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 - 김수영

거대한 뿌리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남(南)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 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구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뿐 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 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시 <거대한 뿌리>의 원작은 행 나눔에 파격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선 이 같은 행 나눔을 무시한다. 그의 시를 읽는데 다소간 원전을 훼손할 수 있음을 우려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 영역의 폭이 깊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인 김수영

  1. 년 서울 종로 출생
  2. 1945 예술부락 시 <조정의 노래> 발표
  3. 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4. 년 사망
  5. 년 김수영문학상 제정

김수영, 한국시문학사에서 그를 물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7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아내는 동안 그가 한국문단에 남긴 족적이 실로 큰 까닭이다. 특히 한용운을 넘어 저항과 참여의 영역을 열고 나간, 현대시의 시초가 바로 김수영이라고 단언해도 감히 책망하는 이를 찾기 어려우니 독설과 자조 속에 숨은 그의 눈빛이 시대를 관통함이다. 그래서 그가 떠난 세상에 그의 시는 여전히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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