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태 교육 에세이

▲ 강석태 교육평론가
* ‘학교화’된 사회에 갇힌 사람들;

필자는 이 연재를 통해 교육도 진화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전통적인 학교문화가 부정적인 양상을 띠고 있으며, 심지어 학교 무용론까지 대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상 오늘의 학교는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공자가 말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않는가라고. 그처럼 배움, 곧 공부가 즐거워야 할 터인데 그것이 도리어 고통을 준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이 등교를 기피하고 가정에 칩거하거나 거리를 방황하거나 한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지만 가정에서 부모의 교육을 받는 이른바 홈스클러도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학생들, 특히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은 학교가 저들에게 대해 어떤 작용을 하는가를 직관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이 말은 어쩌면 독자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종래의 학교교육에 대해 추호의 의문을 갖지 않고 순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이 학교가 자기들에게 어떤 작용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다음의 글을 천천치 새겨 가면서 읽어주기 바란다. 이해하기 힘든, 곧 당신의 고정 관염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말들이 튀어나올 것이기 때문에 미리 귀띔하는 것이다.

첫째, 그들을 학교에 넣는(수용하는)것은 그들로 하여금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과 목적 자체를 혼동시키기 위함이다.

둘째, 과정과 목적의 구별이 애매모호하면 새로운 논리가 필요하다. 그 논리라는 것은, 손을 쓰면 쓸수록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든가, 또는 단계적으로 증가시키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란 논리이다.

셋째, 그와 같은 논리로 그들이 ‘학교화(schooled)’되면, 학생은 이제 교사로부터 교육 당하는 것과 학생 자신이 학습하는 것을 혼동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학년이 올라가면 그만큼 많은 교육을 받은 것이며 졸업장을 받으면 그만큼 능력이 붙은 것인 양, 막힘없이 말을 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할 능력을 갖춘 것인 양 혼동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회복지사업이 사회생활의 개선인 것인 양 생각하고, 경찰의 보호가 안전인 양, 무력의 균형이 국가의 안전인 양, 악척같이 일하는 것 자체가 생산 활동인 양 오해하게 돼 버린다.

그래서 건강, 학습, 위엄, 독립, 창조와 같은 가치는 그와 같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제도의 활동과 거의 같은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리고 건강, 학습 등이 증진 되느냐 여부는 병원, 학교, 및 그 밖의 시설 운영에 보다 더 많은 자금이나 인원을 할당하느냐 어쩌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이상의 견해는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탤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의 사회학적 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인바, 그는 자발적인 원칙에 근거한 체계적 사회행동이론을 발전시킨 학자이다.

그가 말한 자발적인 원칙이란 여러 가지 가치나 행동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은 상당부분 자우의지가 자유의지가 작용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치의 제도화를 추진하면 반드시 물질적인 환경오염, 사회의 분극화(빈부의 격차 따위), 및 사람들의 심리적인 불능화등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들 3가지 현상은 나아가 지구를 파괴하고,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불행을 낳는 3개의 기둥이다.
그리고 비물질적 요구가 물질적인 것으로의 수요로 변질되는 경우에는, 바꿔 말하면 사람들이 건강, 교육, 교통, 복지, 심리적 치료와 같은 가치를 제도로부터 받는 서비스, 또는 세도에 의한 친절로부터 얻은 결과로서 얻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이 파괴의 과정이 얼마만큼이나 심하게 촉진되는가는 우리의 일상이 나날이 중명하고, 우리가 나날이 겪고 있는 실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은 현실이 바로 우리의 주변에서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이나 언어를 특징짓고 있는 인간의 본질과 근대적인 제도의 본질을 사로 관련을 지우면서 그 상호관계를 뚜렷이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기 위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우리 사회가 ‘학교화’된 것에 착목해서 그것에 대해 우선 알아보기로 한다.

우선이 학교화란 낱말이 매우 낯설 것이다. 학교는 쉽게 말하면 ‘가르치고 배우는 마당’이다.
가르치는 것은 어떤 내용(지식, 경험, 기술 등)을 교사라는 직책을 가진 자가 학생이라는 미숙자에게 지식, 경험, 기술 등을 과과과목으로 해서 학생에게 전달 내지 주입시키것이다. 거기서는 교사가 학생은 객체이다.

그와 같은 주객 상태가 현실적으로 학교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적용되고 있다.
교육면을 보면, 유복한 가정의 자녀이건 빈곤 가정의 자녀이건 간에 그들을 다 같은 제도에 의존하도록 하기 위한 비용은 거의 동액이다.

이것은 부유층이나 빈곤층이나 다 같이 학교와 병언에 의존하면서 그것이 그들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만들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나 병원은 모두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교육을 하거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거나 신용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이렇게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제도에만 의존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제도화’라는 굴레에 옭매여서 살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노예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학교화’는 곧 권력에 의한 사회통제를 목적한 사회제도화의 일종이며, 이것은 바로 전 세계를 한 사람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빅브라더(Big Brother)의 무서운 음모의 먹잇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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