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렬의 쉴만한 물가

아마도 그게 6월 즈음의 일인듯 합니다.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해서 6월이 되면 학교에서 웅변대회 등을 열곤 했었습니다. 저학년 때에는 그저 형 누나들이 하는 것만 그냥 봐오다가 막상 그 웅변을 해야할 학년이 되었을 때 그렇게 유창한 이야기며 웅변꺼리들이 어떻게 지어지고 만들어 졌는지 신기했고, 사실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산간 오지에 살았던 제게 웅변도 낯설거니와 어떤 도덕적인 이야기와 반공과 통일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이야기들 외에는 그리 뭐 딱히 웅변할 꺼리도 없었지요. 그래서 웅변 원고를 써오라는 선생님의 이야기에도 도무지 원고지 한 두 장을 채워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잘 살아 봅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어머니, 아버지 고맙습니다! 훌륭한 사람 될래요!" 뭐 이런 이야기 말고는 더 무엇을 이야기 한답니까? 그리고 "이 연사 강력하게 강력하게 외칩니다!" 두 손 들고 외치는 것 까지는 좋은데 구구절절히 설득력을 가지고 내용 있는 이야기를 직접 만드는 일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기어이 전학년이 하는 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난감해 하는 저에게 선생님이 웅변 원고가 적힌 책을 한 권 주셨습니다. 간신히 하나 고른 원고를 그대로 웅변을 하기로 하고 열심히 웅변을 하고 내려온 저에게 선생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너 유신이 뭔지나 아니?" “...”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원고로 웅변을 했던 것입니다. 박대통령 장례식날에 어머니랑 동네 어르신들이 라디오 들으시면서 눈물 흘리실 만큼 당시 시골에선 그 일에 대한 이의 제기는 감히 생각도 못할 시기였고, 초등학생이었던 제가 유신이 뭔지 무얼 알았겠어요. 아마도 선생님은 무척 난감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지한 시절을 돌이켜 보니 그냥 씁쓸한 웃음만 나옵니다.

앵무새같이 써준 원고만 읽으면서 양심을 파는 것이 괴로워 시작된 언론사의 파업이 시작 된지도 수 일이 지났는데 하나둘 지쳐가고, 급기야 흔들고 회유하는 손에 넘어가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그래도 아직 흔들림 없이 깃발을 들고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이들을 응원합니다. 허나 또 한켠에서는 앵무새같은 말로 지난 총선 유세현장에서 반복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유신공주(?)는 공약을 헌신짝처럼 뒤집 버렸고,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미소로 연일 언론에 비춰지고 득의양양 이미 대권을 차지한 것 같은 행보 속에 심장도 없는 것 같은 무리들이 줄을 서는 모습은 가슴이 답답해 지게 합니다.

지금은 누구를 만나도 가슴에 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껍데기만 요란하게 빈말만 하는 그런 웅변같은 대화 말고 가슴에 아로 새길 수 있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시대를 옳게 분변하며 행동하는 양심이 있는 그런 삶이 묻어나는 이야기 함께 외치고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이 땅을 지키다 순국하신 분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