 압도적인 대권 후보로 논의되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 옆 동네 중국에선 문화혁명이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을 잊을 수 있을까? 독재자가 죽고 이 땅에 민주화가 오는가 했더니만 또 다른 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했고 이것을 반대하는 민주화의 물결을 군화발로 짓밟아 스러져 가게 했던 결코 잊을 수 없는 오월 그날, 광주민중항쟁의 날도 열 여드레날입니다. 거기다가 무엇보다 가슴 아픈 날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일도 이 달 스물세번째 날입니다.

그런데 없는 비리 들춰내서 그날을 가리려고 또 요 며칠 고인을 욕보는데만 깨알같이 간사한 언론들과 이 무능한 정권.

연초록 새순이 산천을 물들이고 연분홍 철쭉과 온갖 꽃이 피어 아름다운 5월은 예전에는 보릿고개가 있는 때여서 배고픈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에 얇아지고, 감사해야 할 날이 많아 가벼워진 지갑, 그래서 고마운 마음 빈 지갑 만지작거리며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안타까움으로 고달픈 달이기도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과 잊고 싶은 것이 많은 시간들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 땅에 희망보다 절망케 하는 일이 더 많아지는 현실은 자꾸만 이 모든 일들을 외면하고픈 욕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날도 많고 탈도 많았으나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있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맡겨진 과제요 선물임을 믿습니다.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으나 지금은 곁에 없습니다.

다만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뒤에 오는 이들에게 받은 만큼 고마움을 그네들에게 릴레이처럼 나누고 베풀어 전해야 하겠죠. 그리고 생각하기도 싫지만 잊을 수 없는 그런 날을 거울 삶아 다시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깨어 살아가는 것이, 꽃잎처럼 스러져 간 많은 이들이 그토록 살아가고 싶었던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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