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석태 교육평론가
#. “나는 사회고등학교 학생입니다”;

한 10여 년 전에 한겨레 잡지에서 읽은 글인데 ‘사회고등학교’라는 좀 색다른 제목의 수필이었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줄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수필의 필자는 대구의 한 여중 과학교사인데, 그 여선생님은 우연한 기회로 자기와 사제지간이 된 한 18세 청소년 이야기를 글로 쓴 것입니다. 사제지간이라 해도 여느 선생-학생 사이와 같은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길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세상사를 주고받다가 선생님이 되고 제자벌이 된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그 청소년은 학교에 적을 둔 학생이 아니었으며, 필자 곧 여교사가 봉사활동을 하는 모임에서 만났던 청소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핵심은 그 청소년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여교사가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그 젊은이 대답이, “저는 누가 나더러 어느 학교학생이냐고 물으면, ‘사회고등학교 학생’이라고 대답합니다.”라는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독자님도 사회고등학교라는 말에 그게 어디 있는 학교냐고 고개를 개웃둥 거리겠죠. 사회고교는 어떤 일정 장소를 갖고 있는 학교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도처에 있 산재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더 알기 쉽게 풀이하자면 그 젊은이처럼 등교거부 학생(?)들이 굳이 재학하는 학교를 물으니 그런 이름을 댄 것인데, 필자는 그 이름이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다니기를 거부한 청소년들, 세간에서 등교거부학생이니, 혹은 탈락자, 또는 낙오자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들은 그와 같은 사회의 편견에 맞서기 위해 거의 자생적인 ‘사회고’라는 것을 탄생시킨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반드시 학교의 교과목에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지붕이요, 땅이 교실인 이 사회, 세상 전체가 학교가 아닙니까? 그래서 굳이 이름을 붙이자니, ‘사회’ 고등학교가 된 것으로 이해가 갑니다. 필자는 점차 그와 같은 학생 수가 늘어나지 않을까 합니다. 동시에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회’가 그런 ‘사회학교’를 인정하지 않고, 또 그런 사회학교 학생을 색안경으로 보려는 편견 또는 교육은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입니다. 소위 그 사회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을 만난 시민은 대개 그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말 한 마디에 더 이상 입을 다물어버린다고 합니다. 무슨 큰 범죄인이나, 또는 전염병 환자이기나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 학교 안 간다는 것이 무슨 큰 죄악이냐?

“내가 학교에 안 간대서 뭐가 나쁘단 말이야?!”라고 소위 등교 기피자 청소년 여러분이 당당히 말한다 해서 그것을 사회가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금도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상해를 주거나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들의 부모는 걱정하고 슬퍼하고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내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걸렀던 기대감을 배신당한 것에 대한 실망감일망정 타인을 괴롭힌 나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쁜 짓이란 쉽게 말하면 타인에게 고통을 준 일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등교거부 청소년들이야말로 피해자입니다.
그들은 학교에서 괴로움을 당했기 때문에, 그 괴로움을 피해 나온 자들이어서, 그런 의미로 말하자면 학교가 가해자이고, 그들을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박해하는 자가 학교에 있다면, 학교 쪽이 나쁜 일을 했다고 할 것입니다.

사회가 보는 색안경에 그들이 ‘낙오자’로 비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들은 낙오자입니다. 그래서 뭐가 나쁘단 말입니까? 세상 어른들이 ‘학교제도’라는 궤도를 부설했습니다.

그리고 그 궤도상으로 교육이라는 열차를 달리게 하고, 그 열차에다 아이들을 밀어 넣은 것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열차 안의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열차 밖으로 전락해서 낙오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열차의 진행방향에서 일탈한 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는 그들에게 “그래, 난 낙오자다. 뭐가 나쁘단 말이냐?!”라고 가슴을 펴고 소리 지르라고 충고합니다.

필자의 작은 서가에만 해도 ‘바보 만들기’, ‘학교는 죽었다’, ‘학교 없는 사회’, ‘아이들을 잡아먹는 교사들’, ‘학교에서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과 같은 제목의 책들, 곧 현행 학교교육 자체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교육이 붕괴되어가서 있는 증좌가 아이고 무엇이겠습니까. 한국의 공교육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교육행정 책임 장관이 바뀔 때마다 입시 제도를 비롯하여 교과목 편성 등 크고 작은 교육 방침이 바뀝니다.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말과는 완연히 역행하는 겁니다.

#. 공교육 부적응 학생을 위한 방안은 없는가?

현재 국내에는 200에 가까운 비인가 대안교육시설에서 약 9천 명이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교회들이 종교교육을 통한 정서적인 안정과 함께 국제적인 인재육성을 목표로 교육을 하고 있는 비인가 교육기관까지 합치면 공교육 기관이 아닌 교육시설과 그런 곳에서 교육 받는 청소년의 수가 앞에 든 숫자보다 훨씬 많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청소년이 공교육에 순응 못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가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교육이란 크고 넓은 개념을 공교육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은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구미 여러 교육 선진국에서는 교육이 우리의 기성 고정 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양상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특색 있는 교육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나 스스로 커리큘럼을 만들어 교육관청에 간단한 신고 절차만 거치면 어렵지 않게 학교가 되고, 심지어 학력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교육을 인정하지 않는 경색된 획일적 후진국 형 교육정책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근 우리 교육부가 각급학교에 대해 세월호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랑 리본을 착용하지 말라는 엉뚱한 명령까지 시달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 허둥지둥 회수하는 꼴을 보이기도 했죠. 그런가 하면 대통령의 교육 정책을 자문할 권한과 임무를 지닌 청와대 교육담당비서관이 임명된 지 석 달 만에 돌연 사임하는 진풍경도 벌어집니다. 대한민국 교육정책의 난맥상을 보여준 사례인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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