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높이 오르면 멀리 보인다고 했던가. 삶도 생각하고 살면 조금 더 길어진다는 말도 있다. 오래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식을 확장하며 살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 가지 주제를 자주 생각하다 보면 노안 뒤 돋보기를 맞춰 쓴 후 경험하듯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죽음에 대한 글을 몇 차례 써보며 마침내 객기가 생겼다. 이왕에 맞이할 죽음이라면 즐겁게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 말은 이념논쟁이 휘몰아치는 시절 북한 찬양 고무 죄 만큼 이나 이질적인 말일까. “모순을 살아라.”는 글귀가 용기를 준다. 나의 이 충동적 사고가 신문에서 이어지는 말처럼 “기존질서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우리의 고착된 감각을 풀어놓을 강력한 체험”으로 작용 할지 누가 알겠는가. 몇 가지 사례로 사색의 여행을 떠나보자.

꾸준한 생각과 행동은 하나의 문화로 이어지며 확신마저도 변화 시킬 수가 있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는 망인의 주검을 춤과 노래로 보내드리는 관습이 있다. 생전에 무던히 고생하며 살았으니 죽어서는 좋은 세상에 가서 즐겁게 살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에서 친자식들마저도 이 대열에 기꺼이 동참한다. 한번 가신 분은 돌아와 경험을 들려준 사례가 없고 또한 달리 확인할 수도 없는 이야기지만, 보내는 사람들이 계속 믿고 반복하며 행동으로 실천 한다면 이 의식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결코 두려움이나 절망의 대상이 아니라고 인식시켜 주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먼저 해본다.

자기위주의 삶보다는 책임과 의무를 먼저 생각하며 타인의 고통을 눈여겨보는 사람에게는 삶은 무겁고 먼 여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논어』에서는 공자의 제자 증자가 죽음을 맞이하며 그의 제자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증자는 “지금부터 나는 삶의 고단한 책임을 면하게 됨을 알겠도다 (今而後 吾知免夫).”라고 말을 한다. 좋은 제자이면서도 훌륭한 스승으로서의 살아감,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 매사에 부끄러움을 앞세우는 마음, 사양하는 것을 미덕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옳고 그름의 판단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앞세우는 올곧고 고단한 삶을 살아온 한 선비의 죽음을 맞는 자세는 우리들의 통념을 뛰어넘는 해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삶을 너무나 사랑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스스로의 자존에 상처를 받거나 최선을 다하는 삶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사실상 자살을 택했다는 해석도 있다. 『노인과 바다』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자살을 택했다. 『쥬만지』 등 많은 명화의 기억 속에서 늙음마저도 멈춰 세울 것 같은 호기심 가득 찬 어른 장난꾸러기 로빈 윌리엄스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나는 “철학자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하며 죽음은 평정을 가지고 맞이해야 할 단순한 불행” 이라는 말을 아직은 이해 못한다. “육체적인 것을 경계하고 정신적인 것에 전념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타의적인 죽음보다 자의적인 삶에 대한 신념과 애착은 더 강할 수도 있다고 믿고 싶다.

위 외에도 신념이나 사랑, 관습 같은 무거운 주제가 아니라도 때론 눈물이, 지적 호기심 등 많은 기표(記標)와 기의(記意)가 인간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죽음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유관순은 모진 고문과 몸을 누일수도 없는 세평 남짓 좁은 공간에서도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움을 보여줌’에 초점을 맞춘다. “나의 유일한 슬픔은 나라를 위해 바칠 몸이 하나뿐이라는 점이다.”라는 유관순의 말속에서 그의 애국심과 국민을 위한 사랑이 이미 죽음을 초월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눈의 본질은 보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고 말한다.

눈물은 유약함의 상징으로 보이나 슬픔과 분노 기쁨과 환희처럼 상반되는 감정까지 아우르며 철길에 넘어진 사람을 보고 뛰어들게 하는 마력의 물로 작용을 한다. 슬픈 이야기지만 이조시대 여인네들은 남편이 죽으면 가문을 빛내야겠다는 생각과 때론 시어머니의 종용으로 남편을 따라 죽어 열녀의 명예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술을 좋아한 중국시인 이백은 술에 취해 강에 비친 달을 건저 내려다가 강에 빠져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죽음을 많이 지켜본 ‘마리아 작은 자매회’ 한 수녀님은 “죽음도 잘 준비하면 축제처럼 다가온다.”고 말한다.

평균수명이 20세 남짓하던 예수님 시대에는 인간의 최대욕망은 부활이요 영생이었다. 이제 인간수명이 80을 넘고 보니 장수가 큰 재앙으로 회자된다. 열심히 살고, 남의 어려움도 눈여겨보고, 자연의 이치를 조금은 이해하고 살다보면 꿀잠을 가져다주던 먼저가신 어머니의 그 좋았던 자장가 소리가 들려올는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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