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이종태 전)농협중앙회 광양·여수·순천시지부장

칠십 대 중반을 넘어서니 살아가기 위해 앞을 보는 것보다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며 발길을 멈추는 시간이 많아짐을 느낀다. 때론 후회를 하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습관들에 대한 씁쓸함을 회상하며 혼자만의 실소를 경험하기도 한다.

 작년 봄에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각종 과수 묘목을 심었는데 관리를 소홀히 하여 잡초와 가뭄으로 다 죽이고 말았다. 농사일에 고됨을 느껴서일까. 지금은 각종 꽃 63가지를 거실에서 기르고 있다. 꽃기린과 호접란, 카틀레야와 석곡들이 예쁜 꽃들을 머금거나 피워주고 있다. 생기 있고 아름다운 자연물을 보면 도파민이 급격히 증가하여 기분을 좋게 해준다는 생각에 심취하면서도 “돈 되는 일에는 잔생이도 관심이 없는 양반”이라며 지나가는 집사람의 푸념이 뇌리에 작은 여운을 남긴다.

나는 37년간을 금융기관에 근무했고 18년을 점 소장으로 일했다. 농업은행 동광양 지점장으로 근무할 당시는 중마동을 중심으로 시청과 소방서와 농협이 함께 이동하며 새로운 시가지 개발의 중심에 있었다. 지가(地價)가 거의 매년 20·30%가 상승하는 호경기가 계속되었다. 나름 시대와 지역의 변화를 예측하며 포스코와 연관업체는 물론  광양기업, 항운노조까지 소위 블루칼라로 불리던 성실한 근로자들을 지역발전의 주축으로 인식하며 당시 경쟁 은행에서는 까다롭게 심사하는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을 가감하게 점 소장 특인(特認)으로 모두 발급하고 지원해 주었다.

시청 등 공공기관 직원들에 대한 당시 심사가 어려운 1천만 원 신용대출도 나는 특별 심사 의견을 붙어 획기적으로 지원해주어 광양지역 공직자들의 재산형성에 기여하려 노력도 하였다. 감사에서 조그만 사무실이 인근 순천시지부 보다 카드발급과 1천만 원 특인 대출이 더 많으냐며 구두 지적을 받았으나 내가 특인 해준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의 부실은 신통하리만큼 전무하였고 업무실적은 획기적으로 증가하여 전국 1위로 해외 포상 여행을 2회나 대만과 일본으로 다녀온 경험도 있다.

업무추진에는 나름 진취적이었고 당시 농협중앙회 동광양지점장 두 번과 광양·여수·순천 시지부장으로 재임하며 지역개발 정보의 가까이에 있었음에도 나는 단 한 번도 부동산을 투자해본 사실이 없고 선배들의 애정 어린 충고에도 골프를 쳐 본 사실이 없다. 집사람과 자식들에게 늦게나마 변명하자면 나는 지역 농고를 나와 명문대학을 나온 대학 졸업입사동기들과 승진에서 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농협 생활을 한 것도 같다.

20대 초반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그저 호기심으로 읽어보았다. 소설가  이경자는 가난하던 시대 피 덩이 어린 동생을 업은 엄마 손에 끌리어 떠난 두 번의 피난길 두려움을 회상하며 “부자 되기를 바라지 않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가장 멋지게 인생을 사는 방법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새겨들었다. 인간의 욕망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생존본능과 겸손함을 거의 매일 다큐와 여행 프로를 통해 보면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이 생각난다. 나는 늦둥이로 부모 형님 누나들의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막둥이지만, 가족과 나를 분리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농협 입사 후 부모님을 직접 모시기전 7년간을 용돈 외 봉급 대부분을 아버지에게 드렸다. 대부분 직장동료가 결혼할 무렵이 되면 살 집을 마련하였음에도 나는 부모님을 모신 후 백만 원을 모아 50만원 은 결혼 비용으로 50만원 은 방 하나에서 방 두 개로 늘리는 전세자금으로 충당하였다. 부모님을 모시고 집사람과 같이 작은 화물 트럭으로 새로 살 집으로 이사를 하며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지 못한 아쉬움과 집사람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슴이 아리어 옴을 느껴보았다. 집사람은 당시는 처우가 개선되지 않은 교장인 장인어른의 슬하에서 5남매 중 둘째로, 세 딸 중 맏이로 자라 그런지 어려운 살림살이를 불평 없이 잘 꾸려가 주었다.

어머니께서는 노년을 막둥이에 의지하며 사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집사람을 친딸처럼 대해주셨다. 집사람도 자식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어머니와 오순도순 살림을 배워가며 20여 회의 이사를 하면서도 공손으로 일관하며 모셔주었다. 효도 못 한 자식이지만, 아버지는 88세까지 어머니는 91세까지 즐겁고 행복하며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고 가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서일까. 학원 한번 제대로 보내주지 못했지만, 자식들은 제 몫만큼 공부도하고 열심히 살며 효도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화목과 효 우선의 존재적 삶은 미흡한 소유를 잊게 해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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