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초심’ 그리운 고향

광양제철소 건설로 정든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해 살고 있던 옛 금호도 주민 50여명은 ‘금호도 이주민의 날’을 맞아 지난 25일 오전 11시 금호동에 있는 ‘금호도 이주민의 탑’에서 망향제를 지냈다. 그리고 오후엔 광영중학교 실내체육관에서 서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달래며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다.

올해는 광양제철소가 금호동에 건설되면서 주민들이 이주한 지 만30년이 되는 해로 주민들의 마음을 더 애잔하게 했다.

망향제를 주관한 장옥기 금호회 회장은 “수구초심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제를 지내고 광양제철소가 들어서고 주택단지로 변한 금호도에서 과거의 모습을 다시 찾을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지형 곳곳엔 이주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다”며 “옛 고향을 잊지 못해 해마다 함께 모여 망향제를 올리는 이주민 모두가 더욱 화합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금호회는 지난 2006년 금호동 백운쇼핑 앞 공원에 ‘금호도 이주민 탑’을 건립하고 매년 이주민의 날 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다. 사람 ‘人’자의 형태로 지어진 ‘금호도 이주민 탑’은 이주민들과 광양제철소가 화합과 상생을 해나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금호도 이주민들이 이주한지도 한 세대 3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금호도를 기반으로 광양은 철강과 항만의 도시로 성장했다.

30년 전 고향을 떠나야 했던 금호도 주민들의 애환을 되새기며 금호도 이주 과정과 금호도의 지명 유래를 정리해 본다.

김의 바다에서 철의 바다로

금호도는 주민들이 겨울철 김을 주생업으로 하고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반농반어(半農半漁) 섬마을이었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현재 금호대교 밑을 다니던 한 늙은 어부의 나룻배였다.

그러던 중 1974년 정부는 제2제철소 건립을 계획하고 입지선정에 착수해 아산만과 광양만을 정밀조사한 끝에 지역의 균형발전과 안보차원에서 광양만을 제2제철소 입지로 1981년 11월 4일 최종확정한다. 제2제철소의 건설은 부족하게 될 내수 및 수출용 철강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환책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금호도와 태인도 앞바다를 매립해 부지450만평을 조성해 제1기설비부터 제4기설비로 2000년까지 연간1200만톤의 철강을 생산할 계획을 세웠다. 금호도엔 제철본부와 사원주택단지 태인도엔 관련업체들이 들어서기로 됐다.

1982년 1월 5일 ‘광양군 골약면 금호리 이주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금호도 이주민의 보상문제는 우여곡절 끝에 토지·건물보상 54억6천8백만원, 어업권보상 1백55억3천만원, 어구 및 어선보상 31억2천2백만원이 지급됐다.

금호도 주민들은 처음부터 집단이주를 희망했고 제철소의 배후도시 상가지역에 정착지를 마련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광양군은 광양읍 주위, 마동리 주위, 옥곡면 주위 등으로 분산 이주시킬 것을 검토했고 주민들은 현재 금호대교 주위, 마동리저수지, 와우저수지 근처를 주장했다.

1982년 5월 7일 제철소와 광양군 측이 다시 협의해 옥곡면 광영리 일대를 주거지로 확정하고 1982년 7월 16일 광영리 일대 129만㎡을 산업기지 개발구역으로 추가 지정했다.

이에 대해 금호도 주민들은 지역이 너무 협소하고 제철소와 4㎞나 떨어져 있으며 이미 마을을 형성해 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원주민과 함께 사는 것은 힘들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당초계획대로 집단이주지 조성 계획이 진행돼 1982년 12월 7일 광영동이주단지 공사가 착공했다.

1983년 1월 13일 금호도 이주대상 304세대 중 42세대는 개별이주를 희망했고 나머지 262세대는 집단이주를 희망해 262세대는 1983년 1월 20일 택지조성 조감도에 의거해 각 개인별 주거위치를 추첨했다. 주택형태는 20.6평에서 25평까지 다양한 구조를 선택해 1983년 10월 30일 준공을 했다.

가옥철거는 선공사 해당지역인 32가구부터 시작했으며 금호동 주민들은 1983년 8월 23일부터 집단이주가 시작돼 10월말까지 금호동 주민 광영집단 이주가 완료됐다. 이로써 금호도는 김의 바다에서 철의 바다로 바뀌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고향 기억해야 할 금호

현재 금호동은 원래 금호도, 소당도, 금당도, 비운도, 대시도, 소시도 등 6개의 섬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광양제철소가 들어서면서 금호대교 건설로 육지와 연결돼 섬이 아닌 금호동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잃어버린 고향이지만 기억해야 할 금호도, 광양시지 제4권의 광양의 마을편에 나온 금호 지명의 유래를 간추리면 이와 같다.

금호(金湖)의 옛 지명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서기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우도(牛島)라고 기록돼 전하며 서기 1740년경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우도(牛島)라고 표기됐고 서기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 제6책 전라도편에는 옥곡면에 속하여 우도촌(牛島村)이라 하여 고을명이 기록돼 전한다.

그 이후 서기 1872년에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 금도(金島)라고 표기되고 서기 1899년에 편찬된 돌산군지 설명편에 금도(金島) 또는 금호(金湖)로 한다고 기록돼 있다.

한편 우도(牛島)가 금도가 된 것은 본디 토박이말로 ‘소섬’이라고 부르던 섬을 한자로 빌려 쓸 때가 우도(牛島)라 했고 ‘소’는 ‘쇠’가 돼 ‘금(金)’자로 표기하여 금도(金島)라 한 것으로 추론된다.

또한 금호도(金湖島)라고도 쓰이는데 섬이라고 하지만 광양만 안쪽에 있어서 바다를 호수로 보고 호수 ‘호(湖)’라고 멋을 부려 쓴 것으로 보인다. 태인도(太仁島)를 인호도(仁湖道), 길도(吉道)를 길호도(吉湖道)로 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금호동을 쇠섬, 금도, 금호도 등으로 불러 왔는데 현재 이곳 광활한 바다 위에 대규모 제철소가 들어서 철을 생산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옛 선인들이 마을 이름을 지은 선견지명은 우리 후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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