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쓸면서 - 도종환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내 아직 어려서 눈물이 많고
오직 한 가지만을 애터지게 사랑하여
내 일상의 뜨락에 가득가득 눈들이 쌓일 때
당신은 젖은 빗자루로 내 앞의 길을 터주고
헐거운 내 열정의 빗장마다
세차게 못 박아주던 망치소리였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철철 고여 넘치는 우물이기 전에
그 우물에서 퍼올린 두레박 가득한 하늘빛이기 전에
썩고 버려진 것들과 함께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섞이어 흘러가자
아린 소금물 첨벙첨벙 허릴 적시며
외진 갯가로 배 밀어 가시던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눈 내리는 당신의 하늘만 다 못 거둔 아픔이지 않고
눈발처럼 소리도 못하고 땅 속에 스러지는
이 땅에도 아픔은 너무 깊지 않습니까

내 다시 이렇게 눈을 쓸며 당신 앞으로 갈 때
슬픔은 오직 슬픔의 것이라 하시며
손가락 끝으로 쑥새 몇 마리만 가리키시렵니까
당신의 갯가 위로 부는 바람은 이 땅에도 붑니다

당신 앞에 덧없이 지는 이국의 꽃 말고
땅에 떨어져 모진 바람 밑에 썩는 많은 것들은
우리가 거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비겁한 무리를 미워하는 우리들 사랑
희망의 누룩으로 당신은 썩을 수 있고
외롭지 않은 것들과 싸우는 우리 마음속
횃불 타는 기름으로 당신도 고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뼈아프게 찾는 양식을
나 또한 일생을 바쳐 찾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허기처럼 내리는 이 눈발로
하늘의 양식을 빚어내고 계시렵니까

녹는 것들이 모여 물줄기 이루어 가듯
이 땅에서 서로 뜨겁게 녹으며 사랑하면
짧은 이 삶이 고이어 영원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 시인 도종환

  1. 년 충북 청주 출생
  1. 년 전교조 결성 수감

시집 <접시꽃 당신> 외 다수

  1. 년 민족예술상 외 다수

 

케케묵은 서가에서 시인 도종환을 세간에 알린 시집 <접시꽃 당신>을 꺼내 다시 읽는다. 실천문학사가 찍어낸 초판 발행일이 1986년 12월이다. 이 시집은 1988년 11판 발행 만에 내게 왔으니 33년 동안 곁에 머물렀다.

책갈피 마디마디마다 빛이 바래고 바스라질 것처럼 낡고 건조해진 종이만큼 오래된 시간이 묻어날밖에 도리가 없는 세월이 흘렀다. 소년이었던 사내가 반백을 넘어가는 시간이 무참히 지나쳐 갔다.

속절없이 아내를 잃고 시를 쓰던 누군가는 공무원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차갑게 쫓겨나기도 했고 병을 얻기도 했으며 어이없게도 난장판이 따로 없는 국회라는 무대에 선 정치인이 될 만큼의 시간이었다.

좋은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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