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시니어클럽 소속 곽종구, 임흥식, 정선주 씨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5060세대’
“변화는 자연 현상…천천히라도 따라가려 노력”

과거에 공영방송만 나오던 텔레비전은 이제 케이블 채널만 수백 개가 넘는다. 한 집 건너 있었던 집 전화는 삐삐, 시티폰, 휴대전화 등을 거쳐 온 가족이 각자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살아간다.

우편은 이메일로, 지도는 내비게이션으로, 영화관은 넷플릭스 같은 OTT서비스로, 음식점과 카페 주문은 키오스크가 사람을 대신했다. 이렇게 현대사회가 바뀔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수십 년이다.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의 발전 속도는 날이 갈수록 더 가속화 중이다. 이 가운데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웠던 그 시절에 태어나 몸소 격변을 겪어온 5060세대는 ‘지금’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을 직접 만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만, 지금의 5060세대는 여전히 사회적인 활동이 활발한 만큼 어르신이라 부르기엔 다소 젊은 느낌을 받았다. 시대적으로 보면 한국전쟁 또는 격변기에 태어난 이들임에도 마냥 노인으로 접근하기는 뭔가 자꾸 어긋났다. 그래서 이들을 ‘어르신’이라 부르는 대신 ‘씨’라고 지칭하기로 했다. -편집자주-

 

광양시니어클럽이 운영 중인 ‘카페 모두’에서 곽종구·임흥식·정선주 씨를 만났다. 3명 모두 은퇴 이후 광양시니어클럽의 여러 사업단에 속해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10대였던 1960~1970년대 학교는 한 반에 6~7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수업을 들었다. 학교가 끝나면 농사와 집안일을 돕는 게 당연했고, 마을마다 정해진 인솔 학생을 따라서 수십 명이 같이 등하교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길은 울퉁불퉁한 흙길이었고 비나 눈이 오면 금방 진흙탕으로 변해 제대로 걷기도 힘들던 때다.

책보에 교과서를 한가득 담아 들춰 매고, 재 넘고 강 건너 학교로 매일 10리 길을 걸어 다니던 소년과 소녀는 이제 손주들에게 모바일페이로 용돈을 주고 앱으로 배달 음식을 시켜주는 어른이 됐다.

곽종구 씨는 1951년 전남 남원에서 태어났다. 아직 한국전쟁 중이 이어지던 시기다. 젊은 시절 여러 일을 하다가 1975년 포스코 포항제철소에 입사했다. 첫 봉급은 약 2만7천원, 당시 파출소장 봉급 수준이었다고 한다.

2007년에 퇴직해 지금은 광양시니어클럽에서 시니어교통안전데이터조사단 일을 수행하고 있다. 교통사고 발생 지역에 배치돼 교통량 측정 및 안전시설을 확인하는 등 안전한 교통환경을 조성하는 게 주요 활동이다.

예전에 곽종구 씨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흔한 가장의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포스코를 다닐 때는 바쁜 직장 일에 예민해서 자식들에게 세세하게 신경 쓰지 못했다. 삶을 돌이켜 보면 “왜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더 아끼지 못했을까”가 항상 아쉽다.

그런데도 자식들과 손주만 보면 “사람은 건강해야 한다. 건강 하려면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 등 잔소리만 이어졌다. 조용히 듣던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어느새 혼자 말하다 머쓱해질 때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쓰는 언어’가 아니라 ‘아이들의 언어’를 배워보려 노력을 해봤다고 한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 관심사를 갖는지, 어떤 성격인지, 어떤 말을 하는지, 모두 이해할 순 없더라도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변화는 느렸지만 꾸준했다.
 
어느 명절 때 어린 손주가 먼저 다가와서 귓가에 “할아버지 요즘 변했어요”라고 속삭였을 때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고 한다.

 

임흥식 씨는 전북 익산이 고향으로 1954년생이다. 1979년 경기도 김포에서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해 2016년에 퇴직했다. 첫 봉급은 8만8천원, 당시 쌀 2~3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2016년 퇴직 후 지금은 아동교육시설지원단 일을 하고 있다. 지역 아동시설에서 프로그램 및 학습 보조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이다.
임흥식 씨가 포항에 한 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포스코교육재단이 교육보국을 강조하며 적극적인 투자를 이어가던 때다. 기관과 기업도 1인 1PC 보급이 아니었던 시절에 교직원들은 1인 1PC 사용이 가능했다. 재단의 교육시설 투자는 당시 아주 선진적인 사례로 알려져 해외에서도 견학올 정도였다고 한다. 덕분에 임흥식 씨도 남들보다 컴퓨터를 더 일찍 접하고 다뤄볼 수 있었다.

교사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자녀에게 혹독한 경우가 많다. 임흥식 씨 역시 자식들에게 꼼꼼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온 신경을 다 쓰고 집에 오면 내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못할 때가 많았다. 외벌이로 자식 셋에 안사람까지 다섯 식구가 같이 살려니 살림은 늘 빠듯했다. 변변한 학원 수업 하나 보내주지 못한 것이 생각나면 늘 가슴 한쪽이 아리다.

임흥식 씨는 요즘 손녀와 유튜브로 관심사를 공유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이 쓰는 단어는 이해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라 손녀의 해석을 들으면서 대화한다. 그 와중에도 교사였던 성격이 남아 “아이들이 사용하는 은어와 줄임말이 정말 다양하다. 자칫하다 언어의 진정한 뜻과 아름다움을 잊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속마음을 전했다.

 

정선주 씨는 1960년생으로 여수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에 공직생활을 시작해 광양군청과 광양시청을 거쳐 지난 2020년 퇴직했다. 지금은 시니어금융지원단에 속해 지역 금융시설에서 취약계층 금융업무 보조, 민원 안내, 보이스피싱 예방 홍보 등에 집중하고 있다.

그녀가 일했던 1980년대는 지금과 달리 ‘워킹맘’이 적었고 외벌이가 더 많았을 때다. 맞벌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가정 풍토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일해도 아이 교육과 집안일 등은 여성이 해내야 하는 게 당연했던 때라 고생이 참 많았다고 한다. 아이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고 생각돼 늘 미안했는데, 그럼에도 자녀들이 “엄마를 이해한다”고 해줬을 때는 정말 고마웠다고 한다.

정선주 씨가 공직생활을 하던 초기에는 우리나라 대부분 기업이나 기관에 타자원이 별도로 있었다고 한다. 저마다 자신의 문서가 조금 더 빨리 작성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타자원 주변을 어슬렁거리거나 눈치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공직계는 근무환경의 변화 속도가 느렸던 편이라 1인 1PC가 완전히 정착된 것도 그렇게 오래 전은 아니었다고 했다.

비교적 가장 최근에 퇴직했던 만큼 MZ세대와도 함께 일해봤던 정선주 씨는 “젊은 세대를 따라가진 못하더라도 조금씩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에 곽종구 씨도 임흥식 씨도 깊게 공감했다.

 

이들 모두는 현대사회의 발전이 빠른 만큼 스마트폰 앱이나 키오스크 등 여러 기능적인 변화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론 옛 세대가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관점을 ‘지금의 젊은 세대와 요즘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은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들은 ‘지금의 젊은 세대와 요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거나,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하거나, 나에게 필요한 앱을 찾아 활용하는 것을 느리지만 천천히 스스로 해내려고 한다. 나름대로 세대와의 교감 방식인 셈이다. 다만 이전보다 빠르지 못한 마음과 몸이 아쉬울 뿐이다.

곽종구 씨는 “당장 안되더라도 젊은 사람을 이해하고 따라 하려고 노력해 본다”며 “고지식한 관념만 갖고 늙어가면 결국 스스로를 사회와 가정에서 소외시킬 뿐”이라고 말했다.

 

임흥식 씨는 “사실 이 나이가 되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며 “예전의 사회나 문화가 조금 그리울 것일 수도 있지만, 젊었을 때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이 지금은 조금씩 더뎌지고 느려지기 때문에 더 옛날 생각이 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선주 씨도 “SNS로 요즘 세대와 소통하다 보니 예전에는 당연했던 길고 지루한 문장보다 짧고 간결한 문장이 더 좋다”면서도 “관심사가 같은 젊은 세대의 말은 이해가 되지만 다른 분야의 은어는 아예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곽종구·임흥식·정선주 씨는 “젊은 사람들만큼 빠르게 적응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천천히 하나씩 배우고 익혀나가려고 노력한다”며 “나이와 세대를 떠나 도전하려는 마음과 과정만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은 다 해낼 수 있다”고 전했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