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 김귀환 순천제일대 교수
우리 청소년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대학 입학을 위한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되고 있었다.

1970년대 우리 정부는 청소년들에게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귀가하라는 방송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10시 이전에 청소년들의 안전한 삶을 담보하기 위해 반강제적 공적인 귀가 종영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 당시 우리 청소년들은 갈 곳이 그리 많지 않았으며, 환경적으로는 그리 훌륭하지 않은 집과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 부재로 귀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우리 청소년들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사회의 급변으로 어른들에 의해 청소년들을 유혹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다.

1990년대에는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방과 후 귀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사회는 나라의 미래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회문제들을 우리 자식인 청소년에게 돌렸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에게 귀가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찍 귀가하라는 말을 할 근거가 가정, 학교, 정부 정치인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에게는 귀가할 집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대화 없는 가족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가족은 함께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족 간에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가족구성원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떨어져 살고 아버지는 일하는라 집에 없고 어머니는 일하는 경우도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녀를 학원으로 내몰기에, 집은 있지만 가족이 없는 집이기에 함께함이 없으며, 함께함이 없으니 대화의 상대가 없으며 따라서 대화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집들은 조용한 것이 아니라 적막하다. 우리 청소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망각한 것 같다. 한 때 유행하였던 전인교육은 사라진 지 오래며 그곳은 학생들이 잠자는 곳으로 변하고 있음에도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정부와 학교 관계자들이나 학부모들은 학원을 생각한다. 우리의 정부는 우리의 청소년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전교조나 학부모 눈치를 보며 학원에 대한 것보다는 청소년들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정치인들도 그런 것들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대화를 위해 그들 자신들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나 시민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청소년들과 소통을 하여야 한다. 교육에 연관된 교과부와 교육 관계자들은 학부모들에게 초등학교시기에는 많은 것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한다.

물론 공부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학교 시기에는 공부해야 한다. 고등학교 시기에는 공부만을 해야 한다.
이것이 잘 지켜지는 경우 그들은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반면에 언론은 공부도 해야되고 놀기도 해야 되고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을 위해 학부모들은 돈도 벌어야 되고 몸짱도 되야 한다고 한다. 교과부와 교육 관계자들이 만들고 집행하는 모든 교육정책에 연관된 것들은 학교가 아닌 모든 것을 학부모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근데 문제는 우리 학부모들이 슈퍼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소통이 필요하다. 청소년들과 학부모로 구성된 가족에서만 소통이 필요한 것이 아닌 우리사회 모두가 청소년들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그들과의 소통을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그 동안 많은 대화가 있었지만 정작 그들에 대한 이해나 소통이 안됬다는 이야기는 전달이나 지시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화란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며, 청소년과의 소통의 토대는 청소년에 대한 신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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